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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39화 (339/380)

인조, 명군이 되다 339화

세자는 생각했다.

과연 눈앞의 아버지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라 할 수 있을까?

고민은 짧았다.

반정 이전 세자 자신은 어렸다.

무엇도 모르는 꼬맹이에 철부지.

그런 핏덩어리를 오늘날의 자신으로 길러준 건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진짜 아버지만이 줄 수 있는 그런 사랑.

세자는 마음을 굳혔다.

짐작했던 것만큼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머니가 더 걱정되었다.

여전히 당혹한 안색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위해 세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오직 사실만을 말하기로 했다.

부왕을 향해서.

“아바마마께서 과거의 아버지와 신체적으로만 동일하건, 혹은 그저 기이한 심병心病이나 신기묘산의 부작용을 앓는 중이시건…….”

세자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소자가 느낀 아버지의 사랑은 진짜였습니다. 그건, 아바마마께서 저를 진짜 자식으로 여기셨기 때문이겠지요?”

“사실이다.”

부왕의 확언에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였다.

“아바마마께서 소자를 자식으로 여기시고, 진짜 사랑을 내려주셨으니 그 반대도 성립하지 않겠습니까?”

“…….”

“이것은 소자에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세자의 장담에 부왕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쉽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일까.

얼핏, 복잡해질 수도 있는 문제이긴 했다.

부왕의 실체와 이 관계가 무엇인지…….

탐구를 이어가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으리라.

하지만 본인이 느끼는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전혀 복잡하지 않은 문제였다.

‘어마마마께서도 그러실 수 있을까?’

세자는 확신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과거의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런데 타인이 되었는지, 타인이 아닌지도 분간하기 어려워진 부왕과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셔야 할까?

자신처럼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으나, 세자도 차마 이것이 정답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 세자빈이 부왕과 같은 상태에 놓인다면 지금보다 훨씬 당혹스러울 테니까.

‘어머니…….’

세자는 부왕이 그간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두려워졌다.

그때였다.

“전하.”

중전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전하께서 알고 계시는 과거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세자와, 저 말입니다.”

“……음.”

왕은 난처한 얼굴로 이마를 만졌다. 그가 기억하는 가족들의 결말은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중전의 의문에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왕은 지긋한 시선을 느끼며, 한숨과 함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조선이 금나라에 무릎을 꿇은 뒤에 세자는 포로가 되어, 세자빈과 함께 금나라의 수도로 보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금나라는 청으로 국호를 변경한 뒤이고, 수도 역시 북경으로 옮긴 뒤이나, 이를 전부 부연하기엔 답이 길어질 수 있으므로 생략됐다.

“그곳에서 세자는 금나라의 인질이자 조선의 견제 수단으로 이용됐다. 마치 고려가 말엽에 원나라에 끌려다녔을 때처럼 말이다.”

결말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세자의 얼굴은 굳어갔다. 쉬이 결말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과거, 혹은 이전의 나는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왕은 세자를 박대했고 세자는 귀국한 지 오래지 않아 피를 쏟으며 죽었다.”

“…….”

세자는 놀라워하다가,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상태로 침묵하던 세자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봉림대군에게 특혜를 주셨군요.”

자신이 죽었으니 다음 왕이 될 사람은 당연히 둘째인 봉림대군이다.

그런 봉림대군은 역사가 달라진 지금 무척 이례적인 특혜를 받고 있었다.

세자에게는 이제야 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고, 부왕의 말에 허언은 없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소자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이 왕이 되었다면, 원래 후계자의 후사는 어떻게 되는가?

“왕이 세자를 이미 저버렸으니, 세자는 굳이 상세한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이다.”

“…….”

세자는 이것이 부왕의 배려임을 알 수 있었다. 상세히 말해주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참혹했다는 것이리라.

이에, 중전이 물었다.

“그때 저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비가 되어서 자식을 질시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며, 자신에게는 손주인 후손들마저 처참하게 대했다는 것.

중전 자신이 두 눈 빤히 뜨고 있었다면 용납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때 중전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습니다.”

“…….”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중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더는 지아비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세자의 말이 옳구나.”

중전이 이르자 세자가 공손히 끄덕였다.

“전하께서 아시는 역사에서, 신첩은 죽었으나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며, 세자와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

“전하께서 오늘날처럼 변모하신 건 하늘에 저희의 한이 닿았고, 나아가 열성께서 보우하신 덕입니다.”

왕은 그저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무엇을 염려하셨는지 신첩도 알겠으나, 신첩은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라져서 다행입니다.”

중전은 그 확신을 전달하기 위해 처음으로 왕에게 손을 뻗었다.

마른 손가락들이 축 늘어진 두꺼운 손목을 붙잡았다. 중전이 양 손을 포개자, 왕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 * *

충격!

십수 년간 아버지로 알고 지냈던 사람이 실은 진짜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

……라는 반전이 드러났으나 세자에게 혼란은 없었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된 덕이기도 하겠지만, ‘진짜 아버지’라는 사람이 벌인 짓이 끔찍했던 것도 컸다.

만약, 이라는 고민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으니까.

‘세자빈. 그리고 내 아이들…….’

진짜 아버지에게 있어 자신은 진짜 자식이 아니었다.

반대로, 가짜일지도 모르는 이 아버지는 자신을 진짜 자식으로 여기고 사랑해주었다.

그것이 세자에게 이 혼란을 쉽게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해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가진 관계들의 실체를 다시금 고민해볼 계기가 되었다.

과연 자신은 가족들에게 진정한 의미로 ‘진짜’ 가장이었나?

세자는 자신이 가족을 그릇되게 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세자빈을 둘도 없이 사랑했으며, 자식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니까.

조심해야 할 부분은 이 마음이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진짜로 여겨지는,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 아버지는 아니었던 과거의 아버지 역시 한때는 자신을 사랑했을 테니까.

그런 사랑도 계기가 있으면 변모해 버리는 것이다.

‘가슴 깊이 새겨두어야겠다.’

세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새로운 화제를 떠올렸다.

“……아바마마.”

세자의 부름에, 눈시울 붉은 부왕이 고개를 돌렸다.

“말하거라.”

“소자는 둘째도 진실을 알 자격이 있다 사료하옵니다.”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었다는 것 말이냐?”

“그러한 역사 자체는 중요치 않다 사료하옵니다. 부왕께서 변모하신 덕으로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옵니다. 하오나…….”

“둘째가 혼란해하고 있으니 말이구나.”

“예에. 둘째는 자신이 받는 특혜의 근간을 알지 못하여, 무척 혼란해하고 있사옵니다.”

내막을 알지 못한 채로 특혜를 받아온 봉림대군은 자신의 처우에 의문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혜를 과도하게 의식하여, 얼마 전 한양에 방문했을 때는 세자 자신만 쏙 빼놓고 다른 가족들만 보고 가버리기도 했다.

매한가지 가족이자, 앞서 내막을 알게 된 형으로서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전말을 알려준다면 속이 무척 가벼워지지 않겠사옵니까?”

세자가 청하였으나 왕은 썩 내키지 않았다.

“만약 둘째가 다른 역사에서 벌어진 가능성에 집착한다면, 화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분명 화근이 되지도 않을 것이옵니다.”

“……으음.”

왕은 쓰게 침음했다.

그라고 둘째를 불신하지는 않았다. 또한, 둘째 역시 진실을 알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상일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법.

굳이 시험하지 않아도 된다면, 굳이 시험하지 않아야 한다.

“주제넘은 상언上言일지 모르나, 소자는 아바마마께서 진실을 밝혀주어 무척 기쁘고 또 감사하옵니다. 오랫동안 흉중에 쌓아두었던 의문이 끝내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자의 말에, 중전 또한 왕의 곁에서 끄덕였다.

이에 왕이 답했다.

“내가 끝내 천기누설한 것은 가족의 의문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여파는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봉림대군에게도 진실을 밝히는 건 달랐다.

그에게도 부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난관이 생기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앞서 우려되었던 부분이다.

혹 봉림대군이 다른 역사에 심취하여 그것을 재현하려 들지는 않을까?

만약 봉림대군이 만용을 부린다면, 왕가는 분열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보게 될 터였다.

“나는 세자와 둘째 모두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만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할 미약한 가능성일지라도 말이다.”

왕의 근심에, 세자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서 아뢨다.

“어떤 역사에서 자신이 왕이 되었다, 하는 말은 허황한 소리에 불과하옵니다.”

“그러한 말들은 보통 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거가 있었다는 진실과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주는 무게가 다르다.”

“하오나, 소자와 둘째 모두 부왕에 의해 변모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중이고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사옵니다.”

세자가 진지하게 아뢨다.

“그렇다면 다른 역사의 이야기 따위, 허황한 소리일 뿐이지 않겠사옵니까?”

다른 역사에서 자신에게 벌어졌다는 일은 부왕의 정체보다도 큰 충격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과거의 아버지가 이제 와 새삼스럽게 미워지지도 않았고, 현재의 아버지를 더 선호하게 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세자 본인에게 있어 아버지는 눈앞에 계신 부왕뿐이므로.

이에 왕이 답했다.

“만약 봉림대군도 세자처럼 생각한다면…….”

“소자가 넌지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음.”

왕은 생각했다.

당사자인 세자가 이토록 강건하게 원한다면, 허락해주는 게 맞지 않을까.

세자도 봉림대군도 이제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 세자가 잘 살펴보고, 괜찮겠다면 둘째에게 전말을 알려주거라.”

그러자 세자가 기쁨에 부푼 얼굴로 답했다.

“망극하옵나이다, 아바마마.”

“세자가 형제를 생각하는 우애가 이토록 두터운데 내가 어떻게 마다만 하겠느냐.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각오도 대비도 없이 벌이는 일은 무책임이 된다. 그것이 설령 상대방을 위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왕 역시, 천기누설을 앞두고 단단히 각오해야만 했다.

“각골명심하겠나이다.”

“그래……. 그만하면 되었다.”

왕은 몇 번 고개를 주억이고는 덧붙였다.

“세자가 안부 인사하러 왔다가 참 많은 일을 겪었구나.”

“무척 귀중한 순간이었사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마음이 크게 놓인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이쯤 하자꾸나. 아무튼, 복이모사에서는 잘 해주었다.”

“다 아바마마께 배운 것입니다.”

“하하.”

왕은 손을 뻗었고, 세자는 무릎 꿇은 자세로 다가왔다.

왕은 세자의 머리부터 뺨을 쓸어내렸고, 어깨도 매만졌다.

“역시 내 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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