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41화
조선의 실체를 정탐하라는 이에미츠의 명령이 대마도주, 소 요시나리平 義成에게 전해졌다.
이에 소 요시노리는 이를 수행하고자 자신의 측근을 내보냈다.
아리타 모쿠베는 이러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주인인 도주에게 명령을 받았으니 수행할 따름.
그러나 직접 보게 된 조선의 성세란 놀라웠다.
‘전쟁 때 명나라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연명한 그 조선이 맞나?’
그가 아는 역사를 부정하듯 조선은 번화한 마포나루로 모쿠베를 맞이했다.
주변에는 조선인들만 아니라, 왜인 대마도에서도 보기 힘든 남만인들 또한 간간이 돌아다녔다.
‘에도나 오사카가 이런 느낌이라던데. 조선놈들이 생각보다 팔자가 많이 폈구나.’
모쿠베 또한 조선과 지척인 대마도의 가신으로, 소식은 많이 접해보았다.
그러나 직접 두 눈으로 실체를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는데, 막상 보니 간간이 전해지던 소문이 허황되지만 않음을 느꼈다.
‘요동과 중원에도 영지를 두었다고 했지?’
모쿠베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히데요시도 해내지 못한 것을 히데요시에게 무력하게 당한 조선이 이룩했단 말이지…….’
지난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원中原의 사백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중원 사백 주 앞에서 조선이란 단지 앞서 거쳐야 할 관문에 불과했다.
과연 개전 직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의 영지를 휩쓸었다.
이러한 과정에셔 조선의 존재감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조선의 장수 이순신 한 사람의 영향이 그의 나라보다 더욱 컸으니까.
일본에, 모쿠베에게 조선이란 그런 나라였다.
그러한 나라여야 했다.
‘그런데…….’
모쿠베는 문득 등줄기가 오싹해지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묘한 전율이었다.
근거를 알 수 없는 감정.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아니면, 조선은 원래 이러한 힘을 내재하고 있었으나 단지 전쟁 때만 상태가 안 좋았을 뿐인가.
‘아무튼, 도주는 무척 좋아하겠어.’
전통적으로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맡아온 대마도다.
상인들은 그런 대마도에서 공수公私 무역을 통해 대마도 사람들을 먹여살렸고 말이다.
‘그 상인들 없인 대마도가 살아남을 수 없지.’
대마도는 바다 한가운데 놓인 산이었다.
토질이 좋지 않고 사시사철 짜디짠 해풍이 불어 농사에 무척 부적합했으니까.
이런 땅인데도 열도에서는 겉도는 이탈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꾸준하게 인구를 늘렸다.
그런 대마도였기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무역을 중개하지 않으면 모두가 굶주려야 했다.
‘반대로, 무역이 활발해지면 그만큼 대마도는 부강해졌고.’
그렇기에 과거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옛 대마도주가 무던히 현실을 왜곡하고자 애썼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양국의 외교를 왜곡하려던 시도가 적발된 탓이다.
옛 도주는 목이 날아갈 뻔했으나, 자신이 겪은 위기보다도 섬의 미래를 더 걱정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양국의 관계를 봉합하고자 애썼다.
‘그 노력마저 무색하게도 이번에는 조선이 일본국왕사를 축소했지. 더는 한양에 상경도 못 하게 막았고.’
그만큼 대마도가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교역량 또한 제한되고 축소됐다.
비공식적으론 알음알음 사무역이 지속되고 있으나…….
말 그대로 비공식이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사무역이 불법이었고 무척 위험한 행위로 여겨졌다.
‘그리고 거래가 위험한 만큼 비용 또한 올라가니까…….’
모쿠베는 문득 떠올렸다.
‘그래서 조선유상 놈들은 항상 그 위험성 타령을 하면서 값을 자꾸 후려친단 말이지…….’
모쿠베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상념을 그친 그는 바다를 등진 채 거리의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항구에서 볼만한 건 다 둘러봤다.
복층으로 늘어선 상점과 창고들.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상품들. 즐비하게 오가는 행인과 크고 작은 배.
수시로 부두에 놓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무수한 짐과 상자들까지.
분명 번화함을 드러내는 것들이지만, 이건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성세의 일면일 뿐이다.
다른 것들도 확인이 필요했다.
과연 안쪽 수도에서 백성들의 삶은 어떤가?
귀족들의 삶은 또 어떠한가.
평범한 사람들도 식생활이 그런대로 괜찮다면, 나라가 잘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반대로, 귀족들조차 먹고사는 형편이 좋지 않다면 나라가 망해간다는 증거다.
이러한 지표는 항구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쿠베는 애시당초 한양의 풍광을 보기 위해서 방문했으며, 한양과 직결하는 항구인 마포나루는 거쳐야 할 관문에 불과했다.
모쿠베가 부두를 떠나 뭍 방향으로 걸어나가자 상점과 점포가 차차 사라지고 커다란 창고들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즐비한 창고들 사이로는 골목마다 우마차와 인부들, 경비 따위가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는데 저마다 피로감이 가득했다.
딱히 절망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힘써 일하는 장소에서는 흔히 보이는 표정들이다.
더 뭍의 안쪽으로 나아가자 창고들마저 사라졌다.
대신 한양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대로만이 지평선까지 쭉 뻗어나가 있었다.
대로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행인들이 지나다녔다.
모쿠베가 지나온 항구와 창고가 종착지일, 우마차와 짐꾼들도 흔히 보였다.
그런 드넓은 대로 좌우로는 잘 개간한 논밭이 광대하게 펼쳐졌고, 그러한 광야 위로 틈틈이 민가나 농막 따위가 세워져 있었다.
‘이쪽은 조금 휑하군.’
대신 대로변에 드문드문 놓인 주막과 주변 평상에 앉아 쉬는 행인과 일꾼들이 자칫 공허할 수 있었던 풍경을 채워주었다.
주막의 손님들은 저마다 밥상과 술상을 끼고서 두런두런 떠들다가도, 시야에 문득 모쿠베가 들어오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러한 시선들을 의식한 모쿠베는 문득, 주막의 손님들만 아니라 오가는 행인들 역시 자신을 쳐다보면서 지나쳐간다는 것을 깨쳤다.
‘……왜?’
모쿠베는 당혹했으나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로는 항구와 다르게 조선인들만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모쿠베를 정말로 외부에서 온 불청객을 발견한 양, 당혹스러우면서도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주시하며 지나쳐갔다.
‘어어…….’
모쿠베는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조선인들은 위아래를 모두 갖춰 입거나,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만을 걸쳤다. 그런 그들과 달리 모쿠베는 헐렁한 상의 하나만 걸친 채 맨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인들과 비교해 왜소한 키까지.
사실, 그보다도 더 이질적인 부분이 있었다.
모쿠베가 바짝 깎아둔 앞머리와 정수리였다. 그러한 머리 모양은 모쿠베가 어느 족속에 속하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단지, 자기 자신의 머리 모양을 볼 수 없기에 간과하고 있을 뿐.
이처럼 행색과 외견이 모두 이질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외부인이 조선인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으니, 당연히 이목을 살 수밖에 없다.
‘눈치 보이는데…… 설마 외부인은 항구를 벗어나면 안 되는 건가?’
과연, 그러한 제약이 있을 법했다.
부산포 왜관에서도, 그 이름처럼 왜인의 통행이 허락은 되나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서는 안 됐다.
그곳과 마찬가지로 통행 규정이 있었다면…….
‘이러다가 조선군에 붙잡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이 들었으나 모쿠베는 용기를 냈다. 뻔뻔하게 둘러대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에서 왔다고 하자. 그리고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고 있다고 하지. 흠, 그럴싸한데?’
용기를 낸 모쿠베는 다시 발을 옮겼다. 한양을 보지 않고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모쿠베는 오가는 조선인의 인파를 헤쳐나가며 속으로 변명거리를 구체적으로 고민했다.
‘조선놈들은 구리와 유황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반대로, 열도에서는 삼蔘과 책을 선호하고.’
교역이 먹여 살려주는 대마도의 가신으로서, 모쿠베 또한 교역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구리와 유황은 조선의 밀거래상단, 조선유상이 거래량 무제한으로 취급하는 품목이었다.
그들 말로는 구리와 유황이 본토에서는 거의 나지 않아, 대부분을 밖에서 수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요동만 아니라 중원에도 영지가 늘어난 덕인지 두 품목의 시세를 후려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값만 맞춰준다면 무제한으로 구매해준다는 건, 두 품목이 조선에서는 무척 수요가 많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니 나는 일본에서 구리와 유황을 팔러 왔다고 하면 되고…….’
반대로 열도에서는 조선의 삼과 책을 비싼 값에 쳐주었다.
고려인삼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귀하고 능한 명약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전국시대가 종식한 뒤로 열도에서 주된 사인死因이 창칼이 아닌 노환과 질병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고려인삼의 가치는 더더욱 올라갔다.
책 또한 마찬가지.
난세를 지배했던 과거의 무가들은 글자 아는 것을 되려 수치로 여겼지만, 도쿠가와가 천하를 통일하고 난세를 종식하자 상황은 반대로 되었다.
에도의 막부가 지난 전쟁을 통해 전리품으로 수입한 조선의 지식과 사상을, 그들이 열도에 수립할 새로운 질서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가 정비되자 무인들은 소위 ‘실력행사’만으로는 입지를 상승시키기 어려워졌다.
새로운 질서에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고 높은 자리로 향할 수단은 잘 갖춘 지식과 교양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지식과 교양을 쟁취하고자 너나 할 것 없이 신질서의 원류인 조선의 서책을 사들였다.
그 값이 얼마나 되든 간에 말이다.
‘그걸 조선놈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오죽하면 밀수상단에 불과한 조선유상이 귀하고 비싼 삼과 서적을 대량으로 취급할까.
삼과 서적이 무한대로 솟아나는 화수분이라도 가진 건 아닐 테니, 놈들도 이러한 품목이 열도에서 잘 먹힌다는 걸 알고 적극적으로 매입하는 것일 터.
‘그러니 삼과 책을 사러 왔다고 하자. 구리와 유황을 판 대금으로 말이지.’
이거야말로 조선놈들에게 점수를 가장 많이 딸 수 있는 변명이었다.
‘이만하면 길 좀 헤맸다고 핍박까지 하진 않겠지.’
모쿠베는 자신이 세운 전략에 감탄하면서 발길을 옮겼다.
그간 머리를 굴리는 데 심취한 덕인지, 모쿠베는 어느새 한양과 이어지는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지평선의 좌우로 펼쳐진 외성 성벽과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광대한 도로. 두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웅장하게 솟아오른 성문.
다채롭게 채색하여 알록달록한 원색의 조화를 과시하는 누각의 천장 아래로 성문의 이름이 현판에 쓰여 있었다.
[崇禮門]
숭례문.
‘가토 기요마사加藤 ?正가 한양을 점령할 때 지나갔다는 문이구나.’
숭례문은 통로가 뻥 뚫린 채 행인들이 바삐 오가는 중이었다.
그 통로 너머로는 항구에서도 흔히 보았던 복층 건물들이 대로를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었으며, 그 끝이어야 할 지평선은 행인들의 즐비한 머리들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위로 자욱하게 번지는 흙먼지는 활기찬 것을 넘어 정신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도요토미가 말한 나니와浪速의 영화가 꼭 이랬을까?’
알 수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래전에 죽었고, 일본의 중심은 도요토미의 뒤를 이어 천하를 차지한 도쿠가와에 의해 에도로 옮겨졌으니까.
모쿠베는 감상을 떨쳐내고 재차 발을 옮겼다.
어쨌거나,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수도를 정복하기 전 지나갔다는 문이다.
그 아래를 똑같이 지나가 보면 그때 기요마사가 느꼈던 만족을 비슷하게라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모쿠베가 당당하게 숭례문에 당도한 순간이었다.
“멈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