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43화
일본.
조선의 불미스러운 이웃.
수천 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의 역사가 증명하는 건, 이 불미스러운 이웃은 틈만 나면 한반도를 침공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불가피한 현실이다.
일본은 대륙의 끝단에 있는 나라고, 그 너머에는 방대한 태평양太平洋이 지구 반대편까지 펼쳐져 있다.
지정학적으로 현실이 이러했기에 일본은 항상 조선을 통해서 진출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한반도는 그런 일본의 진출을 가장 맞이하게 되는 수문장 역할을 하게 되고 말이다.
‘그러니 배후를 안정시켜야겠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일본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단순명료하고, 확실한 방법.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일본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대부분 분야에서 조선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인구와 생산량.
경제와 무기 수준 등.
참혹했던 전란의 시기를 막 종결하고, 열도를 통일한 도쿠가와 가문의 선도로 부강富强을 향해 나아가는 일본이다.
내부에 여러 균열이 산재해 있기는 하다.
변혁하는 시대 앞에서 휩쓸리고 도태하는 무가武家들.
전란 때는 물론이고, 여전히 착취의 대상에 불과한 양민 대다수.
포장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가혹한 세파世波는 각계각층에 불만을 일으키고, 현실을 외면한 채 허상의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이단과 외부의 종교에 심취하게 만든다.
이러한 반향에 권력과 질서가 저항하면서, 불만과 불안은 켜켜이 응축되다가 언젠가는 터져 나오기 마련이고 말이다.
‘대표적으로는 시마바라島原에서의 민란이라던가.’
멀지 않은 1637년, 원래 역사에서는 일본의 큐슈九州 북부 시마바라島原에서 기독교인 주축의 대규모 종교 반란이 일어났다.
에도 막부의 가혹한 수탈에 살벌한 종교 탄압 문제가 더해져, 약 3만여 명에 달하는 양민들이 일제히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여기에는 난세의 종식으로 주인과 역할을 모두 잃어버린 낭인浪人, 즉 도태한 무사들까지 합류했다.
시마바라의 민란은 과도기의 모든 문제가 겹쳐서 터진 사건인 것이다.
에도 막부는 이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무려 13만 여에 달하는 정규군을 투입해야만 했다.
봉기군에 낭인들도 다수 합류했을 뿐 아니라, 양민들 역시 전란을 살아온 세대였던 탓이다.
아무튼, 이 시마바라에서의 민란을 시작으로 에도 막부는 근 3천여 건에 달하는 민란을 겪는다. 그동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강하다.
당장 조선이 일본과 물리적으로 충돌한다면, 조선은 막부가 13만 정규군을 투입하게 만든 시마바라의 봉기군은 물론, 13만 막부군 또한 동시에 상대해야만 하리라.
그런 일본의 저력을 보여주는 게 현재 유구국流球國의 상황이었다.
수십 년 전, 일본의 일개 지방 호족인 시마즈島津 가문이 독자적으로 유구국을 침공했다.
그리고 유구국을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그들의 영토인 아마미奄美 군도는 아예 직할지로 삼았다.
일개 호족이 일국을 무릎 꿇리고 지배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인 일본이기에, 그들의 관심이란 대체로 독毒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누적된 역사로 입증된 바 있는 관계를 지닌 한반도의 국가로서는, 더더욱이 말이다.
그래서 왕은 고뇌했다.
‘이놈들을 어쩐다?’
물리적인 수단으로는 저들이 우위에 있다.
하지만 수단에는 물리적인 것만 있지는 않다. 선택지는 무한하다.
오직 수단의 정교함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일본은 에도 막부로 통일된 상태니까. 내부에는 불만이 산재할지라도 중앙집권은 되어 있다.’
어설픈 수작은 도리어 나를 찌르는 칼이 된다.
그 사례는, 최근 스페인이 보여주지 않았던가?
함선에 네덜란드 국기를 걸어놓고 조선의 해역에서 약탈 겸 이간질을 벌이다가, 똑같이 국기를 바꿔 다는 수법이 그대로 당해버린 놈들.
그 과정에서 산 펠리페라는 초대형 함선까지 헌납해 조선의 조선 기술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스페인 놈들은 원치 않았겠지만.’
하늘이 조선의 편이어서 벌어진 일은 아니다.
하늘은 언제나 대비되고 준비된 측의 편이며, 스페인은 오만했고 조선은 치밀했을 따름이다.
중앙집권체제에 돌입한 일본 상대로 어설프게 공작을 걸다간 똑같은 방식으로 당할 수 있다.
‘물리력이 우위인 세력을 상대로는, 뾰족한 제압법이 없다면 외교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책이다.’
이것이 최선이면서도 동시에 정론正論이었다.
적을 당장 무너뜨릴 수 없다면, 그것이 가능할 때까지 적의를 숨기고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도 그러했지.’
조선이 내내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지속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는 고려말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대국大國인 명나라와의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 역시 명나라와 외교분쟁이 발생하자 전쟁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원인은 요동에서의 패권 다툼이었다.
이성계는 본디 원나라로 귀화한 가문의 후손이자, 터전인 동북면을 기반으로 여러 여진족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명나라는 그러한 이성계와 그가 지배하는 조선을 두려워했다.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새롭고 더 강해진 기반을 이용해 북방의 기마민족을 규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된 기마민족은 항상 중원을 공격하고 정복했지.’
마치 칭기즈칸이 여러 몽골 부족을 규합해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원나라를 세워 중원을 지배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일어선 명나라는 이성계가 제2의 칭기즈칸이 될까 두려워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성계의 요동정벌 계획은 좌절됐다.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 즉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부왕을 실각시키고 조선의 국면을 전환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조선의 사대주의란 처음부터 국가의 근본이 아니었다.
외교에 있어 태도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인간관계도 그러한데, 하물며 실리에 따라 돌아가는 국제 관계야 말해 무엇하랴.
조선의 외교방침으로 사대주의가 대명사처럼 통용되는 건 명나라가 아주 오랫동안 패권국으로 군림했기 때문일 뿐이다.
명나라가 몰락한 직후에는 청나라가 빠르게 물리력을 행사한 뒤 빈 패권국 자리를 차지해서였고 말이다.
과연 이번 역사에서는 조정의 중신들 모두가 몰락한 명나라를 찬밥 취급하고 빈 패권국의 지위는 조선이 차지해야 한다고 믿지 않는가?
이를테면, 이 역사는 조선 사대주의의 희망편인 것이다.
사대주의를 통해서 명나라의 불필요한 주의는 피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파고들어 명나라와 금나라를 모두 골방으로 밀어내고 동북면에서 군림하게 되었으니까.
만약, 이러한 역사가 백 년만 일찍 이르게 벌어졌다면 조선은 패권국의 지위를 단숨에 굳혔으리라.
하지만 오늘날에 ‘세계’란 보다 넓어졌고, 여기에는 그간 야만의 영역이자 천하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열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을 마저 꺾지 않고서는 조선이 진정으로 동북아의 패자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에 사대주의를 한다?’
당연히 아니 될 말이다.
조선의 상황이 그렇게 구차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조선의 상황이 그리 구차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친교조차 수립하기 어렵다.’
임진왜란은 엉성하게 끝났다.
전쟁을 무리하게 추진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2차로 침공해온 일본군이 일제히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는 협상도 담화도 없었다.
패전한 땅에서 퇴출하려는 일본군과 수 년간 저 좋을 대로 학살과 방화를 반복해온 마귀들을, 퇴각마저 저 좋을 대로 허락해 줄 수 없었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 일생일대의 승부만이 있었을 뿐.
그리고 수백 척 왜선, 수만여 왜구들의 인명을 노량露梁에 묻어버린 뒤로 조선과 일본의 접촉은 멎었다.
소통이 다시 시작한 건 이때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609년.
조선에서는 광해군이라는 새로운 왕이 즉위한 시점이었다.
‘문제는, 이때 수립된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완전히 날림이었다는 거지.’
조선은 외교관계의 재수립을 조건으로 세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국서國書를 먼저 보냄으로써 예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은 왜국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니,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것으로 사죄함이 마땅했다.
다른 두 가지는 국가적 피해의 복원이었다.
전쟁 와중 성종묘인 선릉宣陵과 중종묘인 정릉靖陵이 도굴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조선은 이 사건의 범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의 송환을 요구한 것이다.
후자는 어느 정도는 실현됐다.
그러나 서양에 이미 노예로 팔려갔거나, 열도 각지로 흩어져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포로가 많았다.
전자는 아예 일말이라도 해결된 게 없었다.
도굴 사건의 진범은 찾아내지 못했으며, 이때 사라진 유해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외교 재수립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유약조는 체결되었다.
광해군은 불안한 왕권을 가진 채 막 즉위한 상태였다. 이때 외교 재수립이라는 업적은 놓치기 힘들 수밖에 없다.
더욱이 국경 너머에서는 오랜 우방국이었던 명나라가 거세게 몰락하고 있었고, 여진족의 금나라는 무섭게 발흥하고 있었다.
뒤에 일본이라는 강력한 적국을 외교 단절인 채로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니 기유약조는 당시 조선이 처했던 상황이 너무 나빠서 마지못해 체결된 것이지.’
하지만 지금 조선은 당시의 조선과 다르다.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표현조차 조선의 변화를 다 담아내기에는 어려울 정도다.
현재의 조선은 일본을 상대로 마지 못하여 우호를 받아들일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조선은 천명天命에 힘입어 중원과 세외에서 모두 호령하게 되었으니 이제야말로 오랜 숙원을 해결해야 할 때라고 여길 이들이 적잖았다.
‘신하들이 왜인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아마 절반은 그렇게 주장할 테지.’
터무니없는 희망 사항이었다.
조선이 아무리 부강을 구가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과거의 조선과 비교해 상대적인 수준일 뿐.
조선이 요동과 중원에 발을 들인 건 빈틈을 잘 노린 덕이다.
명나라가 여전히 건재하거나, 금나라가 이미 발흥하여 제국의 기세를 갖추었다면 어떻게 오늘날 같은 성세가 가능했겠는가.
포르모사를 정복한 것도 마찬가지다.
스페인령 포르모사는 이전 역사에서도 이즈음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함락된다.
‘조선이 가진 정예 상비군의 규모는 고작 3만이야.’
조선의 강역이 반도로 국한되어 있을 때는 이 정도로도 방위에다 진출까지 꾀할 수 있었지만, 국경선이 풍선처럼 팽창해 버린 지금은 오히려 너무 적은 수준이다.
반대로 일본은 조선의 배나 많은 인구를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있다.
그 머릿수에다가, 영아살해가 관습이 될 정도로 가혹하게 짜내어 만든 부로 무장한 일본을 어떻게 징벌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먼저 전쟁을 걸 요량으로 군사력을 폭증시킨다?
맨정신인 군주라면 불가능한 선택이다.
하물며 점령지가 이미 대폭 늘어나서 안을 다스리는 데만도 급급해야 할 상태라면 더더욱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2000년 전의 지구 반대편에서 알렉산드로스라는 한 남자가 자신의 정복을 증명하기 위해 수립한 헬레니즘 제국 같은 게 아니다.
설령 군주가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무재를 지녔더라도, 나라 안에서 살아갈 무수한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그와 같이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제대로 된 현실 파악을 해주리란 기대는 들지 않는군…….’
해소되지 않는 욕망과 바람은 빠르게 불만이 되니까.
문제는, 객관적인 자기 파악이 되지 않은 채로 남발된 욕망과 바람에도 예외는 없다는 점이다.
‘신하들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건 어렵겠고…… 일본에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책략을 걸고자 해도 역시 신하들이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원치 않겠지.’
그렇다면, 실방사만을 통해 비밀스러운 책략을 마련해야 할까?
‘……실방사라는 칼날이 무척 예리하고 정교하긴 하지만, 국가와 일개 조직이 낼 수 있는 힘은 단위부터가 다르다.’
일본은 부강한 나라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짐승을 비수 한 자루로 공략하긴 쉽지 않다. 그 비수가 얼마나 날카롭고 단단하건 간에 말이다.
왕은 턱을 매만지며 고뇌했다.
‘아니면…….’
그래도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몸집이 크다고 해서 칼날이 아니 들어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