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44화
“세자야.”
“예, 아바마마.”
무척이나 특이한 사건이 있었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왕은 항상 그래왔듯 아버지였으며, 세자 또한 여전히 아들이었다.
“실방사를 움직여야겠다.”
부왕의 지시에 세자가 공손하게 엎드렸다.
“하명하시옵소서.”
“대마도에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 調興라는 자가 있음을 아느냐?”
“아옵니다.”
세자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했다.
대마도의 간자를 적발한 게 근래의 사건이다.
간자를 통해 대마도의 사정을 더 면밀하게 알게 되었으니, 꼼꼼한 세자가 요주 인물의 인적을 놓칠 리 없었다.
더욱이, 이와는 별개로 야나가와 시게오키라는 인물 자체는 다소 유명세가 있었다.
자신의 주인을 배신했으니까.
옛 주군이자 전대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시가 막부의 대조선 외교 과정에서 문서들을 날조했음을 고발한 것이다.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본심이야, 당연히 대의나 정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열도는 에도의 막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가 수립했다.
그리고 이 신질서는 무척이나 견고하여서, 본인이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서 난세 때와 같은 쾌속의 출세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한계에 맞서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선택한 게 ‘고발’이라는 신질서 방식의 하극상이었다.
직속 주인인 소 요시토시의 배신 행각을 막부에 팔아, 그를 숙청하고 비게 될 대마도주 자리를 대신하고자 한 것이었다.
다만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예상치 못했던 부분은, 이 같은 고발에도 막부가 제때 대응해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공공연한 신질서식 하극상이 온 열도에 알려지고도 수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막부에서는 이렇다 할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자신이 고발한 소씨 가문의 차기 당주, 소 요시나리와 한 지붕 아래에서 불편한 공존을 지속하고 있었다.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골로 가야 한다는 전제만은 분명히 해둔 채로 말이다.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대마도주를 고발하고도 몇 년이 지났다. 하지만 뚜렷한 결과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지. 그 사이에 대마도주가 바뀌기도 했고 말이야.”
왕의 말에 세자가 긍정했다.
“분명 그자는 매 순간이 가시방석일 것입니다.”
“그럴 것이다. 배신은 신속해야 하는 법인데, 아무리 방식이 달라졌다곤 해도 이건 너무 비정상적으로 늘어졌다고 깨우쳤을 테니까.”
“소자가 사료하건대, 막부는 도주의 가문을 버릴 생각이 없고 다만 버릇만 다스릴 의도로 송사를 유지하는 듯합니다.”
아니라면, 배신이 공공연히 드러났음에도 소씨 가문을 계속 도주 자리에 놔둘 리 없으니까.
“세자의 판단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야나가와 시게오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자신의 용도를 깨우쳤을 거다.
그러니 더더욱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 될 수밖에 없다.
송사의 떡밥이 쉬고 모두의 뇌리에서 사건이 잊히게 되면 야나가와 시게오키 자신의 용도도 없어지는 셈이니까.
그리고 그다음 이어질 절차가 무엇이 될지는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더라도, 절대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신했을 것이다.
“실방사를 쓰려는 건 그 때문이다.”
세자는 이어질 말을 경청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만 조금 숙였다.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하극상을 결심한 건 막부가 자신의 편이 되어주리라는 믿음도 있었겠지만, 그 전에 자신이 대마도를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 또한 있어서였을 것이다.”
곧장 뺏길 만한 걸 뺏으려는 이는 없다.
좀도둑 중에서도 충동적이고 멍청한 놈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도주의 자리와 대마도는 좀도둑질 따위로는 훔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하극상을 소송이라는 방식으로 일으킨 이유다.
“다르게 말하면,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도 세력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래야 대마도를 강탈하더라도, 금방 다시 빼앗기지 않고 소유할 수 있으니까.
이에 세자 또한 동의했다.
“과연 그는 막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인을 모두 가까이에서 섬겼던 자이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시종으로서 섬겼고, 대마도주 밑으로 보내진 뒤에도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가까이서 알현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가진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막부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는 믿음, 그리고 자신이 세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
열도의 주인인 도쿠가와 가문을 삼대 내내에 걸쳐서 모신 자신이다.
반대로 대마도주는 임진왜란 때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외교문서를 날조해 온 배신자 가문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는 안타깝게도, 막부의 3대 주인인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그에게 별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여기에는 대마도주 가문이 비록 외교문서를 대대로 날조해 왔을지언정, 그것이 에도 막부를 음해하거나 공격하기 위함은 아니었다는 점 또한 반영되었으리라.
대마도는 어쨌거나 양국 외교의 우호적인 확대만을 위해서 행동해 왔다.
그것이 대마도가 수 세기에 걸쳐 일본을 겉도는 이유이면서도, 동시에 막부를 기만할지언정 배반하지는 않을 이유였다.
‘반대로,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명백하게 야망과 야심을 가지고서 자신의 직속 주인을 배신했지…….’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막부 중심의 질서 강화에 힘써왔다.
그런 그에게 야심가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야망을 실현하고자 공공연히 배신을 일삼는 자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막후幕後로 물러나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2대 쇼군과 가까웠다는 것도 한몫했을 거고.’
그리고 그 2대 쇼군은 최근 지옥으로 가고야 말았다.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등을 돌린 시점에서, 야나가와 시게오키를 지켜줄 사람은 본인의 생각관 다르게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점쯤 되었으면 자신의 종말을 거의 확신했을 테지.’
왕이 야나가와 시게오키를 점찍은 이유였다.
“우리가 몇 년째 추락하는 그에게 방석을 깔아주고 칼도 들려준다면, 감히 아조에 간자를 보낸 대마도주에게는 좋은 사례가 될 듯하구나.”
왕이 반어법을 섞어 장난스럽게 말했다.
세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끄덕였다.
“과연 대마도주의 죄는 목숨으로도 다 씻어내기 어렵습니다. 때마침, 야나가와 시게오키도 무척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니 제안을 거부하지도 못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방석을 빙자하여 인질도 받아낸다면 좋겠구나.”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두려워할 만한 것 중 하나는, 자신의 도박에 의해 가족 전체가 숙청당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무척 관대하다면 주범을 죽이고도 그 자손을 계속 밑에 둘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관대함을 맡겨놓을 방법은 없다.
하물며 자신의 가문을 갈아치우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 들었을 배신자의 가족이 용서받기란 더욱 쉽지 않다.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계략이 성공했다면, 소씨 가문은 시게오키의 철저한 대마도 소유를 위해서라도 절멸되어야 했으니까.
“받들겠사옵니다.”
“그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아주 감사하게 여길 듯하구나.”
비단, 조선의 제안으로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꼴에 수직인受職人 가문이다.
수직인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왜인 중에서 조선에 귀화하여 벼슬을 얻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조부와 증조부가 이 수직인에 해당했다.
야나가와 시게오키로선 가족을 미리 조선에 피신시켜둔다면, 자신이 대마도 강탈에 실패할지라도 후계만은 조선에서 유력자 집안으로서 이어질 수도 있는 셈이다.
세자가 물었다.
“그를 대마도주로 만들면서, 동시에 가족의 신변을 확보해 둔다는 건 아조가 장차 대마도를 도모한다는 뜻이옵니까?”
왕이 답했다.
“알면서 묻는구나.”
대마도를 직접 친다면 물리적인 분쟁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내내 일본에서 겉돌아온 대마도를 슬쩍 당겨온다고 물리적 분쟁이 직결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마음 편하게 대마도를 수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잘 익은 과일을 따듯 쉽게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일본도 장기적으로는 공략의 대상이다.
전력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킬 방법이 있다면, 수행해야지.
“야나가와 시게오키를 이용해 대마도를 끌어오는 건 세자가 전담하여라.”
“예, 아바마마.”
“사정이야 다 알았을 터이니 유사시에는 맞춰서 진행하면 되고,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
“예.”
세자는 담담하게 지시를 받아들였으나, 그렇다고 정말로 보고 한마디 없이 독단할 세자가 아니었다.
부왕이 절대 보고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다면 모를까.
왕 또한 그러리라고 내심 짐작하고는 미소와 함께 일렀다.
“그래. 다시 부르마.”
“물러나겠습니다.”
세자는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 * *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방문객이 찾아가는 동안.
한양에서는 꽤 오래 지속되었던 공사가 마무리됐다.
[少陵圖書館]
영의정 이상의의 호를 딴, 소릉 도서관이 완공한 것이다.
도서관이 이떠한 존재인지는 이미 세간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진귀하고 값비싼 도서圖書를 무상으로 열람할 수 있는 장소로, 인쇄소의 활달한 운영에도 책을 펼쳐보기 힘든 이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전면개방은 아니었다.
도서는 진귀한 물건이다.
중인衆人 범부凡夫들이 마구잡이로 방자하게 출입하는 것을 허용했다간, 분실이나 파손 등의 사고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도서관 출입에 전, 현직자 본인과 동행인의 제한을 두기로 했다.
-그러면 값비싼 도서들을 백성들이 무상으로 열람할 수 있는 의의가 바래는 셈 아닌가?
도서관의 정책에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자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
엄격한 출입 제한은, 분명 값비싸고 진귀한 도서들의 보호 및 온전한 보전을 위해서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지식과 학문은 관리, 그리고 관리가 되고자 하는 사대부들에게는 저들 권력과 입지의 근간이었다.
특권의 기반을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고픈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식자들에겐 도서의 보호란 엄격히 말해, 둘러대기 좋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본의는 도서관 건립으로 인해 발생할 특권층 확대를 억제하는 데 있는 셈이다.
왕도 이러한 식자들의 본의는 잘 알고 있었지만, 기꺼이 응했다.
어쨌거나 방문객의 수준과 규모를 제한하는 게 당장 도서관 운영과 유지에 크게 도움 되니까.
혹여 도서의 분실이나 파손 등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해의 합치가 도서관의 엄격한 출입 규정을 만들었지만, 막상 도서관이 완공되고 개방되자 사람들은 까마득하게 몰려들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전부 수십 질이나 있군! 이젠 책 빌린다고 노랑이 같은 놈들에게 아부 떨 필요가 없겠어.”
“여기 있는 책만 다 팔아도 북촌은 사고 남겠는데?”
“언문주해도 있어!”
개장과 함께 으스대며 입장한 사대부들이었지만, 내부의 켜켜이 쌓인 도서들 앞에서는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역시 사서삼경이었다.
과거시험이 사서삼경을 기반으로 치러지니까.
그다음은 역시나 이원익과 박홍구 그리고 김집이 함께 해설한 언문주해였다.
두 전임 영의정과 명망 있는 유학자가 함께 해설했으니, 주해의 권위만큼은 국내의 어떤 주해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것만 달달 외워도 중간은 가겠지?”
“당연하지! 두 영의정 대감께서 함께 집필하신 주해인데, 어느 시험관이 부정할 수 있겠는가?”
“쉬잇, 이보게. 여기 논어 언문주해가 있네.”
“뭐?!”
언문주해는 최근까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만이 있었다.
각기 분량이 적은 경전이서 먼저, 그리고 빠르게 출판되었는데 다른 사서인 논어와 맹자는 분량이 많아서인지 출간이 늦어지던 참이었다.
“논어 언문주해라고?!”
“영의정 두 분과 신독愼獨이 함께 작업한 그 주해본인가?”
“다 나가기 전에 빨리 가지러 가세!”
문득 퍼진 소식에 사대부들은 선비 된 체통도 잊고 우르르 논어 언문주해가 있다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현직 관료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현직자들 역시 다시금 과거를 쳐서 품계를 올리거나, 인사에 가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꼭 과거科擧만 아니라, 중시重試라 하여 당하관들 사이에서 평가와 가점을 위한 별도의 시험이 있었다.
입신양명을 위해 반평생을 공부만 해온 사대부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두 전임 영의정과 김집이 함께 작성한 논어 언문주해는 출세로 향하게 해줄 전가의 보도였고,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귀물이었다.
“이보게! 좀 비키시게!”
“자네나 좀 비켜!”
“누가 나 밀쳤어?!”
연배만 따지면 자식은 물론, 손주까지 보았을 선비들이 미어터진 책장 사이에서 서로 몸을 쑤셔대며 언성을 높였다.
“야! 너 품계가 몇이야!”
“뭐, 품계?!”
다 매한가지 사대부들이기 때문일까.
으스대기를 좋아하는 양반 어르신네들의 고상한 품격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몸싸움이 벌어지는 인파 속에서 짜부가 되어가던 한 선비가 악에 받쳐 외쳤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품계가 대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