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345화 (345/380)

인조, 명군이 되다 345화

의정부.

나라는 커졌는데 수뇌인 삼공三公은 하나가 빠진지라 평소에도 바빴다.

그러니 매양 일 이야기만 할 법하지만, 과연 그렇던가.

수본手本에 대고 세필을 끄적이던 좌의정 남이공이 문득 입을 열었다.

“도서관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그러자 안쪽 상석에 앉은 이상의가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이 완공 소식을 듣고 찾아갔는데, 하관下官이 얼마나 많았는지 안쪽은 보도 못했지요.”

“듣자하니 사서삼경은 물론이요, 세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서책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학문과 지식 앞에서 달아오르지 않을 선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자리를 백성들에게 만들어주고자 상언上言까지 하셨으니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남이공이 답지 않게 칭찬했다.

그는 인색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호평을 쉽게 하지는 않았으니까.

이에 이상의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학문과 배움을 설파하여 만인을 교화하는 것이 유학의 가르침이지요. 나는 단지 성현의 뜻을 따랐을 뿐, 딱히 무언가를 해낸 건 아니외다.”

이상의가 겸양하자 남이공이 고개를 저었다.

도서관은 개념만 따지자면 유교의 나라에서는 전례가 없던 게 도리어 이상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전례 없던 개념을 최초로 떠올리는 게 쉬운가.

“겸양이 과하십니다.”

“겸양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소이다. 아무튼, 좌상께서 답지않게 공치사功致辭를 하시니 그게 혹 공치사空致辭는 아닐까 싶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냐며 이상의가 짓궂게 묻자, 남이공이 곧바로 웃었다.

“공치사空致辭는 아닙니다.”

“공치사는 아니다.”

그럼 다른 뜻이 있는 건 맞냐는 물음에, 남이공은 미소 머금은 얼굴 그대로 답했다.

“두 전임 의정들께서 언문주해를 세상에 내놓으시고 유명인사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도서관을 발 디딜 틈 없게 만드는 주범이 바로 그 언문주해였다.

이원익과 박홍구 모두 이력이 이상적일지는 못해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들.

그만한 사람들이 주해를 내놓았는데 설마 정론正論이 아니겠으며, 혹 재해석이 가미되었을지언정 그것을 하관下官인 시험관들이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두 사람의 언문주해가 과거 답안의 새로운 기준점이 되는 셈이었다.

남이공에게는 꽤 배가 아픈 일이었다.

사대부이자 선비인 그였기에 물욕物慾은 떨쳐낼 수 있을지언정, 공명심功名心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이에 이상의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말했다.

“그러니 우리도 언문주해를 내놓자, 그런 말씀이외까?”

이상의는 질문과 함께 자신 앞에 놓인 공문서를 들었다.

보라는 의미였다.

이원익과 박홍구가 언문주해를 집필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은퇴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 없으니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은퇴한 사람은 시간이 너무 남아도는 게 되려 문제다.

두 사람이 언문주해를 집필하는 건 꼭 유학자로서의 서명만 아니라 소일거리로서의 의미도 크다.

그러나 이상의 본인과 남이공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

나라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만큼 일감도 늘었다.

“……끄응.”

남이공이 아쉬운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내자, 이상의가 웃었다.

“정 문인文人으로서의 명성을 드높이고 싶다면 사직이라도 고려해보지 그러시오?”

그러자 남이공이 눈치를 봤다.

“사직한 두 의정이야, 일인지하 만인지상까지 지내봤으니 사직하여도 그만이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직분이 좌의정에 머무르고 있으니 지금 사직하기에는 아쉽습니다.”

일단 하산下山하더라도 정상은 찍고 내려와야지 않겠는가.

“하. 그럼 내가 먼저 사직을 해야겠구려?”

이상의가 짓궂게 물으니 남이공이 고개를 저었다.

“서두르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우의정 김류가 부재중이었으니까.

지금 상황에서 이상의가 사직해버리면 의정부는 남이공 혼자서 지켜야 했다.

한 사람이 빠진 것만으로 격무가 혼이 빠질 지경인데, 혼자서 의정이라니.

아니 될 노릇이었다.

이에 이상의가 탄식했다.

“이 사람이 지금은 사직해서는 아니 되지만, 그렇다고 사직을 아니 해서는 안 되겠구려?”

“그런 셈입니다.”

남이공이 당당하게 수긍했고, 이상의가 허탈하게 웃었다.

“거, 참.”

“우의정은 언제 귀환한다고 합니까? 저 혼자 중원에서, 모실 사람도 없겠다 편하게 군림하고 있을 텐데 참 부럽습니다.”

“우의정이야 장벽만 완성되면 돌아오지 않겠소이까?”

이상의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남이공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 방대한 장벽을 어느 세월에 완성하겠습니까? 분명, 우의정은 아랫사람들에게 다 떠넘긴 채 느긋하게 배꼽이나 긁으면서 호사를 누리고 있을 겁니다.”

남이공 자신은 격무에 시달리느라 문인文人으로서의 명성도 높이지 못하는 동안 말이다.

* * *

“이것은 내 선대 한께서 참으로 좋아하셨던 별식別食이지요.”

자금성紫禁城.

과거 명나라의 수도였던 북경北京의 한복판, 황제가 기거했던 궁궐에서.

이제는 궁궐의 새로운 주인이 된 금나라의 한 호격이 손님을 마주했다.

“과거 조선이 선한에게 자주 선물로 보냈던 것이로군요.”

우의정 김류.

그가 주안상酒案床에서 후식으로 놓인 곶감을 들었다.

그 광경이 호격 역시 곶감을 들고서 한 입 하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일까.

호격은 독주로 입과 목을 씻어낸 뒤 말했다.

“곶감은 조선과 금나라 양국의 두터운 우호를 상징하는 음식입니다. 선한께서는 옛 과오에도 관대하게 용서해 준 조선에 감사해하였고, 조선은 그런 선한께 곶감을 자주 보내주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상징이 있는 음식이니 이 자리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한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호격이 손을 내밀며 권하자 김류는 자신의 상에 놓인 곶감을 한 입 물었다.

김류는 곶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딱히 가리는 건 아니었다.

예전에는 없어서 못 먹었던 별식이다. 최상품 감의 맛과 식감을 납작하게 압축해놓은 진한 단맛. 누가 싫어하겠는가.

문제는 김류 본인도 늙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닳고 잇몸은 내려앉아 기력이 예전만은 못했다. 속도 쉽게 불편해졌다. 그 점에서 곶감은 아주 괘씸한 별식이다.

‘좋은 추억만 다 버리는군…….’

김류는 자신의 이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인상을 폈다.

“맛있습니다.”

“우의정이 만족한다니 다행입니다.”

호격은 비릿하게 웃고는 끄덕였다. 복심腹心이 있다는 걸 딱히 숨기지 않는 태도였다.

과연, 호격은 달라진 분위기로 본론을 꺼냈다.

“장벽 쌓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김류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장벽. 지긋지긋한 과업이었다.

일만 마무리되면 곧장 한양으로 귀환하리라.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사직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일정대로 진전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벽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

김류는 다시금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이것이 금한이 자신을 찾은 이유일까.

최근, 금나라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다스려야 할 백성이 북경과 직예에 훨씬 많아 천도遷都가 불가피했다고 하지만…….’

금나라가 그보다 더 의식했던 건 고작 강 하나를 두고 마주한 조선이었으리라.

조선은 요동에 이어 중원까지 진출했고 얼마 전에는 명나라 이남의 원해遠海에서 홍모이를 격파하고 그곳의 섬을 장악했다.

대외적으로 군사력을 과시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는 조선이다.

그러한 조선에 굴복하여 세가 이미 꺾인 금나라다. 계속 배후에 조선을 두고 싶지 않았으리라.

‘반대로 중원에서는 조선을 배반하더라도 우려가 적다.’

조선과 지척이었던 요동에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중원의 조선 땅이라곤 청래도와 발해渤海를 감싸는 얇은 회랑이 전부.

그것을 조선에서도 우려하게 되었기에 오늘날 장벽을 쌓는 중이었다.

‘그런데 금한이 장벽 쌓는 걸 편치 않게 여긴단 말이지…….’

김류는 불쑥 금한이 불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랑캐 추장에 불과한 너희 족속이 아직 하찮은 목숨을 보전한 것이 온전히 아조의 관대함에 나왔음을 잊었으냐.’

설사 금한이 불충한 생각 없이 한 발언일지라도, 이는 조선이 조선 땅에서 행하는 대사大事다.

‘어딜 오랑캐가 대국의 국사國事에 간섭하려 든단 말이냐.’

김류는 금한이 무척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당장 언성을 높이며 금한을 질책하는 게 상책은 아니리라.

금나라가 조선에 패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

혹 엄한 말로 꾸중했다가 저들이 성급하게 변한다면, 조선은 중원의 영토를 상실할지 몰랐다.

“그런대로 진전 중입니다. 신경을 써주시니 고맙습니다.”

이에 호격이 답했다.

“나는 금나라의 주인으로, 조선의 국사에 관여할 생각은 없지만 우방友邦이 번거로운 사업에 몰두하여 백성과 신하들을 곤란케 하고 있으니 괜히 걱정하는 마음이 듭니다.”

“…….”

“따지고 보면 금나라는 조선과 한 가족처럼 긴밀한 관계입니다. 어찌하여 이 같은 사이에 장벽까지 필요하겠습니까?”

“……장벽은 양국의 우호를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반대로 우호를 지속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친밀한 관계일지라도 적당한 거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침해가 일어나 마음이 상하게 되는 법인데, 하물며 장대한 국경을 마주한 양국의 관계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김류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더욱이 아조에서 장벽의 건설을 결의한 것은, 직예에서 횡행하는 도적들과 범죄자들이 함부로 넘어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분은 나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단속이 잘 되어, 넘어가는 죄인들이 크게 줄지 않았습니까?”

“친밀한 이국의 사정을 이토록 헤아려주고자 하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류가 더 이상의 간섭은 원치 않는다는 듯 딱딱하게 답하니, 호격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주안상에 놓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후로도 호격과 김류가 독대하는 자리는 한참이 이어졌다.

일국의 주인과 극동에서 세력을 과시하게 된 강국의 중신이 마주한 것치고는 소소한 주제들이 오갔다.

중요한 본론은 이미 오갔기 때문일까.

자리의 말미가 되어, 김류는 붉어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호격이 뒤따라 일어나서 김류를 배웅하고자 했으나 김류가 한 번 사양하자 마지 못한 얼굴로 더 쫓지 않았다.

“조선국 우의정께서는 잘 살펴가시기를 바랍니다.”

“금한께서는 안녕히 계십시오.”

김류는 금나라 하관下官들의 배웅을 받으며 자금성을 나섰다.

그리고 궐문 밖에 이르러, 자신을 기다리던 수행원들과 합류했다.

“돌아가자.”

정색하며 말하는 김류의 얼굴에서는, 막 자금성을 나서기 전까지 보이던 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 * *

조선은 발해渤海를 온전히 전유專有하고자 번거로운 일을 벌였다.

산동 끝자락인 청래도에서 요동 끝자락인 여문까지, 바다와 닿는 모든 해안을 장악한 것이다.

덕분에 발해를 온전히 전유한다는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대신 회랑의 형태로 얇고 길게 형성된 영토가 문제가 되었다.

공들여 다스리자니 행정적 군사적 비용이 너무 크고, 반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자니 혼란한 중원과 요동에서 몰려드는 유민과 범죄자들로 혼란의 소굴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제안된 것이 장벽이었다.

그러나 이 장벽이 금나라에는 위협적으로 여겨졌다.

이미 조선의 저력을 두려워하여 수도마저 옮긴 금나라다.

그런 금나라에 있어 방대한 영역에 걸쳐 세워지는 조선의 장벽이란 어디서도 공격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도 반격은 불가능해지는 일방적 관계의 토대였다.

과연, 이 장벽이 완성되고 난 뒤에 조선과의 상하上下 관계를 청산할 수 있을까?

무척 어려워질 것이다.

따지자면 금나라는 조선의 번견番犬으로서 행세하게 되었으나 단지 그뿐. 진심으로 충성하고 숭배하는 건 아니었는데 목줄이 걸릴 위기인 셈이었다.

금나라의 주인인 호격에게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조선 측에서 장벽 건설을 전담한 김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