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47화
“신들이 생각한 대책은 이렇사온데…….”
영의정 이상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전에서, 왕은 두 사람이 고안한 타개책을 경청했다. 그러나 비보와 함께 굳은 얼굴이 펴지는 일은 없었다.
“두 분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조선이 직접 피를 흘리지 않는 게 상책의 전제이나, 명나라의 손을 빌리는 것 역시 상책은 아니지요.”
이에 이상의와 남이공이 함께 고개 숙였다.
“전하…….”
다시금 입을 연 영의정이 엎드리면서 갖옷으로 바닥을 쓸었다.
“신들이 미욱하여 난관을 타개할 좋은 계책을 떠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왕은 단호하게 부정하고서 덧붙였다.
“나라고 뾰족한 상책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방법을 고민해 볼 터이니, 두 분께서도 차후 다른 생각이 든다면 알려주십시오.”
“예, 전하.”
“그리고 금나라가 또 하나의 잠재적인 적이 되었으니, 경들에게 알려야 할 바가 있습니다.”
“……?”
이상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답했다.
“하교해주시옵소서.”
왕은 입을 열어 세자와 함께 모의한 것을 털어놓았다.
한양에 침범하려 한 왜인은 단순히 길 잃은 오랑캐가 아니었으며, 배후에는 대마도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대마도주가 믿는 구석이 있으며, 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서 대마도를 혼란에 몰아넣기로 했다.
“이상적인 결과가 나온다면 아조는 대마도에 대한 영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롭게 등극한 대마도주는 조선에 많은 빚을 졌고, 가족마저 인질로 잡혀 있을 테니까.
과거 대마도주가 허울로 조선에 복속하여 관품을 받아갔을 때와는 구속력이 다르다.
“새롭게 등극한 대마도주가 배반하는 습성을 고치지 못하고 아조를 향해서도 이를 세울 가능성도 있겠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할 따름이다.
에도 막부의 안배는 대마도주에게 경쟁 상대를 남겨두어 겉도는 대마도의 구속력을 강화하는 것.
그런데, 그 경쟁 상대가 막부의 안배를 거슬러 원래의 대마도주를 쫓아내고 빈자리를 차지한다?
그랬다간 어그러지는 건 막부의 계획만이 아니었다.
‘야나가와 시게오키도 막부의 안배가 무엇인지 잘 알았을 테고, 막부에서도 시게오키가 저들의 본심을 깨달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테니…….’
막부에 걸었던 기대를 배신당한 시게오키다.
막부의 안배를 거슬러가며 새롭게 대마도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생존의 지속과 감정의 해소를 위해서라도 막부에 자신이 당한 것을 돌려주고자 할 터.
‘하물며 믿는 구석이 따로 생겼다면, 더더욱이 말이지…….’
이런 상황에서는 막부에서도 시게오키를 우호적으로 대해주기 어렵다.
당장은 우호적인 척을 해줄지 몰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치기 위한 구밀복검口蜜腹劍에 지나지 않을 터.
이는 야나가와 시게오키도 잘 알 터였다.
“막부를 배신한 시점에서 아조까지 배신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래도 만에 하나.
시게오키의 판단력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흐려 양국을 모두 저버린다면 그때는 신속하게 나설 필요가 있겠지만…….
가능성이 무척 낮은 만큼,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부분이다.
“그보다 더 분명한 문제는 꼭두각시를 대마도주로 만든다는 계획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변수는 많고 운명은 장난스러운 법.
“이상적인 결과가 아닌,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면 일본은 잠재적인 적에서 진짜 적으로 변모할지도 모르지요.”
이상의는 이러한 계책이 저도 모르는 사이 진행되고 있음에 놀랐다.
“어찌하여 이를 진즉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으셨사옵니까?”
“왜의 간자가 한양에 침범하려 들었다는 사실을 신하들이 안다면, 과연 조용하게 넘어가고자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옵니다.”
“조정의 신하들은 승승장구하는 아조의 성취에 크게 도취해 있지요. 안 그래도 왜에는 유감이 많은 상황이니, 주전론主戰論에 불이라도 붙는다면 무척 소란스러워질 것입니다.”
그 부분은 이상의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붙잡혔던 왜인이 간자였다는 말에 해묵은 원한이 다시 떠오르고 분노와 증오가 타올랐으니까.
“최대한 조용하게 진척하고 싶었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패관소설稗官小說처럼 적의를 다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계책을 동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단지 그 침묵에 영의정인 자신조차 이제야 예외가 되었다는 점이 조금 아쉬울 뿐.
그래도 왕이 마냥 비밀스럽기만 한 건 아니어서, 이 같은 잠재적인 위협이 있음을 금나라의 처분을 두고 먼저 알려주기는 했다.
이상의가 앓았다.
“남쪽 원해에서는 서반아가, 동편 열도에서는 왜구가, 서북면 뭍에서는 여진족이 각기 창궐하여서 기세를 부리니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도 지금 같은 혼란이 있을까 하옵니다.”
“천하에 중심이 될 대국大國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이지요. 달리 말하자면, 천하의 모두가 그 빈자리를 두고 달려나가는 중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아조가 반드시 그 대국의 자리를 차지해야겠습니다.”
이상의가 결의를 드러내자 왕이 미소로 긍정했다.
“나 또한, 영상의 의견에 이론은 없습니다. ……백관百官 중 혹자或者는 말하지요. 우리는 조선의 가장 성대한 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라고 말입니다”
“정녕 그러하옵니다.”
이상의의 긍정에 왕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이상의와 남이공에게 단호히 일렀다.
“우리는 가장 성대한 시대를 살아가는 중이 아닙니다. 가장 성대한 시대로 ‘나아가는’ 중이지요. 나는 아조가 지금보다 더 발전하고 부강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후계자부터 자질이 충만하고 경험을 많이 쌓지 않았는가.
준비된 후계자에게 준비된 환경을 마련했으니, 과연 후왕後王으로서 이미 완성된 세자가 나라를 물려받으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범이 날개마저 단 격이다.
옛말에는 범과 용이 비등하게 싸운다고 하여서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는 말이 있으나, 위호부익爲虎傅翼하면 능히 여느 범이나 용도 능가할 터.
유난히 가혹하고 야만스런 시대라 세파는 모질고 범과 용 같은 야심가도 즐비하지만, 세자라면 능히 극복하리라.
“그러려면 아조가 나아갈 장대한 미래에 장애 따위는 있어선 안 되겠지요.”
일본이나 금나라 같은 시건방진 오랑캐들 말이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이상의가 감명한 얼굴로 답했고,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일본에 대한 안배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계획이 크게 진전되지 않아 어떠한 결과나 나올지 불투명하다는 점.
자칫 물리적인 충돌로 번질 수도 있기에, 금나라를 섣부르게 물리적으로 계도하긴 어렵다.
그러나 차도살인을 하고자 해도, 무난한 명나라는 자칫 중원이 통일될 가능성이 있어 동원하기 힘들었다.
“상황이 안 좋긴 하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조선의 미래를 위해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너무 무모하지는 않게, 다만 치명적인 계획으로 말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진전이 없지는 않다.
두 의정도 당장 금나라만이 당면한 문제가 아님을 확인했으니까.
그럼에도 금나라를 꺾어야 할 이유를 깨달았으니까.
왕이 말했다.
“사방에 준동하는 오랑캐뿐인 것이 마냥 비보만은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상객해보면, 조선이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이국의 군주들이 들었다먼 무척 오만하게 여겼을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상의와 남이공 두 사람에게 왕은, 그만한 발언을 할 자격이 있었다.
* * *
금나라는 빈말로도 약소弱小하다 평하긴 힘들었다.
정녕 금나라가 빈약한 무리에 불과했다면, 감히 조선의 영향에서 탈피하고자 애쓰지도 않았으리라.
특히 최근에는, 인구가 많고 부유한 중원의 직예直?를 장악하면서 체급이 달라졌다.
아예 수도까지 직예의 중심인 북경으로 옮겨 버렸고 말이다.
‘금나라는 환골탈태換骨奪胎라도 노리는 것인가?’
요동은 조선과 맞닿아 그다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요동은 여진족의 본거지와 맞닿은 지역.
그나마 요동이 여진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할 수 있는 땅이었다면, 오랫동안 중원 문화의 중심지였던 직예는 성격이 달랐다.
‘인구와 부, 문화와 체급에서 모두 여진족이 밀리는데 아예 수도까지 북경으로 옮겨버렸으니…….’
조선과 분쟁을 겪지 않더라도 금나라의 미래는 무척 혼란스러울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래서 외부와 의도적으로 마찰을 일으키려는 것일까?’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일지라도 울타리 바깥에 적이 생기면 일시적으로라도 오월동주吳越同舟하는 법.
대차게 패전하고서 예속된 여진족이나, 중원을 침탈당한 중원인이나 조선에는 유감과 우려가 무척 많을 터다.
그러니 양자의 힘을 합쳐서 조선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금나라의 백성이라는 유대감을 증진할 목적이라면 오늘날의 만행도 완전히 이해 못 할 짓은 아니었다.
‘조선과 한 판 할 생각으로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종족 간의 갈등이 심해진 것인지, 혹은 종족 간의 갈등이 심해져서 조선과 한 판 해보겠다는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겠지만…….’
두 가지 모두 금나라의 본의本意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약점이라면 곧 그것이 금나라를 공략할 단서였다.
‘놈들이 분쟁을 원한다면, 절대로 응해주지 않는다. 놈들이 분열을 두려워한다면, 반드시 분열시켜야 한다.’
이것이 상책上策을 수립하기 위한 또 하나의 대원칙이 아닐까?
조선이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당장 조선이 처한 상황에 의한 전제라면 말이다.
‘조선에 적합하고 금나라에도 적합하다면 진정으로 상책上策이라 할 수 있겠지. 괜히 옛 병법에서부터 지피지기知彼知己하면 백전百戰해도 불태不殆라 한 게 아니다.’
마침 조건들이 적절하게 정합했다.
금나라가 붙여오는 시비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그 와중에 저들 내부에 분열을 심는 건 꼭 조선이 드러나게 손을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오히려 이런 공작이야말로 힘을 쓰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왕은 미안할 따름이었다.
실방사를 세자에게 맡긴 건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감시와 감찰은 어디서든 잘 먹히는 무기다. 그것이 세자의 손에 들어간 시점에서, 백관百官은 언행에 있어 왕 이전에 세자의 눈치부터 보게 된다.
그러나, 실방사의 역할과 존재 의의는 내부의 위정자들을 압박하는 에 아니었다.
물론, 내부의 불안요소를 파악하고 감시하는 건 분명 실방사가 가진 역할 중 하나다.
하지만 실방사가 그보다 먼저 파악하고 감시해야 할 불안요소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었다.
그리고 실방사는 이미 일대 각국에 점조직 형태로 퍼져서 감시와 공작을 펼치는 중이다.
최근에는 대마도주의 경쟁자인 야나가와 시게오키를 포섭하고 도주직 강탈을 지원한다는 굵직한 계획이 수립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보의 정점에는, 실방사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군림하고 관할하는 세자가 있었다.
‘이미 일이 많을 거란 말이지…….’
하지만, 그래도 맡길 수밖에 없다.
나라의 주인 된 사람이나, 장차 주인 될 사람은 바빠야만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안전하고 편해지기 때문이다.
‘금나라나 일본을 적기에 견제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전쟁뿐이다.’
기실, 자신이 바빠야만 한다는 걸 모르는 위정자는 없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싸구려 위정자들만이 즐비하게 있을 뿐.
세자는 후자에 속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