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49화
북경 어딘가.
깊숙이 음영이 드리운 곳에서, 한 새나가 암막暗幕을 들추며 입장했다.
“오늘자 동향 보고입니다.”
몇 개의 서류가 서안 위에 올라오자, 안쪽 상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곧장 보고서를 확인했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어째서 이놈들이 갑자기 무기와 갑옷을 구하는 거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놈들의 출신을 고려해보면 반란을 준비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금나라에 대항해서 말이지?”
“예.”
북경의 거리에는 신생인 큰손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대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쟁취해냈다.
그러니 후발주자로서 진입한 조선인 상인들에겐 뽑아내야 할 박힌 돌인 셈이다.
당연히 관계는 서로 좋지 않았다.
공공연한 분쟁은 물론이고, 비밀스러운 수법이 오가기도 했다.
국외에서 활동하는 상인과 상단의 수호자 겸 대표로 군림하는 조선유상에 있어서는 까다로운 경쟁자들이다.
“……몇몇 놈들은 조정에서 아조의 국익에 반하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고.”
조선유상은 그저 사무역 상인들만의 집단은 아니었다.
선도적으로 국제무역에 뛰어들어 해당 분야에서는 터주대감으로 군람하기도 하고, 원활한 거래와 안전 보장을 위해 현지 유지와 중앙 관료들과도 오가는 정情이 매우 두텁긴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입지와 관계의 본의는, 이국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조선의 잠재적인 위협을 포착하고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북경의 한간 관료들은 조선유상의 양면 모두에서 주목도 높은 감시 대상이었다.
그래서 조선유상은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었다.
“이미 거리에서 우리 상인들과 경쟁하느라 바쁜 놈들이, 반란 모의까지 한다고?”
적을 너무 많이 만드는 게 아닐까.
조선유상은 만만찮은 집단이 아니고, 그것을 한간 관료들에게도 톡톡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궤가 다르다.
일국一國 그 자체.
이들을 섣부르게 적으로 돌렸다간 존재 자체가 지워지게 된다.
그런데 한간 관료들은 이미 조선유상과도 척을 진 마당 아닌가?
접점 많은 조선유상이 저들의 이상 행보를 포착하고 고발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 줄 알고 간 크게 반란 모의까지 한단 말인가.
“아니라면 혹시, 우리 상인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려는 속셈일까요.”
“……흐음.”
조선유상의 이인자, 덕순이 쓰게 침음했다.
그는 조선에 충성하고 헌신한 결과로써 북경北京 조직을 총괄하게 됐다.
오갈 데 없어져 해안가에서 모래톱이나 긁적이던 시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의 출세다.
그러나, 지위가 높아질수록 요구되는 자질도 많아지고 책임져야 할 부분도 커졌다. 덕순은 이미 일신一身을 나라와 인군人君에 바쳤으므로, 출세와 그에 따른 보수보다는 몸으로 와닿는 고생을 더욱 크게 느꼈다.
‘쓸만한 놈이 있었으면 진즉 양보하고 은퇴하는 건데.’
아직 덕순의 마음에 차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맡은 천직天職과 막중한 의무에 비관하면서 다시 고뇌했다.
“대놓고 거리에서 칼싸움을 벌이겠다……? 흠, 놈들도 감투에 돈이 있으니 그 정도 모험은 각오해볼 수 있겠지.”
그러나 말 그대로, 모험이다.
만약 금나라의 주인과 그의 측근들이 수도에서의 공공연한 칼싸움을 용인해주지 않는다면 그들도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자칫하면 다 죽자는 꼴이 될 텐데.”
“놈들이 가진 원한은 어마 무시합니다.”
“……그렇긴 하지?”
덕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간 관료들은 그동안 북경의 식량과 물자를 통제하며 폭리를 취해왔다.
그러던 참에 경쟁자로서 굴러들어왔으니까.
“그런 것 치고도 꽤 격렬하게 싫어하고.”
“예. 마치 저들 부모의 묘소라도 파헤친 양 싫어하지요. 미친놈들 수준입니다.”
오죽하면 아랫것들을 시켜 상인을 습격하고, 물건을 강탈해 파괴하거나 불사질러버릴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조선유상이 반사적인 이익을 얻을 정도였다.
현지 큰손들이 미친 호전성을 보여주니, 각기 소속 다른 조선인 상인들이라도 조선유상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유상은 그나마 조선 출신 상인이라는 포괄적인 울타리와 함께, 현지 유력자 및 관리들과의 두터운 정과 인연을 이용해 상인들을 보호해 주었으니까.
이마저도 없었다면 조선인 상인들은 여럿 시시때때로 칼 맞고 쓰러졌으리라.
덕순은 평했다.
“……이해는 하지.”
“예?”
“놈들은 주인과 나라에 버려졌으니까.”
황제는 부패하고 타락한 신하들은 모두 북경에 버려둔 채 은밀하게 탈출했다.
그리고 남경에 새롭게 터를 잡고는, 조선의 권고와 중재를 받아들여 장강 이북의 영역을 포기했다.
한간 관료들은 모두 끈 떨어진 연 신세였다.
“그 뒤에는 북경이 순나라에 점거되어 학살극이 벌어졌고.”
많은 사람이 성난 폭도들에 의해 공공연히 죽고 희생되었다.
그리고 반란의 원인이 되었던 무능하고 타락한 위정자들은, 당연히 폭도들의 일 순위 표적이 되어 짐승처럼 사냥당해야 했다.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해낸 한간 관료들은 그런 위협에서 가까스로, 그리고 필사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이다.
“당연히 독기와 광기가 뼛속까지 찌들어 있을 수밖에 없지. 제정신이 아닌 것들이야. 지켜야 하는 건 오직 축재蓄財만이 남았고.”
그러니 조선인 상인들이란 한간 관료들이 유일하게 지키고 집착하는 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미친놈들처럼 덤벼들 수밖에.”
긍정하지는 못해도 이해는 가는 작태다.
덕순 본인이라도, 그들처럼 조국과 주인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동료들이 개처럼 사냥당하는 가운데 가까스로 살아남는다면.
미쳐버린 채 장사꾼이라는 정체성만 남아 독종처럼 돈을 좇을지 몰랐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북경의 한간 관료들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자들이다.
“악착같은 독기만이 남아 부를 쫓는 미치광이들. 그리고 주변에는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정체성을 위협하는 경쟁자들과 이질적이고 혐오스러운 야만인 지배자들뿐이지.”
“놈들 눈에는 세상이 그렇게 보이겠군요.”
덕순이 끄덕이자 조선유상 간부가 덧붙였다.
“놈들이 무구를 모아서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큰 사고를 칠 작정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정확히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건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
“일단, 무구를 모아서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폭력과 살상뿐이지.”
“그러면 그 폭력과 살상이 어디로 향할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지.”
표적은 금나라인가, 아니면 조선인 상인들인가.
“……어쩌면 모두가 표적일 수도 있겠고. 미친놈들이니까.”
덕순은 문득 이 고뇌도 말미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아니! 정말로 우리와 금나라 모두가 표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건 너무 무모하지 않습니까?”
“우리와 금나라. 어느 한쪽만 정리한다면 다른 한쪽에 의해서 똑같이 정리당할 수밖에 없어.”
금나라가 저들의 수도 한복판에서 무장 습격을 벌여대는 한간 관료들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물며 조선은 금나라에도 무척 민감한 외교 대상이다.
그런데 그런 국가의 민간인들이 저들 수도에서 집단적으로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면피를 위해서건, 명분의 우위를 주지 않기 위해서건 금나라는 필사적으로 주범을 적발하고 숙청할 수밖에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금나라의 국체國體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한, 이들을 적으로 돌린 한간 관료들은 명백하게 금나라의 척살 대상이 된다.
경쟁자인 조선인 상인들에게 있어서는, 금나라와 결탁해 경쟁자 큰손들을 몰아내기에 아주 좋은 명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간 관료들이 두 강대한 적을 모두 몰아낼 방법은 제한적이야.”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을 전제한다면, 복잡하고 정교한 계획을 장기간에 걸쳐 진전과 수정을 반복해야 하리라.
혹은 쉽고 빠른 길을 선택하던가.
“미친놈들이니. 후폭풍은 도외시하고 두 집단을 동시에 공격한다던가…….”
덕순은 심증이 이미 굳었으나 최악의 가능성도 고려해보기로 했다.
“혹시, 금나라 조정에서도 한간 관료들이 무구를 입수하는 걸 인지하고 있을까?”
“……설마요. 그랬다면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을 겁니다.”
“수도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배제할 의도로 한간 관료들과 공모하여, 차도살인을 시도할 수도 있지 않겠나?”
“금나라는 아조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만 굳이 그런 애매한 수법을 쓸까요.”
조선과 척을 지겠다면 더 확실하고 강력한 방법이 있다.
당장 군사를 몰아 장벽이 세워지는 발해만 국경지대를 공격한다면, 조선의 중원 개척지들은 허무하게 함락되리라.
그런 확실한 수법을 두고 상인들이나 학살한다는 이상한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아조를 적대하지 않겠다면, 우리 조직과 상인들은 내버려두는 게 금나라에도 이롭습니다.”
“어째서지?”
이유야 덕순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검증차 간부에게 물어보았다.
“우리의 존재가 북경 및 직예 일대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도움 되기 때문입니다. 금나라 관리들은 치국에 정교하지 못해서, 한간 관료들의 비열하고 음험한 행보들을 단속하지 못했지요.”
한간 관료들은 식량과 물자를 매점買占하고 판매량을 통제해 의도적으로 시세를 폭등시켰다.
이런 행위가 공공연하게, 그리고 대규모로 벌어지는 건 나라가 망국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이를 단속하지 않았다.
출신이 오랑캐라는 게 문제였을까.
금나라 권력자 중에는 멍청하고 시야 짧은 놈들이 많아서, 다들 당장 가른 거위의 배에서 나온 알로 만족했다.
‘거위들을 잘 가꿔, 농장을 차려 대대로 배를 불리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지.’
대신, 거위들을 뚝딱 해치워버린 다음 당장 배는 부르다고 만족할 따름이다.
‘타락한 한간 관료들이 고기는 다 가져가고 알만 나눠주는 꼴인데도 말이지…….’
이러한 참에 등장한 조선인 장사치들은 북경과 직예 일대 중원인들에게는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빈 호주머니에 먹을 건 없어, 사람 고기나 씹던 신세를 다시 사람 같이 살 수는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멍청하고 식견 짧은 금나라도 아무튼 만족했다.
어쨌거나 물가가 안정되고 민간의 불안도 잦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조와 척을 질 각오가 아니고서야, 우리에게 해를 끼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신이 똑바로 박혔다면 척을 지더라도 우리는 못 건드리지.”
“그게 상식이고 정상이지요.”
조선유상이 첩보 조직이라는 건 금나라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럼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너무 크다.
금나라 딴에는 옆집 사람이 자기 집의 젓가락 개수를 알아가는 대신, 쌀독을 채워주고 가는 셈이었으니 오히려 제발 자주 찾아오시라 빌어야 할 정도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유상이 뻔뻔하게 조선인 상인을 대표하며 이들을 거느리는 이유이기도 했고.
다들 각자의 이익을 위해 공존하는 셈이다.
상인들은 안전을, 조선유상은 정보를, 금나라는 안정을 챙기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였으니 금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을 치더라도 조선유상과 상인들은 후순위로 둘 수밖에 없다.
전쟁 중 기밀이 유출될 것을 걱정한다면, 고작 기밀 유출로 패전할 전쟁은 먼저 일으키지 않는 게 정상에 상식이고.
덕순이 종합했다.
“그러니 금나라가 아조를 적대할 목적으로, 한간 관료들이 무구 모으는 것에 협력하거나 방관할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지?”
“명백합니다. 애초에 그걸 용납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은 한간漢奸이기 때문입니다.”
한때의 원수들이 무기 모으는 것에 협력하거나 방관을 한다?
자멸을 자초하는 행위다.
덕순이 긍정했다.
“그렇다면 한간들은 우리와 금나라, 모두를 적대할 요량으로 비밀스럽게 무구를 모으는 중이고 여기에 금나라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군.”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이제야 큰 그림이 그려지는군. 아직, 세부적인 사항은 전부 알지 못하지만 말이야.”
이에 조선유상 간부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이 정도 상황이 파악된 것만으로 대응은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이때였다.
또 한 사람이 덕순과 간부가 자리한 내밀한 공간을 찾아왔다.
“계셨습니까.”
그 역시 조선유상의 간부였다. 그러나 역할은 조금 달랐는데, 북경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실방사와 연결되는 쪽이었다.
그는 서찰 한 통을 건네며 전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음.”
덕순이 서찰을 받자 연락책인 간부는 예를 올리고서 곧장 물러났다.
두 사람만이 남은 자리에서, 덕순은 상부에서 보냈다는 서찰을 뜯어 확인했다.
“……무슨 내용입니까?”
덕순은 서찰을 내려놓고서 답했다.
“우리가 하려는 일에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겠어.”
“예?”
“높으신 분께서 금나라에 조처를 바라신다는군.”
그 대답만으론 이해하지 못했던 조선유상의 간부가 시선을 내렸다.
서찰에서, 덕순과 조선유상의 주인은 금나라가 내분에 빠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정확히 그것이, 덕순과 조선유상이 금나라에 행하려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