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350화 (350/380)

인조, 명군이 되다 350화

북경의 한 장원.

한때 명나라의 태감 중 하나가 기거했던 이곳은, 당시에도 작은 궁궐로 여겨졌을 만큼 크고 화려했다.

옛말에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던가.

웅장했던 장원도 북경과 함께 두 차례나 거듭 약탈을 당하며 쇠락했지만, 일부 전각만은 살아남아 방대한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신기오로 일족의 일원인 라이무부賴慕布는 오히려 이런 개방감이 좋았다.

북경이란 얼마나 비좁고 복잡한 장소인지.

금나라의 전사들은 중원인 축생畜生들을 셀 수 없이 도살하고 쫓아냈지만, 그럼에도 라이무부는 도저히 북경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장대한 숲과 초원 한가운데서 태어나 무한정한 하늘 아래를 질주하며 살아온 그다.

그런 그에게 북경이란…….

의식하는 것조차 몸서리쳐질 만큼 갑갑하고 짜증 나는 구속이었다.

그러나 한은 막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참.

다시 돌아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마 자신은 북경에서 눈을 감게 되리라. 그렇다면 적어도, 이렇게 전경이나마 넓게 펼쳐진 곳이 차라리 최선이었다.

“다시 초원과 평야를 내달리다가 죽는 게 소원이다마는…….”

현 한이 들어줄 리 없는 부탁이었다.

라이무부는 아이신기오로 일족.

배분은 선한인 홍태주와 같다.

일신의 무용은 지금도 만만치 않고, 호위대 대장을 지내면서 군부의 유능한 전사 여럿과도 인연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가 흔히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유능하고 지도력 있는 숙부가 추종자들에 힘입어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는 것이다.

이는 현 한도 잘 알고 있었다.

항렬 낮은 한이 새롭게 즉위하면서, 자칫 위협이 될 수 있는 숙부는 정계와 군부에서 완전히 은퇴 당했다.

현재의 처우는 비공식적인 연금.

금나라의 영토 장악력은 무척이나 헐거웠으므로, 유력자가 수도만 아니라면 남몰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다시 바깥으로 보내주는 일은 없겠지. 제기랄.”

때마침 라이무부는 호위대 대장임에도 선한을 수호하지 못한 채, 자신만 뻔뻔하게 살아남은 죄과가 있었다.

그가 숙청을 당하기엔 더없이 적절한 명분이다.

잡읍은 없었다.

모두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여겼으니까.

라이무부 본인조차도 말이다.

라이무부는 애석한 얼굴로 이제는 조금 지겨워지기는 한, 장원의 전경을 마주했다.

그리고 소회를 드러냈다.

“날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하늘에 닿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닿을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내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꿈 같은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까지 오래전은 아니건만.’

이곳에서 라이무부는 고작 몇 년 만에 푸석하게 늙어버렸다.

어떤 사람은 안온한 대장원 한복판보다, 딱딱한 안장 위에서 풍파를 맞을 때 더 살아 있을 수 있는 법.

라이무부는 명백하게 후자에 속했다.

그러나 오늘도 여지없이 대장원 한가운데서 썩어가는 중이었다.

“어전額眞.”

장원의 하인 중 하나가 라이무부를 존칭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냐?”

마루에 덩그러니 앉아 뜰만 구경하던 라이무부가 고개를 들었다.

“방문객이 있습니다.”

“방문객?”

“예.”

라이무부는 관심이 동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고서 답했다.

“오늘 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그러했습니다.”

“…….”

“조선인입니다.”

하인이 덧붙인 말에 라이무부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조선인?”

“예. 자신을 상인으로 소개했는데 꼭 어전을 뵈어야 할 중한 사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인의 전언에 라이무부가 코웃음쳤다.

“네놈이 연락조차 없이 무턱대고 찾아온 불청객의 사연을 내게 알려주는 걸 보니, 불청객이 상인이라는 건 잘 알겠다.”

주머니 제법 두둑하게 채워주지 않았을까.

하인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흥.”

라이무부는 코웃음을 치고는 답했다.

“들여보내라. 놈들이 무슨 사연이 있어 나를 성가시게 구는 건지 알아야겠다.”

일개 하인마저 매수해가며 방문을 청할 정도라면, 시답잖은 이유로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

“알겠습니다.”

하인은 보수라도 약속을 받았는지 밝은 얼굴로 답했고, 그게 훤히 보였던 라이무부는 안색을 굳히고서 질책했다.

“꺼져라.”

“예!”

하인이 허둥지둥 뜰을 빠져나갔다.

주인에게 한 소리 들어 도망치는 게 아닌, 아무래도 성공 보수를 맞이하러 신난 모습이었다.

“같잖은 한족 찌끄레기들 같으니…….”

잠시 후. 같잖은 한족 찌끄레기가 불청객을 데려왔다.

“어전.”

라이무부는 못난 하인을 손짓해서 쫓아냈다. 저 쥐새끼 같은 것을 주변에 두었다간 무슨 소리를 듣고 떠들어댈지 알 수 없었으니까.

찌끄레기 겸 쥐새끼를 쫓아낸 라이무부가 응대했다. 여전히 마루에 걸터앉은 채였다.

“무슨 일이지? 하찮은 일로 돈을 녹이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기를 바라겠다.”

라이무부가 하인이 사라진 방향을 흘겨보았다가 다시 쳐다보자, 조선인이 두 손을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무척이나 중대한 일입니다.”

“말해 봐라.”

“저기, 그 전에.”

“음?”

“……가까이 다가가서 아뢸 수 있겠습니까?”

라이무부의 눈이 무척 가늘어졌다.

“그만큼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만약 제가 가치 없는 상언을 드렸다면, 목을 베어도 좋습니다.”

조선인이 답지 않게 필사적으로 나오자 라이무부의 미간이 좁혀졌다.

놈의 소속을 생각해 보면, 놈이 기껏 다가와서는 오늘 아침에 제가 무엇을 처먹었는지나 지껄인들 대놓고 목을 베어버리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래. 좋다. 와서 말해보라.”

허락이 떨어지자 조선인 상인은 안도한 얼굴로 라이무부에게 나아갔다.

라이무부는 자신에게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인상을 찌푸렸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소리를 지껄이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조선인이 말했다.

“한간들이 비밀스럽게 무구를 사들이고 있습니다.”

라이무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자신에게 속삭이던 조선인을 마주 보았다.

“……그게 정말이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선인의 접근을 의심하던 라이무부였으나, 어느새 그 역시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알지 못하셨습니까?”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는 네놈은, 내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알려주는 것이냐?”

“어전이시라면, 어쩌면 놈들의 행보를 주시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습니다.”

라이무부가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자신이 왜 한간 찌꺼기들을 감시하고 있겠느냐고.

“여전히 저들끼리만 회합을 가지면서 비밀스러운 모의를 이어가지 않습니까?”

“…….”

라이무부는 곧장 열려던 입을 꾹 닫았다.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놀라워하며 알지 못했다는 티를 낸다면 눈앞의 조선인에게 금나라 전체가 업신여겨지게 될 터.

라이무부는 정색하고서 말했다.

“그 쥐새끼 같은 것들이 소굴에 모여 찍찍거린다고 내가 관심까지 주어야겠느냐?”

그러한 허장성세가 먹혀든 것인지, 조선인 상인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물론 그만한 가치는 없는 놈들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모의만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무기를 모으고 있으니까.

“그것을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

“상인이기 때문입니다. 매일같이 상품과 물자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무엇이 비싸지고 귀해질지 고민하니, 특정한 물목에 큰 변화가 생긴다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흠.”

라이무부는 그럴싸하게 여기면서도, 신뢰하지는 않았다.

“이걸 내게 알려주는 이유는 뭐냐?”

“북경이 다시 혼란에 빠진다면 저 같은 장사꾼들이 어떻게 먹고살겠습니까.”

“본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치고는 너무 큰 사안에 끼어드는데.”

라이무부가 차갑게 지적하자 조선인 상인이 난색으로 머뭇대다가 답했다.

“제가 역적 행위를 고발하면, 대금大金에서 처우가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흐음.”

라이무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다시금 물었다.

“하필 나를 찾아온 이유는?”

“어전께서 한의 호위대를 이끄는 대장이라고 들었습니다.”

“……한때는 그랬지.”

라이무부의 감정 섞인 대답에, 조선인 상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라이무부는 생각했다.

저치가 정녕 순진한 상인 따위가 아니라, 조선유상의 간자라면 정말로 연기력이 대단한 놈이라고 말이다.

“네놈은 내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주는군…….”

이른 나이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을 당해 장원에 유폐된 신세였다.

그 명분은 호위대 대장임에도 한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달리 말하면, 이 죄를 청산할 경우 처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마냥 그대로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명목적인 이유는 단지 명목에서 그칠 뿐.

상황이 이런 데는 한이 라이무부를 견제하겠다는 본의 때문이므로, 내란을 막음으로써 한에게 충분한 호감을 사지 못한다면 상황은 반전되지 못한다.

어쩌면 제 뜻대로 처신하지 않았다는 괘씸죄를 물어 사정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두려워한다면 대사大事는 어떻게 치르고 대업大業은 어떻게 이룩한단 말이냐?’

라이무부는 자신이 대금과 한의 충신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설사 처우가 더 나빠지더라도, 한간 찌끄레기들의 반란 모의는 반드시 차단되고 또 처단되어야만 했다.

결의한 라이무부가 말했다.

“선한께서는 조선을 제압하는 데 실패한 뒤로, 조선에 거의 끌려다니게 되었지. 신하로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었다. 하지만, 직접 상대해보니 네놈들은 정녕 독사의 혀를 가졌군.”

“저는…….”

조선인 상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라이무부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됐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라이무부는 자신의 두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가 일순 높아지며 장원의 뜰이 더 넓게 보였다. 담장 너머까지도.

라이무부는 벌써 세상을 내달리는 듯했다.

“물러나라. 네놈이 원하는 건 나중에 챙겨줄 터이니.”

“예.”

조선인 상인이 대답과 함께 채 물러나기도 전에, 라이무부가 먼저 상인을 밀치고서 뜰을 가로질렀다.

들뜬 마음에 좀이 쑤셔서 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 *

“어전…….”

“비켜라!”

자금성에서.

라이무부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옛 부하를 밀쳐냈다.

그러자 옛 부하는 다시 몸을 들이밀어, 과거의 상관을 저지했다.

이곳은 한이 기거하는 처소.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소란이 번지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곧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현 금나라의 주인, 호격이 등장했다.

“폐하!”

그의 등장을 확인한 한 호위병이 급히 예를 올렸고, 이에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도 서둘러 몸을 돌리고서 예를 갖췄다.

호격은 처소 앞뜰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숙부가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호격은 존칭 대신, 보다 친근한 용어를 썼다.

만약 라이무부가 호격과 가까운 사이였다면 그러한 호명에도 문제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지금과 같은 껄끄러운 관계에서는, 오직 호격이 라이무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만 증명할 따름이었다.

라이무부도 느낄 수 있는 박대.

그러나 라이무부는 개의치 않고 보고했다.

“첩보諜報를 입수했습니다. 한간漢奸들이 비밀스럽게 회합을 가지면서 무구를 수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호위병들의 안색이 일제히 굳었다.

호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호격이 안색을 굳힌 건 비단 고변告變이 들어와서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라이무부는 무척이나 껄끄러운 친척.

그 일신의 무용과 지도력을 겸비했고, 증명해온 성과도 많다. 선한과 항렬은 같은데 나이는 그리 많지도 않았다.

찬탈자로는 거의 이상형에 가까운 숙부다.

그래서 호격은 먼저 의심부터 들 수밖에 없었다.

‘고변을 통해 군권을 되찾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건가?’

애석한 의심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변이 들어왔는데 무작정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한간들이라면…….’

정말로 난을 일으킬 수 있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다 망해버린 나라에, 그들이 그렇게도 존숭하는 절의 조차 지키지 못하고서 오랑캐라 멸시하는 저들에게 개처럼 출세를 구걸해놓고도 뒤에서는 불평불만만 많은 족속들.

배신까지 모의한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 수색부터 하자. 실제로 무구를 모아놓았다면 적발될 것이고, 아니라면 허위 고변한 책임을 물어 숙부를 유폐하면 될 것이니…….’

계산을 끝낸 호격이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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