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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53화 (353/380)

인조, 명군이 되다 353화

야나가와 시게오키.

일단은, 대마도주 소 요시나리의 가신이었다.

그러나 몇 해 전 시게오키는 주인의 배반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국서國書를 위조해 일본과 조선 양국의 외교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시게오키는 이 일로 자신이 대마도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대마도주 이전에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했고, 어렸을 때는 2대 쇼군을 모셨으니까.

막부가 기만적인 소씨 가문을 숙청하고 자신을 대신 그들의 자리에 올려놓으리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게오키의 기대는 완전히 무시당했고, 또 배반당했다.

고발이 있은지 수 년이 지났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이라곤 시게오키가 직속 주인을 배신했다는 소식뿐.

소씨 집안은 여전히 대마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반대로, 시게오키는 고발 이후 수 년째 대마도를 밟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가신이라 할지언정, 배반한 이상 소씨 집안의 소굴로 들어갔다간 암살이건 독살이건 당할 게 분명했으니까.

에도에서 가문이 대대로 축적해 온 자산을 야금야금 깎아먹으며, 막부에서 변덕을 부려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한참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는 일말의 기대감조차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

시게오키는 벽을 등진 채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불을 잔뜩 밝혀놓은 채였다.

이 모든 게, 혹여 방문할지 모를 소씨 집안의 암살자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등을 비워두어서는 안 됐고 대들보 위라도 밝혀두어야 했다.

그야말로 가시방석 위와 같은 삶.

타개를 바라는 심정만은 절박했으나, 더는 취할 수 있는 행동도 없었다.

시게오키는 수 년째 펴지지 못한 인상 그대로, 팔걸이에 올려둔 손끝으로 이마를 긁었다.

‘오늘도 낭보 없이 이렇게 흘러가는가.’

지독한 하루였다.

새벽처럼 일어나, 하늘이 밝아져 오는 걸 보지만 자신의 삶이 밝아지는 건 보지 못한 채 다시 밤을 맞는다.

여전히 낭보는 없고 희망은 하루하루 죽어가다 못해 고사해 버린 지금, 마치 다 식어버린 잿가루를 달리 방편이 없어 파헤치고 또 파헤치는 심정이다.

무상한 세월에도 지옥 같은 일생에는 반전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고통이었다.

‘차라리 암살자에게 등이나 목을 내어주는 게 나을까?’

시게오키는 하루에 몇 번이고도 불쑥불쑥 충동이 들었다.

헐벗은 채로 대마도를 다시 찾아가, 자신이 배반한 주인의 후계자에게 엎드린 채로 목숨의 연명만을 구차하게 구걸하는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검 한 자루 들고 찾아가 최후의 난동이라도 부릴까.’

어느 쪽이건 그다지 희망은 없으니, 장렬하게라도 죽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민도, 실은 세월과 함께 부유해온 지만 수 년째.

시게오키는 차마 결심하지 못했다.

이따금 자신의 처지가 견딜 수 없어질 때도 있었지만, 에도에서 대마도까지 가는 길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멀었다.

아무리 단단히 각오를 갖추고서 집을 나서더라도, 며칠 지나지 않아서는 사그라들어 터덜터덜 에도의 처소로 다시 돌아오고 말 따름이었다.

“…….”

시게오키는 현기증을 느꼈다.

오늘도 하루를 공허하게 떠나보낸다는 사실에, 좀처럼 눈을 감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기력한 몸뚱이는 주인의 썩어가는 심정과는 달리 솔직하여서, 눈썹은 천근으로 만근으로 무거워졌다.

“제기랄.”

시게오키는 힘없이 욕지거리를 흘리고는 팔걸이를 밀어냈다.

그리고 초췌해진 몸뚱이를 웅크리려던 참이었다.

“나리.”

익숙한 하인의 부름에 시게오키가 말했다.

“무슨 일이냐. 이 오밤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시게오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딱히 찾아오겠다는 사람도 없었건만.

“설마, 막부에서 온 손님이냐?”

“……아닙니다.”

기대에는 질리도록 배신당하였으나 그로 인한 불쾌함만은 언제나 신선했다.

시게오키는 거칠게 콧김을 쏟아내곤 말했다.

“그렇다면 달리 누가 나를 찾아온단 말이냐?”

직속 상관을 고발한 시게오키는 에도의 유명인사이면서도 동시에 기피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막부의 일에 사사롭게 간섭하여 좋을 건 없는 법.

하물며 오늘날에는 막부가 시게오키를 저버렸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유력자들 사이에서 시게오키의 존재는 유령만도 못했다.

얼굴이야 알지 못하는 이가 부지기수지만, 이름만은 유명해 자리에서 거론이라도 된다면 사람들을 설설 피하게 만들었으니까.

시게오키가 고립된 신세에도 방문자의 소식을 반기지 못하는 원인이었다.

혹, 누가 찾아오더라도 좋은 이유에서는 아닐 것이므로.

하인이 대답했다.

“상인이라고 합니다.”

“……상인?”

“예.”

“…….”

시게오키는 침묵 끝에 실소했다.

“천하의 내가 상인町人들의 방문이나 받는 신세가 되었구나.”

정인町人은 도회지에서 상인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을 의미했다.

신분적으로는 농민보다도 떨어지는 존재들.

시게오키는 자신이 귀족은 못 되어도 무가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은 있었다.

그런데 하찮은 상인의 방문을, 그마저도 한밤중에 예고도 없이 받게 되었으니 천대도 이런 천대가 없었다.

대마도에서 가신으로서 지내던 시절 같았으면 무례를 물어 베어버렸겠으나…….

현재 시게오키의 신세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는 허탈해하며 일렀다.

“알았다. 어디 한 번, 낯짝이나 보자.”

불청객은 이미 살려두기 어려운 죄를 저질렀지만, 시게오키의 현실 또한 녹록지 않았다.

적절한 방문 사유가 있다면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답잖은 이유로 무사를 모욕한 것이라면 용서할 수 없었다. 고작 얼굴이나 보자는 식이었다면, 간만에 칼을 휘두르게 되리라.

하인이 물러나고 잠시 후, 불청객이 방문했다.

“나리.”

“…….”

시게오키가 마주한 상인은, 키가 크고 체격이 다부져서 힘을 제법 쓸 듯했다.

시게오키는 솔직하게 평가했다.

“장사치가 아니라 칼잡이라고 해도 믿겠군. 전장에서 공을 세우기로 했다면 하급 무사 정도는 수월하게 올랐겠어.”

그러자 상인이 태평하게 웃었다.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지요. 무훈을 세워서는 출세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시게오키가 통감하며 긍정했다.

그가 직속 상관을 고발한 것도, 달리 출세할 수단이 없어서였으니까.

난세였다면 출세는 오직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최대한 화려한 투구와 갑주를 걸친 채로, 누구보다 앞장서 싸우며 최초로 성벽을 넘거나 수급을 거두고 유명인을 처단함으로써 용맹을 증명하면 주인에게서 토지나 하사품, 또는 감사장을 받는 식이다.

여기서 감사장感?이란 고용주가 전공에 대한 증명으로 내려주는 문서다.

이것이 있는 무사는 실력과 신용이 있다는 뜻이었기에, 혹 주인이 몰락하여 세력을 이전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전국시대의 무사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세력기반을 쌓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미 세력을 확보하고 위력을 과시하는 실력자들이야 부지기수였지만, 전국시대에서는 무수한 세력이 망하고 흥했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몰락한 세력이 있고, 밑바닥에서 시작해 모든 것을 가진 자도 있었다.

그러한 난세에서 무인은 오직 살아남으며 성장할 따름이다.

혹여 고래가 터진다면 쏟아지는 부산물을 눈치껏 잘 챙기고, 과욕은 자중하여 적을 줄이며, 일대 세력과 친목을 다져 배후를 안정시키고 대영주에게 소속이라도 된다면 전쟁에서 잘 치고 빠지면서 적절하다면 배신도 도모해보는 식이다.

전국시대를 풍미는 세 명의 천하인도 그렇게 탄생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두 원래는 변변찮던 인물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어려서부터 성을 물려받았으나, 가문이 분열되어 언제 친척에게 죽을지 모르는 신세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런 오다 노부나가에게 일개 하인을 자처했던 무명無名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친척의 배신으로 어려서부터 오다 노부나가의 인질로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따지자면 세 명이 모두 한 식구였던 시절이 있었던 셈이다.

끝내는 서로 배신하여 천하인의 자리를 강탈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난세란 그러했다.

출세는 오롯이 본인에게 달려 있었고 시작하는 위치의 높고 낮음은 있을지언정 야망과 능력, 그리고 운수만 출중하다면 천장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마지막 천하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열도를 통일하면서 난세를 종식했다.

그리고 질서를 강화하고 고착화하여, 이제는 본인 한 사람이 잘나서는 출세할 수 없는 세상이 도래하고야 말았다.

무의 시대의 종말이었다.

시게오키가 애석한 얼굴을 지우고는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너에게도 야망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보군.”

상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시게오키가 덧붙였다.

“네가 고작 내 얼굴이나 보자고 찾아온 게 아님은 알겠다.”

“그렇습니다.”

“속셈이 무엇이냐?”

“나리를 대마도의 주인으로 만들까 합니다.”

“…….”

시게오키가 일순 움찔거렸다.

그 찰나에 시게오키는 무수한 생각이 떠올랐다가 마구잡이로 뒤엉켜서는, 정신없는 지경이 되어 상념이 혼란 속에서 흩어져 버렸다.

시게오키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말아쥔 채로 일렀다.

“네놈이 어떻게 나를 대마도의 주인으로 만들겠다는 거냐.”

막부부터가 자신을 대마도의 주인으로 만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대마도의 주인이 되는 건 막부의 뜻을 거스르는 셈이다.

“네게 막부를 좌지우지할 힘이라도 있다는 뜻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시게오키가 의심과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묻자, 상인은 되려 능청맞은 미소로 답했다.

“나리는 막부가 이미 나리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막부의 눈치를 보십니까?”

“멍청한 놈! 열도의 주인이 바로 막부인데,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어떻게 대마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냐?”

“대마도는 열도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열도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신흥하는 나라가 있지요.”

“…….”

시게오키는 손으로 입을 쓸어내렸다.

“조선.”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조선과 열도 못지않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나리께서는 조부가 그들 나라의 관직을 지냈지요.”

“……사실이다.”

“나리께서 대마도의 주인이 되는데 꼭 나리의 편도 아닌 막부의 허락이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나리께서는 평생 대마도의 주인이 될 수 없을 텐데요.”

그러니 조선을 새로운 뒷배로 삼을 각오를 하고서 대마도를 탈취하자는 소리였다.

“…….”

시게오키는 상인의 발언이 무척 오만하여 일순 베어버리고픈 생각도 들었지만, 그에게 대안이 없다는 지적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더욱이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 주신을 갈아타는 건…….

종씨 가문을 배반한 시게오키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뿐더러, 그가 그리워하는 난세의 방식이기도 했다.

상인이 못을 박았다.

“배신한 건 막부가 먼저 아닙니까?”

시게오키가 답했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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