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354화 (354/380)

인조, 명군이 되다 354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단신으로 쳐들어가 난동이라도 피우는 것도.”

시게오키가 시인했다.

가족 앞에서도 꺼낼 적 없었던 진솔한 마음.

그것에 불청객 아닌 불청객 상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리께서는 대마도주가 되거나, 아니면 단신으로 난동 피우는 것 이상의 깽판을 치시게 될 겁니다.”

전자는 성공했을 경우.

후자는 실패했을 경우를 의미했다.

시게오키가 웃었다.

“기왕이라면 대마도주가 되는 게 좋겠군.”

“제가 보장해드릴 수 있는 건, 나리께서 절대 조용하게 고사하지는 않으리라는 겁니다.”

“바라던 바다.”

시게오키는 수상한 상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곤 물었다.

“조선을 뒷배로 삼을 수 있다는 보장은 있나?”

“조선은 경쟁하던 금나라는 물론, 명나라마저 몰아내고 중원에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최근에는 포르모사라는 섬에서 스페인마저 축출해 냈지요.”

“소문은 들었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그런 조선이 가장 의식하고 있는 세력이 어디겠습니까.”

“……일본인가.”

십수년 전 왕래가 끊긴 뒤로, 일본과 조선은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에도 막부는 내부의 질서를 더더욱 강화하고 싶었다. 난세에 적응하지 못한 자들과 착취로 인해 응축된 불만이 점차 수면으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이것이 폭발한다면, 어쩌면 에도 막부의 시대도 끝나고 일본은 새로운 난세로 돌입할지도 몰랐다.

도쿠가와 가문으로서는 허용할 수 없는 흐름이다.

내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조선 역시 나름대로 바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간간이 전해지는 그들의 성과를 보면 말이다.

이러한 와중에 불편한 역사가 있는 배후의 일본과 접촉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조선은 각처를 정복하면서 새로운 패자로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지요.”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었다.

이제는 서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이용하면 쉽게 조선을 뒷배 삼을 수 있다는 뜻이군.”

“마침 나리께서는 조선국 신하의 혈통도 지니고 있으시니 말입니다. 분명 가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여겨준다면 좋겠군. 조선말은 한마디도 할 줄 모르지만 말이야.”

“지금부터 배워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릅니다.”

“흐음…….”

시게오키는 일순 혹했다. 아예 소속을 조선으로 갈아치워 버리는 것이 괜찮을지도.

때마침 에도에는 지난 전쟁으로 붙잡혀온 조선인들이 많았다.

그들 중 한둘을 구해 조선어를 배워둔다면, 장차 대마도주가 되어 조선을 뒷배 삼을 때 크게 점수를 딸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전에 대마도주가 되는 것이 먼저다. 계획은 있나?”

“물론입니다. 대마도에는 아직 나리를 따르는 사람이 꽤 있지요?”

“제법.”

시게오키는 단호하게 답했다가, 이내 궁색해진 얼굴로 덧붙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나를 따르고 있을지는 모르겠군.”

막부가 그를 버리면서 시게오키의 존재는 썩은 동아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본디 나리를 따랐던 사람이니, 상황만 반전된다면 다시 뻔뻔하게 옷을 갈아입을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족하지요.”

“흠. 그들과 함께 내분을 일으키자는 건가?”

시게오키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막부와 척을 질 각오로 내분을 일으키고자 했다면, 진즉 그러지 않았겠는가.

“적절한 지원이 있을 겁니다.”

“지원?”

“이 땅에 나리와 같은 분이 나리뿐이겠습니까? 막부의 불공정과 억압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습니다.”

난세로 인해 버려진 낭인들. 착취당하는 농민들. 업신여겨지는 상인들. 탄압당하는 신자들.

발에 채는 것이 불만 분자였다.

시게오키는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부리려면 돈이 꽤 있어야 할 텐데.”

사람을 반란군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사회에 대한 반감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무장시킬 무기와 식량 역시, 충분해야만 능히 정부군과 맞설 수 있다.

이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헐벗은 몸에 농기구 따위로 무장한 채 식량을 약탈하고 다니는 폭도만이 될 수 있을 뿐.

시게오키의 지적에 상인이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누굽니까?”

“모른다. ……하지만 상인町人이라는 건 알지.”

“막부의 불공정과 억압에 불만 품은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저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그 중에 하나.”

“예.”

상인이니만큼 자금을 대줄 동료가 있다는 뜻일까.

시게오키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중요한 건 상인의 배후는 아니었다.

그들이 진정 자신을 대마도주로 만들 수 있느냐 뿐.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서 버텨온 최근이었기에, 계획을 허황으로 끝내지 않을 자금만 있다면 시게오키로서는 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에도에서는 시게오키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뒤늦게 돌았다.

수년 전, 그의 직속 상관 고발 사건으로 모두가 시게오키의 이름을 알았지만, 얼굴을 알거나 가까이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증발했음에도 곧바로 눈치채는 이가 없어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막부에서는 시게오키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을 흩뿌렸다.

그러나 시게오키가 에도를 떠난 지는 이미 한참 뒤였으므로, 막부에서는 시게오키의 행방을 쫓지 못하고 수확 없이 인력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저 시게오키가 몇몇 몰락한 영주들처럼 머리를 깎고 이름을 바꾼 채, 어느 허름한 암자에서 땡중 노릇이나 하고 있으리라 짐작하고서 말이다.

* * *

금나라와 일본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바쁠 동안.

조선 역시 음양으로 바쁜 상황이었다.

음지에서야, 물론 각국을 바쁘게 만드느라 바빴다.

그리고 양지에서는 공적인 사업과 백년대계로 바빴는데, 최근까지 잠잠했다가 급부상한 문제가 있었다.

영의정 이상의가 고했다.

“전라도의 곡식 산출량이 폭증하여 선혜법 확대가 지체되고 있사옵니다.”

선혜법은 금상今上의 즉위부터 지금까지 꼬박 이어져 온 대계였다.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함이 본디 백 년 동안 이어질 대계를 뜻함이 아닐진대, 어찌하여 떡밥이 쉬다 못해 썩고 곰팡이가 피다가 삭아 흔적도 없어질 세월 동안 아직도 선혜법 확대를 하는가.

이상의의 말처럼 곡식 산출량이 늘어나서였다.

선혜법은 조용조租庸調라는 기존의 세 가지 핵심 조세수단을 곡식 수취로 일원화하는 개혁이었다.

문제는, 특산품은 부피 대비 가치가 높고 공역公役은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데 반하여 곡식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이앙법이 시행된 뒤로 백성들 사이에서 이앙법을 꺼리는 마음이 크게 사라졌는데…….”

지난 몇 년 동안의 모내기 확대는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대다수 백성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앙법은 갖춰야 할 설비가 많고 모판에 심고 이식하는 등 절차가 늘어나 노동이 집약되고 고됐지만, 대신 산출량이 직파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선 시대에서는 곡식이 곧 재산.

그 재산을 획기적으로 늘릴 방법이 알려졌는데 마다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조정에서는 섣부른 이앙법의 도입이 초래할 피해를 우려했다.

이앙법은 대량의 농업용수를 소모하기 때문에, 관개시설의 충분한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각 읍 수령들에게 설비를 갖춘 지역에만 이앙법을 허용하도록 제한해 두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향촌 단위에서 저수지를 재건하고 수고를 복구해 냈다.

돈 많이 버는 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 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능하다면 자발적으로 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결과였다.

“각처에서 곡식의 산출량이 나날이 늘어, 이전에 선혜법 시행을 위해 확보해둔 가도와 공창公倉, 부두가 포화하여 조운이 지체되고 손실이 증대되었사옵니다.”

곡식은 식량.

적절한 환경에서는 장기 보관이 가능하지만, 설비가 부실하거나 노상에서는 습기와 해충, 유해조수로 끊임없이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래서야 백성들이 어렵사리 한 해 농사를 지어 피 같은 세금을 냈더니만 국가의 역량 부족으로 대자연과 짐승들에게 복지 해주는 꼴이었다.

“이미 각 읍에서는 자체적으로 시설을 확대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벅찬 지경이옵니다.”

선혜법의 확대를 더 진전시키지 못하는 이유였다.

앞으로 이앙법은 더 확산하고, 곡식의 산출량 또한 나날이 늘어날 예정인데, 선혜법까지 확대한다?

포화해 정체되어 버린 가도 위에다 짐을 더 얹는 꼴이었다.

이것이 선혜법이 좌초해 버린 연유였다.

‘모름지기 개혁은 속전속결이거늘.’

왕은 탄식했다.

도입은 쾌속으로 했는데, 전국 확대가 백만 년짜리 떡밥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것이 유력자나 위정자들의 반발 혹은 견제 따위로 인해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차라리 그런 문제라면 술수를 사용해 치워버리면 된다.

하지만, 나라가 본디 개발이 저열해 기반시설이 대대적인 확충에도 성장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술수로는 극복하기 힘든 난관.

‘좋은 소식은 맞는데…….’

좋은 소식에도 선이 있는 법이다.

괜히 이상의가 폭증이라고 한 게 아닌 셈. 나라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니 폭증이 맞았다.

“방안이 없겠습니까?”

왕이 묻자 이상의가 답했다.

“본디 팔도에서 길을 내고 부두를 세우는 건 우의정이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사옵니다.”

“그를 다시 불러들이자는 말입니까?”

“서북면의 오랑캐들이 비록 위협적인 준동을 보였으나,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체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고 하므로 서토西土에 대한 시름은 크게 덜었사옵니다.”

위협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알아서 하게 두면 되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이에 좌의정 남이공이 긍정했다.

“그러하옵니다. 장벽 세우는 일이 분명 작지는 않으나, 팔도의 대계만 하겠사옵니까. 우의정을 다시 불러 그에게 공조의 사업을 잠시 맡긴다면 상황도 크게 호전될 것이옵니다.”

“……두 분이 그렇게 의견을 모으신다면야. 일단 우의정을 불러놓고 타개책을 논해봐야겠지요.”

남이공이 안도한 얼굴로 허리 숙였다.

“망극하옵나이다.”

* * *

회의가 파한 뒤.

남이공과 함께 나선 영의정 이상의가 물었다.

“좌상은 본디 우상과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잖소?”

그런데 왜 김류를 불러들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는 말인가.

이에 남이공이 뻔뻔한 얼굴로 답했다.

“공사公私의 분간이 유별有別한데 이 사람이 국사에 있어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겠습니까?”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기껍게 불러들이니 사감이 있지는 않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소이다.”

“음, 음.”

남이공은 헛기침과 함께 슬그머니 이상의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사람이 늙고 노쇠하여 대왕을 보필하기가 나날이 힘드니, 이만 사직을 하는 게 옳지 않을까 고민한지 오래입니다.”

“아니.”

“이 사람이 당장 빠지면 영상께서 고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염치 상 차마 사직소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의정이 돌아와 주면 다르지요.”

남이공의 고백에 이상의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좌상께서 앞으로 더 헌신할 세월이 구만리인데, 어찌하여 벌써 직을 내려놓겠다는 말이외까?”

“소관이 늙고 병들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합시다.”

이상의가 단호하게 일렀다.

남이공이 늙고 병든 건 사실이다.

나라는 강성해지고 우의정은 빠져서 격무가 고되었으니까.

하지만, 요직을 차지한 늙은이 중에 그렇지 않은 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도 늙고 병들기는 하였으나 하관들이 좀처럼 미덥지가 못하고, 성상의 은혜가 하늘과 같아 한평생 일하여도 갚기 힘드니 몰염치하게 자리만 차지하고서 근근이 제 몫을 하고 있거늘, 좌상이 갑자기 도망, 큼. 사직해서야 되겠소이까?”

이상의의 지적에 남이공이 입술만 움찔거렸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일까.

남이공이 주저하는 가운데 이상의가 목소리를 가라앉힌 채로 덧붙였다.

“……도망에도 위아래가 있소이다. 영의정인 내가 먼저 사직하는 게 예의에 옳으니, 좌상은 조금만 더 고생하시오. 어차피 좌상도 영의정은 지내봐야지 않겠소?”

이상의의 진심 고백에 남이공은 깜짝 놀랐다가, 금방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영의정에 제수된 뒤에 금방 사직하면 성상께서 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멋들어진 간판만 따고서 도망쳐버리는 셈이니까.

노한 대왕이 괘씸죄를 물어 사직은 불허하고서, 관을 짤 때까지 부려먹을 수도 있었다.

마치 친인척 비리로 세종대왕의 눈 밖에 난 황희가 89세, 졸拙하기 고작 1년 전에야 겨우 은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남이공 또한, 남은 평생 삭은 몸으로 삭은 종이나 만지다가 가는 수 있었다.

이에 이상의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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