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55화
오래전, 대왕은 이상의에게 건강 관리법을 내려주었다.
몸이 낡았다 하여 방구석에만 있지 말고, 공부만 하지도 말며, 자주 밖으로 나가 볕을 보라고 말이다.
효험은 있었다.
어느샌가 잔병치레도 안 하게 되더니, 깡말라 흐느적거리던 사지에도 근육이 붙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로는 인간의 근본마저 벗어날 순 없었다.
건강 관리법으로 파도치는 세월을 조금 밀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
세월에는 어떠한 장사壯士도 꺾어버리며, 돌과 절벽을 깎아내리고, 끝내는 태산마저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
그 앞에서 이상의는 모든 사람과 공평하게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다.
대왕은 다르게 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상의는 자신이 천명天命을 극복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대왕이야 그랬다고 치하하시지만, 누군들 사람의 천수天壽를 알겠는가?
오로지 하늘만이 사람마다 내려준 천수를 알 따름이다.
사람은, 단지 최선을 다할 뿐.
그래서 이상의는 그리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진정으로 벅차구나.’
나라가 부강해질수록 업무도 과중해졌다.
이런 와중에 우의정 김류마저 정벽 건설의 건으로 서토西土에 나아가니, 일이 더더욱 격무가 되었다.
남이공이 갖은 엄살을 부리며 사직을 입에 올리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러나,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거늘 혼자만 발을 쏙 빼려고 하다니.’
늦게라도 문인文人의 길을 가겠다, 허울 좋은 소리를 빙자하여 먼저 은퇴하려던 것을 돌려세운 지가 최근이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지났으면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은퇴 타령을 한단 말인가.
설사 은퇴를 하게 되더라도 순서는 지켜야 하는 법이다.
이상의 자신인들 문인으로서의 길에 미련이 없겠는가? 선비이기는 매한가지일진대.
‘꼬우면 먼저 영의정에 올랐어야지.’
그래서 전임 은퇴자들도 다 영의정은 오르고 나서야 사직소를 올릴 수 있었다.
이원익, 박홍구.
나라가 오늘날처럼 안팎으로 바쁜 때가 없거늘 태평하게 주해나 달고 있다니 부럽다 못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제는 내 차례다.’
이상의는 김류가 오면 곧바로 사직하리라 결심했다.
백관의 정점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지금의 자리에 미련이 없지는 않았으나, 못된 좌의정이 여차하면 선수 칠 기세였으므로 별수 없었다.
혹여 좌의정이 빠진다면 자신만 다시 2인 체재로 의정부를 이끌어나가야 했다.
김류라는 썩 미덥지 못한 인사와 함께 말이다.
‘그 양반 불편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이상의는 옛 당파 대북의 출신.
조정이 정당과 도당이라는 새로운 분류로 재편된 뒤로 과거의 출신은 중요치 않게 되었으나, 이상의는 앞으로 살아갈 세월보다 살아온 세월이 더 긴 늙은이였다.
그 살아온 세월이란, 당연히 대북의 당여로서 살아온 세월이고.
그 세월을 서인이라는 정반대의 당파에서 몸담아온 김류와는, 아무리 오늘날의 성세 이전 해묵은 시절의 이야기일지라도 완전히 덮어놓고서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좌의정이 있을 때야 그나마 덜 했지만.’
김류와 면대면을 한 채로 국무를 돌본다?
아니 될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으니 좌상께서는 그리 아시오!”
이상의의 일방적인 통보에 남이공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이상의에게 먼저 사직을 퇴짜 맞은 남이공은, 황당한 심정으로 귀가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문간에서 노복이 그런 남이공을 맞이해주었으나, 남이공은 건성으로 답하곤 지나갔다.
“어, 그래. 수고하게.”
자신을 만류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안색을 싹 바꾸고는, 위아래가 있다면서 자기가 먼저 사직하겠다고 통보하다니.
평소 내색만 안 했을 뿐, 영의정 역시 사직하고 싶었던 심정만은 굴뚝이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선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로 나섰으니까.
‘……이걸 좋아해야 하나.’
남이공은 당혹한 얼굴 그대로, 관복을 벗어 의장衣欌에 걸어 넣었다.
사직은 분명 예기치 못하게 선수를 빼앗기긴 했다.
영의정이 사직할 각오가 되었다니, 기죽지 않고 함께 사직소를 올린들 자신은 반려될 터.
두 사람이 함께 의정부를 비웠다간 오래간만에 복귀할 김류의 부담이 커지니 한 사람은 남을 텐데, 관례상 영의정이 대대로 은퇴해왔기 때문이다.
-이상의가 빠지면 좌의정이 영의정이 될 텐데, 그 뒤에 사직하는 게 순서에도 맞고 좌상에게도 이롭지 않겠습니까?
대왕이라면 이렇게 판결하지 않을까.
가상의 판결 말마따나, 이상의가 은퇴하는 것이 남이공에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남이공이 그간 사직을 주저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영의정은 지내보고 내려와야지 않겠느냐는 욕심 때문이었으니까.
기왕 좌의정까지 올라온 참 아닌가.
‘언제고 버틸 줄 알았던 영의정 대감이 먼저 사직한다는 게 꽤 의외여서 그렇지…….’
그리고 영의정이 사직할 때는 또 하나의 관례가 있었다.
바로, 새롭게 의정이 될 사람을 직접 선발하는 것이다.
본래 의정대신은 복상卜相이라는 절차를 통해 선발했다.
점을 친다는 뜻으로,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을 점을 쳐 선발한 것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그러나, 이 복상도 절차만 그럴듯할 뿐 의정들이 후보자들을 제안하면 왕이 후보자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자를 뽑는 것에 불과했다.
비교하자면 의정이 직접 후임을 선발하는 오늘날 방식이, 신하들에게는 더 유리한 셈.
‘대신 사직하는 사람도 의정으로서 쓸만한 인재를 추천해야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본의가 어그러진 적은 없었다.
기실, 남이공 본인 또한 그러한 절차에 의해서 의정의 반열에 오른 수혜자이기도 했고 말이다.
‘영의정 대감에게 추천해 볼까?’
영의정의 선수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말이다.
혹, 영의정이 안배해둔 후보가 있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남이공 딴에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 탓이었다.
꽤 오랫동안 호조판서를 전담하여 국가의 내실을 담당해온 인재다.
이 사람이 제 몫을 발휘해주지 않았다면, 각종 큰 사업을 벌여온 조선은 좌충우돌 고생이 많았으리라.
어쩌면 김류보다도 먼저 의정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 * *
“우의정!”
김류의 귀환을 가장 반긴 건 그의 지인들이 아니었다.
“영의정 대감?”
이상의가 마치 절친이라도 되는 양 환대했고, 김류는 그가 뻗어오는 팔을 붙들고서 난데없이 우애를 나눴다.
“잘 돌아오셨소이다!”
“그간 두 분은 무탈하셨습니까?”
“이 사람은 우상이 돌아온 게 무탈이요!”
이상의가 대답 겸 환대를 이어나가자, 남이공이 고개를 끄덕여 찬동했다.
그동안 의정부 의정들은 백관의 최정상에서 3인 1조로 중임을 도맡아왔다.
그런데 그중에서 한 명이 빠졌으니, 격무야 당연히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김류가 귀환했으니까.
이상의는 김류의 팔을 붙든 채 일렀다.
“우의정이 귀환하였으니, 나는 이만 자유의 몸이 되어야겠소이다.”
“……자유의 몸이라니요?”
“내가 고생이 적지 않아서 낡은 몸뚱이가 이승을 하직하기 일보 직전이요. 그동안은 좌의정을 보아 어떻게든 견뎠지만, 이제는 아니외다!”
이상의는 볼일 다 봤다는 듯, 김류의 팔에서 손을 떼고서 곧장 발을 돌렸다.
그 광경에 김류가 당혹해서 물었다.
“정말로 바로 사직을 청하러 가십니까?”
이미 부쩍 멀어진 이상의는 듣지 못한 듯 바삐 나아갈 따름이었다.
그런 이상의를 대신하여, 곁에서 남이공이 답했다.
“안 그래도 우상이 귀환하시기 전까지 누가 먼저 사직할 것이냐를 두고 왈가왈부가 있었소이다.”
“허.”
“당분간 새 의정이 제수되지 않는다면 우의정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심경을 느낄 수 있을 터인데…….”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이미 후임 의정은 정해놓았고, 그 사람이 본디 맡고 있던 자리의 후임도 거의 정해져 있었으니까.
남이공은 애석할 따름이었다.
김류도 자신과 똑같은 고생을 해보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원했던 후임을 영의정이 수긍해 주었으니 다행이었다.
기실 남이공은 그 또한 고생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리고 며칠이 지나.
이상의는 자신이 감독한 몇 가지 국사國事를 정리하고서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대왕은 나라를 위해 오래 헌신한 이상의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새로운 초피 갖옷을 하사했다.
이미 이상의는 초피 갖옷을 두 벌이나 가지고 있었고, 그걸 동시에 걸친 채였으므로, 여러 신료가 조심스럽게 의심하기를 혹 대왕은 이상의가 갖옷을 세 벌이나 껴입을까 궁금하여 또 하사한 게 아닌가 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상의는 정말로 갖옷을 세 벌이나 걸치고 다녔다.
이미 사정을 알지 못하는 시골 사람들이 얼핏 보았다가 털가죽 인간으로 오해했다는 사례가 많은 이상의다.
이제는 세 겹을 걸친 채, 자유의 몸이 되어 한양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니 또 어떤 전설을 만들어낼까?
혹자가 야밤에 보기라도 한다면, 괴물로 여겨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그런 이상의의 후임은 좌의정인 남이공이 맡게 되었다.
빈 좌의정 자리는 김류가 맡게 되었으며, 새롭게 난 우의정 자리는 남이공의 사돈이자 절친, 그리고 악연이기도 한 김신국이 맡게 되었다.
“자넨 이제 뒤졌다고 복창하게, 껄껄.”
“…….”
남이공 자신은 삼의정 중에서도 정점인 영의정.
반대로 김신국은 이제 막 의정 말단에 갓 제수된 신래新來.
남이공은 이상의에게 선수를 양보한 대가를 이용해, 말년을 최대한 안온하게 보내기로 작정했다.
김신국이 거의 전용하다시피 한 호조판서 자리를 채운 사람은 김육이었다.
오래전부터 호조와 공조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거듭 증명해온 인재다.
그간 현장 시찰도 꺼리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므로, 여러 신료가 신임 호조판서의 귀추를 주목했다.
그리고 신임 좌의정 김류, 신임 호조판서 김육은 곧바로 정체된 선혜법 문제에 착수했다.
“이건 그다지 어려운 문제도 아니로군.”
김류가 단언했다.
“……그렇습니까?”
김육은 그런 김류의 자신감이 당혹스러울 뿐.
그러나 김육은 이전까지 공조판서를 연임하며 선혜법 확대에 필요한 기반시설 확보를 담당해왔다.
그리고 우의정이 된 뒤로는 척박하고 혼란한 서토西土에 파견되어, 장성長城 축조를 전담하여 부족한 인력과 물동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법을 깨우쳤다.
기실 오늘날 팔도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김류에게는 항상 맡아왔고 해결해온 부류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건 일단 두 가지 요소를 두 방향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김육의 물음에 김류가 느긋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답했다.
“기반시설과 인력. 그리고 효용과 효율. 이 네 가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해두면 어디서 물류가 막히는지 알 수 있지.”
“……?”
“풀어서 말하면 이렇게 되겠지. 현재 물동량이 기반시설의 처리 능력을 상회하는가? 그러면 기반시설을 확장하면 되는 것이고…….”
기반시설의 효용에는 문제가 없는데 효율이 떨어지는가?
도로가 침식되었다면, 메우고.
휘었다면, 다시 제대로 내고.
부두가 낡았다면, 고치면 된다.
기반시설에 문제가 없다면, 혹 인력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확인해 본다.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충원하면 그만이다.
“기반시설도, 인력도 절대적인 처리능력이 물류 이상인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조사와 감사를 통해 조직을 파악하고 무능한 인사를 교체하며, 기강을 다시 잡아 인력의 효율적인 집행을 실현해야 한다.
김류가 단언했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막혔는지부터 알아내야, 빠르고 정확하고 신속한 개선이 가능하네. 뭐가 안 된다고 무작정 길만 넓히고 사람만 더 밀어 넣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성급한 확장과 충원이 일시적인 처리능력 개선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하지 않는다면, 절대적인 잉여 처리능력은 고스란히 태만과 낭비, 부패의 온상이 되어 나라를 밑바닥에서부터 갉아먹게 되리라.
인간의 잉여와 비효율적 행정은 역병과 같아 전염하고 번식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국가는 자정 능력마저 잃고 끝내는 전조前朝 고려가 그러했듯 바닥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니 역추적을 통해 확인해 보세. 물류가 정확히 어디에서, 어떤 문제로 지체되고 있는지를 말이야.”
선혜법은 방대한 영역에 걸쳐 시행되고 있었다. 족히 수백 곳은 될 세곡 운송의 출발점부터 종점까지 쫓아가는 건 비효율의 극치이리라.
대신 몇 개의 대규모 관창官倉으로 수렴해오는 물류를 역으로 추적한다면, 병목현상이 발생하는 진원지를 쉽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터.
김류가 물었다.
“이렇게 해본 적은 있나?”
김육은 눈이 동그래진 채로 답했다.
“……아니요.”
호조와 공조의 당상관직을 번갈아 지낸 김육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본 적은 없었다.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실태를 파악하는 노고를 기껍게 감수하던 그다. 여차하면 선혜법 시행지를 모두 순회할 생각마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끝이 없었겠구나.’
몸만 바쁠 뿐, 머리는 태만했던 꼴 아닌가.
김육이 내심 반성하는 동안 김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잘 됐군. 그럼 이 방식이 먹힐 수 있다는 뜻이니.”
서토西土에서도 갈고 닦은 자신의 장기를 보여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