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56화
김류가 조선으로 귀환해, 물류 부정맥을 치료하기 위한 집도에 들어간 순간.
바다 건너에서도 대사大事는 착실히 진척되고 있었다.
“이들이, 내가 이끌 군대란 말인가?”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만면에 기쁨을 담고서 물었다.
과연 그의 앞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무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딱딱한 낯짝에 단련된 몸통, 양식은 낡았으나 잘 관리된 무구들은 그들의 신세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낭인.
난세의 종식과 함께 무武의 가치와 수요는 급격하게 떨어졌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세력도 부도 구축하지 못한 하급 무사들은 십중팔구가 실직자가 되어버렸다.
그중 일부는, 무사의 신분을 저버리고 입에 풀칠하는 데 몰두하기로 했다.
어느 세력의 힘 잘 쓰는 하인이 되거나, 혹은 단련된 체력을 이용해 떠돌이 상인이 되는 식이었다.
또 일부는 자신이 갖춘 무구를 백분 활용하여 벽지僻地에서 도적이나 강도가 되었다.
난세에서도 끈 떨어진 무사들이 흔히 해왔던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자신의 귀결이라고는 용인할 수 없었던 무리가 있었다.
이들은 틈틈이 소일거리를 하며 어떻게든 명은 유지해 왔으나, 정착하지 못했기에 생활은 극도로 빈곤했으며, 이 와중에 빈번히 습격당하고는 했다.
군상群像들 또한 적잖이 난세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값진 무구를 가진 낭인들을 노려오곤 했으니까.
그러니 오늘날에도 일개 하인이나 도적으로 전락하지 않은 낭인이란 그 신분의 대가로서 지옥 같은 일상을 이어가는 셈이었다.
그다지 즐겁고 보람 있는 생은 아니었다.
단지, 이 같은 방식 외에는 살아가는 법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살아가고만 있었을 뿐.
혹자가 미련하다 평한들 반박할 순 없었으리라.
……기적같이 고용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게오키와 동행한 거구의 상인이 말했다.
“대신, 거사가 성공한다면 이들을 빠짐없이 대마도의 가신으로 고용해주셔야 합니다. 종교에도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되고요.”
상인이 고용의 조건을 말해주었다.
낭인은 주인을 찾아 헤매는 신세들.
그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주인이 곧 구원이었다. 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기에, 이외의 조건으로는 고용할 수 없었다.
시게오키가 답했다.
“음. 어차피 거사에 성공하더라도 대마도는 한동안 혼란스러울 것이다. 어쩌면 막부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 유능한 무사라면 얼마든지 필요하다!”
시게오키가 확언하자 낭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 조건으로 모인 이들이었다.
시게오키가 상인에게 말했다.
“자네는 능력이 좋군. 낭인들을 이토록 모을 수 있다니? 흉포한 자들이라 통제하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배부른 짐승은 사납지 않은 법이며, 곳간이 두둑한 사람은 인품이 후덕한 법이지요.”
그리고 주인 생긴 낭인들은 더는 흉포한 낭인이 아닌 것이다.
상인이 덧붙였다.
“양자의 이해관계가 분명하게 일치하였으니 일단 인연만 닿는다면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으흠, 그렇군…….”
시게오키는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기실, 그는 상인의 음흉한 복심을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낭인들에게 이중계약일지도 모른다.
이유 없이 베푸는 사람은 없는 법.
상인의 배후세력이 무엇이건, 그들은 자신을 간판 삼아 대마도를 종씨 가문에서 빼앗아 장악하려 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니 어쩌면 낭인들은 이미 상인의 배후세력이 고용된 입장일 공산이 컸다.
아마, 자신이라도 그러했을 테고.
그럼에도 이를 경계하지 않는 건 상인 말마따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시게오키 자신은 적극적으로 대마도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나름 명분도 존재하고 있으니까.
종씨 가문의 유일하면서도 나름 강력한 경쟁자인 것이다.
막부가 자신을 두고서 종씨 가문을 견제하고 조종하려 했던 것과 이유는 같은 셈이다.
단지 시게오키로서는 결과가 정반대였기에 기꺼이 협력할 뿐.
낭인들이 주인만을 바라듯, 시게오키 역시 오롯이 대마도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나리의 가족들은, 안전한 곳에 모셔두었습니다.”
인질.
“설령 대사가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보호하겠습니다.”
재활용.
시게오키는 상인의 호의적인 보고에 담긴 진의를 읽어내며, 솔직하게 답했다.
“대사는 반드시 성공해야겠군.”
만약 실패한다면 자신의 자식들까지 간판으로 내세워질 테니까.
가족애가 그다지 두텁지 않은 열도다. 그럼에도, 시게오키로선 없던 부성애가 절로 솟아나는 가능성이었다.
이를 타개할 방법은 분명하고도 단순하다.
말마따나, 자신이 성공하면 그만인 것.
“말은 충분합니다. 결과만이 의미 있지요.”
“허.”
시게오키가 기가 찬다는 듯 숨을 토해내자 상인이 아뢨다.
“준비된 군사는 이들보다 몇 배는 많습니다.”
“더 있다고?”
“이것은 일개 영주를 함락시키는 일만은 아닙니다. 대마도는 섬이며, 오랫동안 종씨 가문이 지배해왔지요. 거사에 실패한다면 패잔병들은 탈출할 수조차 없이 모두 사냥당하게 될 겁니다.”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 했다.
시게오키와 낭인들 외에, 상인 역시 그 딴에 최선을 다할 이유가 있었고 말이다.
“길일은 이미 정해두었습니다. 나흘 뒤입니다.”
“뭐, 그날이 길일인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아니면 단순히 점복占卜의 결과일 뿐인가.
무사들은 약간의 불행만으로 목숨을 잃는 인생이기에, 다들 종교와 미신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시게오키는 기왕이면 실리적인 이유가 있었으면 했다.
상인에게 재수 없는 소리를 거듭 들은 참이니까.
다행히,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려주었다.
“나리께서 실종된 뒤로 종씨의 참근교대?勤交代가 이례적으로 앞당겨졌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참근교대란 영주가 한 해, 또는 두 해마다 에도로 상경하여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막 열도를 통일하고 질서를 강화하려는 막부다. 외방外房에 산재한 무수한 영주들을 견제하고자 만들어낸 절차였다.
시게오키가 답했다.
“몰랐다. 피신하기 바빴으니.”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막부에서는 나리의 실종을 종씨 가문의 술책으로 의심하는 모양이지요.”
막부에서 두고두고 보호 겸 억류해두고서 종씨 가문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오고 있었으니까.
그런 시게오키가 갑자기 사라질 일이란 시게오키로 인하여 배반을 당하고 대마도 주권에 위협마저 당한 종씨 가문의 보복밖에는 없었다.
실로 합리적인 의심.
본디 종씨 가문은 열도에서도 특히 먼 대마도의 주인으로, 참근교대에 주기가 긴 특혜를 받고 있었는데 이로써 불리게 된 것이다.
막부에서는 종씨 가문의 당주 소 요시나리에게 시게오키의 실종을 추궁하고, 불쾌함을 드러내어 대마도에 몇 가지 족쇄를 채울 심산이리라.
“억울하게 된 소 요시나리로서는 똥이라도 밟은 심정이겠지만, 곧 그것보다도 더 억울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출행할 길일이 곧 소 요시나리가 에도로 출행할 길일이기도 하니까요.”
“아하! 놈과 가신들이 모두 밖에 나와 있을 때 친다는 것이로군!”
시게오키가 환한 얼굴로 추측했다.
“그렇습니다. 만족하십니까?”
“당연히 만족한다! 실로 마음에 드는군!”
시게오키가 미소를 지었다.
“개 같은 막부가 마지막에 이런 도움을 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진즉 막부가 정당한 도움을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래! 한심하고 비열한 놈들! 나를 업신여긴 대가를 치러야지. 그리고 종씨 가문은……, 실로 길일吉日에 지워지게 될 것이고.”
시게오키는 이미 대사를 성사한 듯,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킬킬 웃었다.
* * *
최선의 복수는, 성공한 복수다.
혹자는 복수를 하려면 먼저 무덤 두 개를 파놓으라고 하지만, 필요한 무덤은 오직 하나뿐이다.
너, 아니면 나.
둘 중에 하나만 들어가면 되니까.
그리고 기왕이면 나보다는 상대를 무덤에 넣어줄 필요가 있을 따름이다.
“저 시건방진 자식…….”
시게오키는 부두 인근 야산에 의지해 출행을 앞둔 소 요시나리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새벽녘 야음을 틈타 몰래 낭인들과 함께 대마도로 숨어들어왔다.
그리고 주체하기 어려운 기대감과 인내심 사이의 싸움을 즐기며, 마침내 백주白晝에 다다른 지금 마침내 대사大事를 시행할 때가 된 것이다.
조력자는 나머지 병력을 부두가 확보된 다음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시게오키 본인과 쉰 명의 낭인들이 첫 단추를 잘 끼워줘야 했다.
소 요시나리는 부두를 앞둔 채 가신들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부하 떨거지들이 좋은 소리를 해주는지, 소 요시나리의 면면은 곧 에도로 호출 아닌 호출을 불려가는 이답지 않게 밝았다.
‘저 낯짝에 칼질만 할 수 있다면!’
시게오키가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으로, 수하들을 통솔할 낭인이 다가왔다.
“때가 된 듯합니다.”
시게오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 요시나리가 배 위에 오르기 전에 처단해야 했다.
마침 요시나리도 배웅을 뒤로하고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게오키와 낭인들은 조용히 산비탈을 미끄러졌다.
저마다 도검을 한 자루씩 꺼낸 채였다. 무구들은 그동안 잘 관리한 보람이 있어, 도검은 날카로웠고 갑주는 반짝였다.
곧 시게오키와 낭인들을 마주한 대마도 군사가 비명 질렀다.
“적이다!”
선두의 낭인이 짐승처럼 달려들어 목구멍에 칼을 찔러넣었다.
병사는 외치던 얼굴 그대로, 입에 칼을 처박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낭인이 그대로 도검을 몰아붙이자, 뺨과 함께 얼굴 절반이 쩍 갈라지면서 병사가 쓰러졌다.
최초의 참상을 뒤로하고 시게오키와 낭인들이 계속 내달렸다.
느닷없는 습격에 소 요시나리가 황급히 외쳤다. 막아라!
그리고 그런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가신과 무사들이 저마다 도검을 빼 들고서 습격자들과 응전했다.
쨍! 쨍!
부두 곳곳에서 백주의 칼부림이 벌어졌다.
도검이 부딪힐 때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고, 이따금 칼끝이 외투나 갑주의 틈을 찌르고 베어버리면서 피를 뿌렸다.
낭인들의 기세는 실로 매서웠다.
대마도의 가신과 무사들도 무력이 저열하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난세를 헤쳐온 이들.
그러나 낭인들과 같은 절박함은 없었다.
어차피 최후라곤 비참한 죽음뿐인 낭인들이다. 그것을 구제할 유일한 기회 앞에서, 목숨을 걸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생사生死를 도외시한 절박하면서도 필사적인 일격이 이어졌다.
요시나리의 수하들은 열세 끝에 피와 살점을 뿌렸다. 손가락이 달아나고 손목이 잘리고 팔이 덜렁거렸다.
반병신이 되어버린 자들이 당황한 얼굴로 주춤하고 몸을 돌리는 사이, 낭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들어 적수를 끝장냈다.
그리고 응당 자신이 차지해야 할 자리, 대마도의 가신과 무사의 지위를 강탈했다.
소 요시나리에게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부두에는 주민과 말단 병사들이 많았으나 습격자들의 날카로운 공세에 질렸는지,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본디 타야 했을 배가 있는 부두로 가신들과 함께 피신하는 동안 수하들이 차례대로 나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변변찮은 저항 한번 없이 부두 좌우로 떨어져 나가 번지는 핏자국만 남기고 사라질 따름이었다.
요시나리는 갑판에 올라 출항을 채근했으나, 연이어 갑판에 올라선 습격자들이 단숨에 배를 장악해버렸다.
중무장한 낭인들 앞에서 노잡이들은 그저 베기 좋은 살덩이에 불과할 뿐.
누구도 나서주는 이 없어, 요시나리는 한순간에 수하들을 모두 잃고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앞장서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요시나리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를 기억하나?”
승리를 확신한 시게오키의 오만한 물음에, 요시나리가 인상을 굳히고서 답했다.
“네놈이 더러운 배신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배신은 네놈들이 먼저 했지.”
시게오키가 단언하며 요시나리의 배를 찔렀다.
요시나리는 안색을 일그러뜨리며 칼을 쥐었다.
“외교를 교란한 건 네놈들이고, 그걸 알면서도 눈 감은 채 나를 이용했던 게 막부다. 이상한 일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질서가 어떻고 법치가 저떻고 강조했는데.”
실상 그들이 강조했던 건 막부와 위정자들에게만 이로운 질서와 평화였다.
“힘이 없다면, 아무리 원리원칙을 따르더라도, 저들만 지키지 않는 원리원칙을 강조하고 강요한 이들에 의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따름이지.”
어찌 보면 권모술수가 난립했던 난세보다도 지금이 더 비겁하고 저열한 세상이다.
“그런데 이젠 내게도 힘이 생겼군. 이제 어쩔 거냐. 막부에 찾아가 고발이라도 할 테냐?”
시게오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요시나리는 인상을 일그러뜨린 그대로, 칼만 붙잡고 있을 뿐.
“…….”
“흥.”
시게오키는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곤, 마저 칼을 휘둘렀다.
배에 꽂힌 칼을 어쩌지 못한 채 붙들고만 있던 요시나리의 손가락들이 날아가며 피와 체액 그리고 내장이 갑판에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