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358화 (358/380)

인조, 명군이 되다 358화

“전하.”

승전색承傳色이 존칭과 함께 권자들을 가져왔다.

개중에는 붉은색 비단으로 포장된 것도 있었다. 바로 눈에 띄었기 때문에, 왕은 곧장 일렀다.

“서안에 두세요.”

“알겠습니다.”

왕의 하명에 승전색은 조용히 서안으로 다가왔다.

서안은 유난히 넓어서, 과장을 보탠다면 평상平床이라 칭해도 될 정도였다.

왕을 위한 특별한 주문 제작품은 아니었다.

서안 상판의 중심에는 십十자 모양으로 부자연스러운 이격이 나 있었다.

초대형 서안은 단지 평범한 서안 네 개를 연이어 붙여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서안에는 승전색이 권자들을 놓을 공간이 없었다.

“아.”

왕은 제 앞에 멈춰 선 하반신을 의식하고는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권자들을 우르르 몰아냈다.

대충 팔로 걷어진 권자들이 서안 아래로 쏟아지며 굴러다녔지만, 왕은 개의치 않았다.

주변에는 이미 권자들이 두서 없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니까.

승전색도 무엇이 막 쏟아져 내린 권자들인지 분간하는 것을 포기하고, 빈자리에 새로운 권자들을 올려놓았다.

왕이 일렀다.

“이쪽에 쌓아둔 건 비답批答을 내린 것이니 다시 승정원으로 가져가고, 이쪽에 있는 건 파기하세요.”

“받들겠습니다.”

승전색은 왕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무더기를 챙긴 다음 물러나는 예를 올렸다.

왕의 시선은 서안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까딱여주었다.

승전색은 왕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조용히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문이 다시 열리건, 닫히건 왕은 개의치 않고 세필을 들어 일필휘지로 비답을 써내렸다.

‘김류가 이쪽 분야에서는 제대로 경험을 쌓았군.’

그는 본디 오만하고 거만했으며, 반정의 주역을 인조가 아닌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

그도 그럴 게, 반역을 망상妄想에서 현실로 끄집어낸 장본인은 김류 본인이었으니까. 이귀도 그러했고.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광해군과 대북 패권에 유감이 많았다.

이귀가 광해군에게 배신감을 가졌다면, 김류는 대북에 의해 숙청당할 위기를 거듭 겪었다.

그러니 반정이란 기실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자들을 뒤엎으려는 성전聖戰이 아니었다.

그저 개인적인 원한의 해소의 결과물일 뿐.

그러니 김류는 반정의 주역을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감정으로 시작해서, 행동으로 마무리 지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인조란 광해군을 끌어낸 뒤 용상을 채우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으리라.

김류가 가진 한계이자, 일면一面으로는 유일한 장점이기도 했다.

반정 후 세상을 오롯이 자신의 성취이자 결과물로 여겼기에, 이를 어그러뜨리지 않고자 애썼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유능하다면 당색이 다른 사람이라도 영입한 것이라던가.

소소한 장점은 아니었다.

반정의 ‘도구’들은 김류가 생각하는 서인천하를 그저 ‘공신인 서인 강경파들만의 권력 독점’으로만 여겼다.

사람만 다른 광해군 시기의 재림을 원했던 것이다.

다른 역사에서는 거의 그렇게 되기도 했고.

그러나 김류만은, 광해군과 대북이 먹다 남긴 과실을 마저 빨아먹은 뒤 똑같이 자멸하기는 바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북인 출신인 남이공을 보전할 수 있었으며, 김신국도 영입할 수 있었고, 대북의 원로 잔당들 또한 조정에 일축으로서 보전할 수 있었다.

서인천하가 가장 천박하고 한심한 형태로 이뤄지려는 위기에서, 적어도 김류는 나와 같은 편이었던 셈이다.

물론, 각기 지향하는 미래가 달랐기에 이해관계로 인한 협력이 종료된 뒤에는 푸닥거리 한 판 해야 했지만 말이다.

서인 내부를 이귀와 함께 자발적으로 청소해야 했던 김류는 이귀와 마찬가지로 많은 힘을 잃었다.

그 뒤로, 김류는 나의 예상대로 그저 그런 B급 관료로서 기능해왔다.

자신이 반정의 진짜 주역이라는 오만만은 여전했으므로, 구슬리는 데 불편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럴만한 가치는 있었다.

나머지 서인 공신들은 태반이 쓰레기에 불과했으니까.

한 세대 전 대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유능한 인재들은 세월에 밀려나서, 천박의 한계를 시험하는 왕에 의해서, 곧 죽어도 그치지 못한 ‘당쟁’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자해 등, 이런저런 연유로 속세를 등진 탓이다.

이원익이나마 건질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반대로 이런 상황이 김류에게는 천운이었고 말이다.

애초에 한심한 인간들 패거리에 불과했던 반정 세력이 정말로 반정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나?

경쟁자들이라곤 더 한심한 인간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정의 권력 구도가 ‘모범적인 상태’로 재편된 뒤로 김류는 의정에 오를 날만을 기다리며 얌전하게 1인분만 해왔다.

B급 인사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다.

하지만,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한자리에서 한 가지 업무를 질리도록 담당했던 덕인지, 이 B급 인사는 자신의 특기에 한해서만은 놀라운 전문성을 보유하게 됐다.

그리고 의정에 제수된 것을 단순히 선약에 의한 과분한 수혜가 아닌, 정당한 쟁취로 만들어놓았다.

‘조금은 감동적이기까지 한 성장이로군…….’

나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이 역사에서는 김류의 존재 의의가, 그저 보복심리와 권력투쟁의 결과로 한 나라와 이천만 백성의 명운을 전보다 더한 저능아들에게 떠넘긴 것이라고는 기술되지 않을 테니까.

‘이게 바로 상부상조라는 거겠지.’

김류가 귀환하기 전, 당시 좌의정이었던 남이공이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상의와 다퉜다는 보고가 있었다.

누가 먼저 사직하느냐를 두고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단기간에 부강해졌고 해외 영토까지 생겨난 조선이다. 왕을 제외하면 행정의 최고 결정권자인 삼의정 중 하나가 공석이 되었으니, 업무가 과중하기는 했을 것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이상의가 먼저 사직하고 남이공이 영의정을 지내보는 것으로 되었다.

일단은 공석이 된 자리에 평소 남이공과 연이 두터웠던 김신국이 빠르게 들어갔으나, 남이공이 얼마나 영의정을 맡아줄 지는 미상이다.

오래 맡아준다면 좋겠지만, 딱 눈치가 안 보일 정도만 지내고 사직한다면 김류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겠지.

예전 같았더라면 지극히 부담스러웠을 전개다.

오만방자한 서인 반정세력의 수장이 영의정까지 지낸다니?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던 다른 역사의 전개를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역사의 김류는 다른 역사의 김류와는 다르다.

인간과 살아온 길은 같을지언정 반정을 기점으로 김류는 당해본 것도 많고 경험해본 것도 많다.

이는 광해군 시절처럼 개처럼 처맞으면서 핍박당한 것과는 다르다.

김류 역시 권력의 중추 중 하나로서, 과거보다는 합리적인 경쟁을 경험했고 거래에 응했으며 성장했다.

그 결과 김류는 과거 그가 그러했듯 처맞고만 사는 개처럼 똥을 싸지르고 주변을 어지럽히는 것 외에도, 할 줄 아는 게 많아졌다.

특기가 있기에 의정에 제수되었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남이공이 사직한다면 그가 영의정에 제수될 것임을 백관百官이 짐작하고, 김류 본인 또한 그러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른들, 그 자리에서 똥을 싸지르거나 자기 영역을 구축한답시고 주변을 어지럽히지는 않을 테지…….’

그런 짓 외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그것을 해야만 하니까.

‘……그래도, 기왕이면 남이공이 조금 더 버텨주었으면 좋겠군.’

김류에게는 미안하지만, 종합적인 성능으로는 남이공이 김류를 능가한다.

남이공은 국제파에다가 실방사를 맡았던 적도 있어 눈도 밝고 머리도 잘 돌아간다.

앞으로 조선의 주적은 일본, 그 다음에는 제국주의 서양 열강들이 될 텐데 기왕이면 영의정이 ‘국토개발 및 물류 전문가’보다는 ‘실리주의 범국제적 모략가’인 쪽이 유리하지 않겠나.

남이공이 나와 캐릭터가 겹치긴 하지만, 둘 중 하나가 급사 혹은 은퇴하는 경우도 대비해야지.

‘세자가 보낸 붉은색 권자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포섭된 데 이어서 대마도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였다.

시게오키는 아직 모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본인도 아마 의식하고 있을 테지만, 그는 핵심 감시대상이었다.

사람의 본성은 화장실을 갈 때와 나온 뒤가 다른 법.

대마도주의 자리는 챙겼으니, 이제는 그 이상을 열망한답시고 또 과거 종씨 집안이 그러했듯 양국 사이에서 이상한 수작질을 부릴지도 몰랐다.

‘그런다면 곧바로 없애버린 뒤 인질이나 가짜 야나가와 일원을 앞세워 도주를 교체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교체 자체가 아니었다.

이미, 시게오키가 실종한 뒤 단기간에 세력을 모아 대마도를 찬탈한다는, 무척 수상한 궤적이 드러난 상태다.

막부에서도 경계심이 늘어났을 터.

이런 상황에서 시게오키가 찬탈 직후 수상하게 급사해버리고, 더더욱 근본 없는 도주가 나타나서 섬을 장악한다면 막부에서도 민감하게 대응할지 몰랐다.

‘수상해도 적당히 수상해야지, 아예 눈앞에 대고 흔들어버리는 수준으로 전개가 이상해지니까…….’

모든 지저분한 장난이 다 그렇듯이, 손을 더럽히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걸 깔끔하게 치우는 게 문제지.

가급적이면 피곤한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게 시게오키 본인의 안녕에 최선이기도 하고.

‘부디 시게오키가 이를 냉정하게 잘 받아들였기를 바랄 수밖에.’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상적인 전개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실현하기 위해 세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애를 썼을까?

실로 가상한 노력이었고,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세자라도 범국제적 모략가라고는 하지 못하겠지.’

세자는 타고난 성품이 ‘너무’ 훌륭했다.

냉혈하고 야만한 세계다. 국제정세가 그러했고, 권력자들의 세상이 그러했다.

경쟁에서 뒤처진다면 서슴없이 다른 놈을 붙들고 찌르고 물고 늘어지며 밀치고 독살해버리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기가 교양이다 못해서 아예 정의이고 능력으로 여겨지는 영역이다.

‘……소시오패스들의 합리화만은 아니지. 어떤 위치에서는 책임져야 할 것이 너무 과중하니까.’

대표적으로는 나라의 주인 된 자리가 그러하다.

자신의 자리를 이용해서 기껏 한다는 게 부정부패나 핍박과 탄압, 학대와 착취인 오물汚物이 아니라면, 그런 오물들에 맞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 지켜질 수 있도록’ 나 자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자는…….’

정도正道만이 길의 전부가 아니라는 아비의 적극적인 교육에도, 그저 사도私道가 있음을 인지만을 할 뿐 나서서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당장 세자가 전담한 시게오키의 건도, 알아서 궁구하여 제안하고 착수한 게 아니었다.

부왕이 시켰으니 그저 최선을 다해 행할 뿐.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세자는 경쟁이라는 달리기에서 뒤처질 때 남 다리 걸 생각보다는 훈련을 통해 앞서나갈 생각만 할 인품이다.

‘굳이 사특한 방법을 써야하냐며 고결함을 완고하게 준수하는 것도 아니라, 애초에 사도私道는 안중에 없는 것이지…….’

혹 대차게 깨지고 나면 뭔가 달라지려나 싶다가도, 이내 회의적으로 고개를 젓게 만든다.

그러나, 무척 다행스러운 점은 세자가 일면 답답한 인품을 고수할 자격이 없지는 않다는 점이다.

세자는 제왕의 자질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음양 양면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으며, 세자빈에게 베풀기 위한 의술을 만백성에게도 공유하고자 의서를 내고 비누도 퍼뜨렸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은 아니다.

세자는 원정을 지휘하여, 물론 현장 지휘관들의 배려를 크게 받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포르모사를 점령해내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 스페인의 거함 산 펠리페를 위시한 선단을 해상에서 저지하기도 했고.

이번에도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훌륭히 조율하여 대마도에 조선의 영향력을 깊숙이 심어내기까지 했다.

‘외강내강外剛內剛. 간계奸計는 딱히 흉중에 두지 않으니 잘 배웠으므로 시키면 곧잘 해낸다. 통솔과 지휘에도 뛰어나지만, 산책과 활쏘기를 좋아해서 일신의 무용과 체력도 나쁘지 않지.’

세자는 이상적인 군주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어쩌면 세자는 이미 이상적인 군주다.

단지 내가 있어 연마해온 제왕의 자질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을뿐.

이러한 세자의 존재는, 내가 다른 역사의 인조에게 보여주고자 한 궁국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다른 역사의 인조란 언제부턴가 과일에 대드는 초파리만도 못한 존재였기에, 세자를 통해서 느끼는 감정은 보복이나 과시에 대한 충족욕과는 달랐다.

‘그저, 잘 자라준 데 고마울 따름이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게 사치나 자만이 아닐 자질 또한 갖췄다.

이 아비에게는 얼마나 과분한 행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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