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60화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김육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간 호조와 공조를 전전해온 그다.
두 관청에서 김육은 적성이 맞았으며, 경험 또한 빠르게 쌓아나갔다.
그렇게 경제의 묘리를 체득한 김육이었고, 그가 김신국의 후임이 되리라 백관百官이 짐작했다.
과연, 김육은 김신국을 대신하여 호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그로서는 기념비적인 성취였다.
하지만, 이게 출세의 전부는 아니었다. 호조 위에는 의정부의 삼정승이 있다.
당장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의정 말직인 우의정 정도는 탐내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전임 호조판서 김신국이 우의정에 제수되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김육은 막막했다.
호조의 일이야 질리도록 맡아왔으나, 장관이 된 건 처음.
그리고 호조의 장관에게는 일개 관원 이상의 책임과 역할이 부여되어 있었다.
더는 시키는 대로 하는 위치가 아니라, 현황과 흐름을 읽고 이를 분석하고 개선하며 대응하는 안목이 요구되는 것이다.
김육으로서는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전임 호조판서가 무능하지 않았던 관계로, 당장 그의 눈에 읽히는 호조의 현황과 조선의 경제는 이상적인 수준이었으니까.
더 손을 댈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불변하는 경제는 없다. 그것만은 김육이 확신했다.
천하는 변모한다. 요즘은 특히 그러했다. 호조가 해야 할 역할이 없을 리 없었다.
당장 눈에 밟히는 구석이 없다고 손을 놓아버린다면 호조는 정체할 따름이다.
그리고 낙후한 제도는 급변하는 현실에 발목만 잡으리라.
이런 꼴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는 게, 바로 호조판서의 역할이었다.
문제는 김육 자신의 안목 부족.
이에 대해 그가 선택한 타개책이 이것이었다.
“이 사람보다 경제에 더 깊숙이 몸을 담고서 식견을 높인 이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합니다.”
판서의 공손한 요청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이귀.
공公적으로는 병조참판을 맡고 있으나, 최근에는 겸참판이라는 비상설직으로 체임되어 사실상 물러난 상태였다.
이유는 다름 아닌 은행의 상임감사 업무 때문.
이는 김육이 이귀를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은행은 무수한 경제주체 중에서도, 국가에 비견될 정도로 아주 막강한 집단.
주조소는 단지 돈을 찍어내기만 할 따름이기에,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상평통보에 대한 장악력과 영향력은 온전히 은행이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은행 소속 이사들 또한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을 엄격하게 단속하는 상임감사의 위력과 영향력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김육으로서는 이어진 이귀의 말이 내숭으로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무얼 안다면 얼마나 안다고, 판서 대감께서 도움까지 구하십니까?”
다소 퉁명스럽게 들리는 대답.
말과는 달리 이귀의 서안에는 무수한 장부가 켜켜이 쌓이고 펼쳐져 있었다.
양식은 개성開城식 복식부기인 ‘송도松都 사개四介 치부법置簿法’.
사개四介란 네 가지가 맞물린다는 뜻으로, 각기 채권과 채무 그리고 입금과 입출을 의미한다.
전조前朝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개성상인들의 방식.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이다.
은행에서 운영하는 자금의 양은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막대하다. 일반적인 상단의 방식으로는 벅찰 수밖에 없으리라. 당연한 진보였다.
“크흠.”
이귀는 김육의 시선 닿는 데를 의식하고는, 막 펼쳐놓은 장부에 서표書標, 즉 책갈피를 끼워놓고서 덮었다.
김육의 눈에는 그마저도 놀라웠다.
서안에 놓인 장부마다 틈틈이 서표 끄트머리가 나와 있었는데, 각기 다른 색과 기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놀랍도록 치밀하구나. ……하기야, 무수한 장부를 한 데 두고 빈번히 대조해봐야 할 터이니 저렇게 표시해두지 않는다면 번거롭고 힘들 것이다.’
김육은 그새 하나를 배워가는 기분이었다.
호조에서도 장부 들출 일이야 많은데도, 저런 유용한 방식은 쓰지 않았으니까.
김육은 경외감을 느끼며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단순히 일신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호조의 판서에 올라, 과분한 성은을 입게 되었는데 국가의 대사에 무능으로 차질을 빚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대왕을 파시는 거외까?”
“성은에 부응하기 위해서이나, 오롯이 이를 위해서니 혹 뻔뻔하게 보인들 연연하겠습니까?”
절대로 대왕을 파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보인들 상관 않겠다.
말장난 같은 김육의 대답에 이귀가 짧게 탄식했다.
“하.”
“공公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한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본디 이귀가 은행의 상임감사를 겸하고 있다는 건, 한양 주민들은커녕 여타 관리들 또한 무신경했던 점이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뒤바뀐 계기가 있었다.
한 은행 이사가 공금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워낙 비밀스럽게 이루어져 여타 이사들조차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이귀가 유일하게 적발해낸 것이다.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 최초의 계기가 이사진의 정기회의였다.
그러나 이귀는 그답게, 얌전히 말로써 비리 이사의 죄과를 고발하지 않았다.
대신, 말 채찍을 가져와 다른 이사들 앞에서 비리 이사를 개 잡듯이 패버렸다.
그리고 혼수상태가 되어버린 비리 이사를 사비 들여 치료해주었으며, 그가 쾌차할 즈음 대로大路로 끌어내 다시 개 잡듯이 패버렸다.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나 이로써 이귀가 처벌되는 일은 없었다.
두 번째 폭행에서 회복한 이사가 또 대로로 끌려 나와, 세 번째로 도축되기 전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죄상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이귀는 미친개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과시했으며, 상임감사라는 역할을 조명받았다.
은행에서는 그 뒤로 비리가 일어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었다.
여타 이사들은 감지하지 못했던 비리를, 어떻게 이귀는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증명은 당장 이귀의 서안에 놓인 무수한 장부들로 증명할 수 있다.
그만큼 이귀는 은행의 자금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다.
강력한 경제주체인 은행에서 자금의 흐름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이겠는가?
그만큼 경제의 흐름도 보인다는 뜻이다.
“공公께서도 아시다시피 근래 아조는 격변하고 있습니다.”
“……꼭 근래만은 아니요.”
여전히 퉁명스러운 대답.
“예. 하지만 내실에 국한한다면 다르겠지요.”
서토西土의 개척에 이어, 최근에는 복이모사가 평정되었고 대마도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상인들은 바다 너머 서토에서, 복이모사에서, 대마도에서 진귀한 기물과 자원을 값싸게 수입해오고 있다.
반대로 바다 건너에서는, 환상이나 헛소문에 불과했던 조선의 부와 발전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다.
마포는 한 왜인의 난동으로 외국인의 출입이 엄금되었으나 여러 사람이 문간을 두드리는 중이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오랑캐 종자들이 말이다.
격동은 변경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경제의 발전으로 국내에서 여러 생로生路가 개척하자 향촌의 풍경도 일신一新했다.
여러 사람이 병작반수라는 착취적이고 낙후한 제도에서 탈피해 상공업商工業에 투신했다.
그리고 일부는 해외로, 국내로 떠돌이 신세를 자처했다.
또 일부는 터전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더는 농기구를 손에 쥐지 않았다.
대신 망치와 집게, 혹은 끌이나 대패를 잡았다.
공급이 많았으나 수요 또한 많았다. 국내를, 해외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상품을 대신 팔아주었으니까.
그리고 한산해진 농지農地 위에서 지주들은 더는 이전과 같은 폭거를 부리지 못했다.
사람이 귀해진 데 반하여, 이앙법의 도입으로 인력은 더 많이 요구되었으니까.
관아의 인가를 받기 위해 관개시설을 정비하거나 모내기 철 등 농번기가 그러했다.
이러한 인력 수요에는 날품팔이들을 고용하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날품팔이들은 일시적인 고용을 싼값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어차피 일손 필요한 곳이야 지천으로 널렸으니까.
더욱이 관개시설 정비나 모내기 등의 결과물은 날품팔이들의 생과는 연관이 없다.
어차피 이들은 삯만 받고 다른 일감을 찾아 떠날 따름이다. 비싼 삯을 주고도 결과물의 상태가 의심스러울 수 있었다.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면 농사꾼들이 제 일을 하도록 독려하는 것뿐이다.
물론, 농사꾼들이라고 마냥 싼 값에 부려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생로야 많았으니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면 다른 길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것이나 모내기철에 힘쓰는 건 농사의 일환이니 따로 삯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병작반수라는 착취적인 분배는 더는 받아줄 수 없었다.
그 결과, 절대적인 수가 줄어든 소작농들은 이전보다 적은 소작료에 더 많은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
그만큼 소작농 개개마다 돌아가는 부도 합리적으로 변했다.
세금 제도의 개선으로 이전처럼 방납업자가 기승을 부리는 일도 없어졌기에, 생계비용을 제하고 남은 잉여소득은 고스란히 소비로 이어졌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가구, 더 좋은 생활.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전에는 단지 먹고 살기에도 벅찼을 뿐.
이제는 아니었다.
여기에서 상공업자들이 다시 등장한다.
새롭고 다양해진 수요에 부응하는 것이 상공업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물꼬 트인 소시민의 생활이 다른 소시민의 생활에 물꼬를 트여주었다.
부의 선순환.
이상적인 경제 성장.
“세력과 세력이 맞붙어서 이기고 지는 건, 비단 아조만 아니라 동서고금에 그친 적이 없었던 항다반사恒茶飯事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이 오늘 같았던 적이야, 요순堯舜 시대를 찾은들 있겠습니까?”
김육은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답했다.
유학자들에게 있어 요순의 시대는 이상적인 낙원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김육이 보기에는 그런 이상사회마저 오늘날 팔도 같을 수는 없었다.
“이런 시기에는 선도와 뒷받침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날의 태평성대太平聖代는 자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대왕이 친히 제도를 정비하고, 도적과 수적을 처단하며, 탐욕하고 부정한 자들을 몰살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도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개선될 수 있었다.
뒷받침은, 그렇게 변모한 생활상에 어울리는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전과 비교할 데 없이 증대하고 다각화하는 상공업을 대상으로는 어떠한 기준으로, 어떻게 조세할 것인가?
호조에서는 이에 꾸준히 발맞춰왔으나, 변화는 계속된다. 진전을 멈춰서는 안 된다. 낙후한 제도는 부당함이 된다. 그러나, 방향성이 엇나가서는 안 되리라.
오직 적절한 뒷받침만이 이상적인 선도와 이상적인 변화에 걸맞은 이상적인 뒷받침이 될 수 있었다.
“변모하는 시대에 걸맞춰 이상적으로 선도하고, 이상적으로 뒷받침하는 것. 그것이 이 사람과 공公의 사명입니다.”
김육은 단언하고는 덧붙였다.
“호조판서인 이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지요.”
“……흐음.”
이귀는 쓰게 침음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귀찮다는 기색은 없었다.
그 역시 김육의 발언에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서안에는 무수한 장부들을 깔아놓았고, 매 번 대조하면서, 부정과 비리를 탐지해왔다.
은행의 이사나 직원 중 두 번째로 도축되고 싶은 인물은 없었으므로 이귀의 노고는 항상 같았다.
그것이 혹자에게는 일견 허무虛無로 비칠지도 모른다.
이귀 역시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게 없으므로 탈력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럼에도, 꾸준하게 심력을 들여 매번 같은 결과만을 보여주는 장부를 들춰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이귀에게는 상임감사의 역할이며, 이러한 중임을 신임하여 맡긴 대왕에게 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허무虛無한 결과는 비로소 증명證明이 된다.
자신이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흐음.”
이귀는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답했다.
“좋소이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사명을 공유하는 신세이니, 최대한 알려드리겠소.”
김육의 얼굴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