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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61화 (361/380)

인조, 명군이 되다 361화

최언순崔彦恂.

그는 전왕 시절 호성공신扈聖功臣 삼등에도 책봉되었던, 유능하고도 충성스러운 내시였다.

이러한 이력이 있었기에 최언순은 광해군이 축출되고도 궁궐에 남겨져, 내시부 장관인 상선尙膳을 맡게 됐다.

날벼락 같은 일이긴 했다.

고작 하룻밤 새 모셔야 할 주인이 바뀌었으니까.

조금 편찮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전왕에게 충성했던 본인이었으니까. 광해군의 대외적인 평가야 어떻건, 어쨌거나 광해군은 세자로서 정당하게 전왕의 보위를 승계했다.

그러한 광해군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대신 보위를 차지한 건, 결국 객관적으로는 찬탈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언순은 사심은 차치해두고 새로운 주인에게 충성했다.

대비大妃가 광해군의 폐출을 공인하고 새로운 왕의 즉위를 승인했으니까.

이는 왕실의 큰어른인 대비에게 부여된 정당한 권한이었다.

보통, 이러한 권한이 사용되는 건 무력을 소유한 찬탈자들의 강압에 의해 강요된다는 맹점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광해군의 폐출과 새로운 왕의 즉위는 절차적으로 정당했다.

대비 역시,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기꺼운 마음으로 이를 수행했다.

대비가 전왕의 아들을 생산한 이후 광해군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나 다름없던 사이였다.

이래서야 최언순도 별수 없다.

내시라면 다만 왕을 따를 따름.

그래서 최언순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이행했다.

막상, 어렴풋한 첫인상을 밀어내고 새로운 왕에게 충성해보니 이 새로운 주인은 최언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주인이었다.

이 새로운 주인은 쉬이 업신여겨지는 궁인宮人들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최언순에게는 지극히 생경한 경험이었던지라 처음에는 외려 부담스럽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뿐인가.

새로운 왕은 차마 광해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했다.

그리고 철저했다.

감히 군주의 권위에 맞서오는 반정공신들을 압도하고, 왕실을 좌지우지하려는 대비를 조련했으며, 잠재적인 반란 분자는 제거했다.

주변을 평탄화해 버린 왕의 힘은 궁궐과 한양 너머에도 뻗쳤다.

가도에 상주해 있던 해적들을 멸살해 버렸으며, 이전부터 파죽지세 예기를 드높이던 금나라를 안팎으로 요리해 버리고 분쇄해 버렸다.

과연, 광해군이었다면 이 모든 난관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최언순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조선에 있어서는 최선이자, 오히려 과분한 복록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최언순은 시인해야만 했다.

내시 이전에 한 사람 조선의 백성이자 신하로서 대왕을 모시는 것이, 더 없을 영광이자 과분한 은혜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최언순은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해 부응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심지를 굳게 먹더라도 낡고 비루한 몸뚱이가 세월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려 임진년 왜란 시절부터 왕을 모셔온 최언순이었다.

그로부터 족히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전왕을 업고 내달렸던 창창한 육신도, 이제는 비루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정하지 못할 쇠퇴의 증거.

최언순은 자신의 존재가 내시부의 역할 수행에 외려 짐만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실, 최언순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한계를 체감해왔다.

대왕을 모시는 과분한 은혜와 명예를 차마 포기할 수 없었기에 억지에 억지를 거듭해왔을 뿐.

그러다 이제는 자신을 더 속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따름이었다.

그랬기에 최언순은 끝까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사직을 청했다.

대왕은 답했다.

-근래 들어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거나 사직을 청하니, 세월의 흐름이 요즘 들어 무척 원망스럽습니다.

최언순 또한 그러했다.

그는 대왕이 자신의 사직을 원치 않음을 들어, 마음을 돌리고픈 충동도 불쑥 일었다.

그러나 사직을 청하게 된 건 거듭된 현실의 자각 끝에 내린 결심이었다.

최언순은 침묵으로서 자신의 충동과 맞섰다.

대왕은 덧붙였다.

-상선이 사직을 청한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셨겠지요. 붙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염치상 차마 말리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최언순은 차마 붙잡지 못하겠다는, 대왕의 말에 기뻐야 할지 슬퍼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두 감정이 모두 공존했다.

왕은 분위기를 바꾸고서 물었다.

-은행장이 되실 겁니까?

은행 이사진에는 두 가지 계파가 있었다.

하나는 내시부의 은퇴자들.

다른 하나는 내명부의 은퇴자들이다.

이들 궁인宮人들은 오랜 봉사 끝에 적지 않은 연배에 이르러서 대왕을 시종하고 궁궐을 숙위하기에는 더는 신체적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의 조직에서 정점에 다다른 이들의 두뇌만은 신체와 달리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내시부와 내명부 은퇴자 중 적잖은 수가 축적해둔 자산을 불려서 인생사의 금빛 황혼기를 맞이했다.

은행의 이사진은 그들 중에서도 특히 정예인 자들을 영입해 만들어진 자들.

오히려 그렇기에, 경쟁은 궁궐 조직에 몸담았을 때부터 더욱 치열했다.

각자 시장에 정보원을 뿌려 동향을 파악하고, 서로에게는 간자를 침투시켜 감시하였으며, 휘하 직원을 매수해 타 부서의 장부마저 들춰보곤 했으니까.

공작은 음지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이사들은 각자가 경제의 큰손이었으므로 투자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굴리는 상단이 한둘씩은 있었는데, 양지에서는 이러한 상단들을 통해 맞붙었다.

내시부 출신 이사진들이 자본을 모아 신형 선박을 건조하려 들면, 내명부 출신 이사진들은 선박용 목재를 먼저 매점해 버리는 식이다.

경쟁이 이처럼 치열했으니 암수와 간계가 난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의 결과는, 고위직을 누가 차지하느냐로 증명된다.

은행장은 그중에서도 정점.

여러 부서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은행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만큼, 조직 내부는 물론이고 경제 전체에도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만약 상임감사와 왕이라는 실소유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은행장은 무소불위의 금력金力을 휘두를 수 있었으리라.

최언순은 그러한 은행장 자리에 내정되어 있었다.

그는, 은행의 실소유주이기도 한 대왕을 즉위 이래 지금까지 쭉 상선으로서 수행해 왔으니까.

여기에 내시부 출신 이사진들의 지지가 더해지니, 시쳇말로 ‘떼놓은 당상’인 셈이다.

산중의 늙은 호랑이들처럼 사납고 매서운 내명부 출신 이사들이라 할지라도 별수 없는 것이다.

기실, 그들 또한 최언순의 은행장 취임을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기도 했고.

최언순 역시 기꺼이 은행장이 될 생각이었다.

내수사를 통해 길러온 자신의 안목과 실력이라면, 은행장을 맡더라도 대왕의 행보에 최소한 방해는 되지 않을 테니까.

……몇 년 전까지는 말이다.

최언순은 답했다.

-아뢰옵기 무척 송구하오나, 신은 이미 너무 늙어 은행장과 같은 중임은 맡지 못하옵니다.

대왕의 곁을 지키고자 자신의 한계를 몇 번이나 시험하고, 또 부정해온 최언순이다.

그마저도 한계에 부닥쳐 불가피하게 사직을 청한 지금, 은행장이라는 중임을 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왕은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그가 최언순을 차기 은행장으로서 내정해두었던 건 은퇴 후 장밋빛 황혼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평안감사도 저 싫다면 그만.

억지로 중임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이후의 행보가 조금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유유자적 지내고자 하십니까?

왕의 물음에 최언순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여생을 마냥 조용히 보내고 싶지는 않은지라, 소일거리를 하나 할까 하옵니다.

-무엇입니까?

-과자점果子店이옵니다.

왕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전례 없는 사업을 하시는군요.

과자는 무척 사치스러운 음식이다.

개중에 과일이나 꿀, 기름 등 값비싼 원료가 들어가는 종류도 많았으니까.

어지간한 양민이라면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

기껏 해봐야, 부잣집이 제사를 지낸다고 제수용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한 입 해보는 정도일까.

한, 10년 전까지는 말이다.

근래 들어서는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크게 증진됐다.

그렇다고, 만백성이 간식 삼아 수시로 과자를 씹고 다닐 정도는 아니지만 길일吉日에 욕심 내볼 정도는 되리라.

본디 부유했던 반가들이나 새롭게 성장한 상인들이라면 더더욱 쉽게 욕심 내볼 수 있으리라.

왕이 기껍게 말했다.

-상선 덕분에 백성들의 즐거움이 하나 생기겠습니다.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옵니다.

-한데, 하필이면 과자점인 이유가 있습니까?

왕의 물음에 최언순은 늙은 얼굴에 약간 부끄러움을 띠고서 답했다.

-전하를 모시면서 많은 과자를 다루었고, 또 과분히 하사를 거듭 받았으니 노신이 은퇴하게 되면 필경 과자가 그리워질 것이옵니다.

먹어대기도 잔뜩 먹어대었다.

왕의 처소에 과자를 들일 때마다 먼저 기미하는 게 자신이었으니까.

더욱이 왕은 방문자와 궁인들에게도 후하게 과자를 베풀었다. 때로는 상자째 내리기도 했다.

그만큼 최언순이 과자를 기미하는 일도 잦았다.

언제, 어떤 종류의 과자를 맛볼지 모른다는 점은 정적인 상선의 업무 와중 단비와도 같았다.

그리고 유능한 대령숙수들이 왕에게 진상하고자 정성껏 만들어, 입에 넣으면 여지없이 달큼하고 사르르 녹는 과자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중독적이었다.

과자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재미.

최상품의 원재료와 수시로 과자를 만드느라 단련된 대령숙수들이 보장하는 맛.

과연 궐을 나선다고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최언순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고민해봐도 그건 불가능했다.

고작 사흘도 안 되어 과자를 찾으러 범궐犯闕하리라는 것이 본인의 냉정한 분석이었다.

-그래서 직접 만들어보시려는 것이로군요.

-예. 당장은 실력이 미천하나, 안면 있는 대령숙수待令熟手들이 있으니 배워보고자 하옵니다.

자급자족으로만 끝내지 않고 과자점까지 열겠다는 건, 여타 백성들과도 기쁨을 공유하기 위함일까.

왕이 답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개업하게 되면, 꼭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망극하옵나이다.

* * *

‘……분명 그랬는데.’

은퇴한 최언순은 자신의 각오와는 다른 난관을 맞이했다.

그는 처소까지 찾아와 은행장 취임을 종용하는 이사들을 물리치면서, 본격적으로 과자 만드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당연한 절차다.

과자는 만들고 싶은데, 방법을 모른다면, 응당 배워야지 않겠는가?

단지 최언순이 생각했던 배움과는 다른 배움이 시작했을 따름이다.

“과자란, 본디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생과生果를 계절에 의해 구할 수 없을 때 대체하기 위한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과실을 흉내냈다 하여서 과자를 조과造菓라고…….”

기껏 대령숙수를 청해 자리를 만들었는데 과자 만드는 법은 가르치지 않고, 과자가 무엇인지나 가르치고 있었다.

‘이게 맞나?’

최언순은 이어지는 교육을 견디다 못해 물었다.

“그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이것이 과자를 만드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대령숙수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대감!”

“……왜?”

“과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진정으로 ‘과자’를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자가 무엇인지는 이 사람이 이미 알지.”

대수롭지도 않다는 투의 대답에, 대령숙수가 부르르 떠는 듯이 고개를 저어댔다.

그리고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과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특정 과자만 만드는 법을 배워 따르는 건 진정 ‘과자’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럼…….”

“기껏 해봐야, 외워둔 절차를 반복하는 것뿐이지요! 또한, 언제까지고 그런 흉내만 낼 수 있을 따름입니다!”

대령숙수가 자신의 철학을 강하게 관철하자 최언순은 조금 질린 얼굴로 어물거렸다.

“그, 그런가……?”

“경전도 그렇지 않습니까? 글줄만 외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체득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선비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그렇지.”

“과자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외워둔 절차만 따라서 행동하는 게 진정으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겠군.”

납득했다기보다는, 질려서 수긍했다는 쪽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령숙수는 여전히 들뜬 얼굴로 말했다.

“좋습니다. 대감께서 이해하셨다니 마저 강의를 이어가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가르쳐드릴 과자는 다식茶食입니다. 다식은 이름 그대로 차茶와 함께 먹는다食는 뜻으로…….”

기에서 밀려 얌전히 경청할 수밖에 없었던 최언순은,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교육을 철저하게 받으면 내시로 은퇴해놓고 대령숙수가 되어서 다시 궐에 들어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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