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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62화 (362/380)

인조, 명군이 되다 362화

최언순은 탄식과 함께 뭉개진 다식茶食을 내려놓았다.

그가 배운바 다식은 이름 그대로 차茶를 마실 때 곁들이는 간식食이다.

차가 뜨겁고 텁텁한 음료인 만큼, 고소한 곡물가루에다 꿀을 부어 빚어낸 다식과의 궁합은 그야말로 최강.

특유의 질감과 단맛이 대조적인 차와 무척 잘 어울리는 덕이다.

만드는 방법도 단순했다.

상기한 대로 곡물가루에 꿀을 부어 빚어낸다.

단지 그것이 전부.

재료만 있으면 차를 우리는 잠깐 사이에도 만들 수 있기에, 다식은 다도茶道 문화가 융성했던 고려 시대에 특히 각광받았다.

단순한 제조법에 확실한 정체성, 그리고 보편성까지.

나아가 유사한 종목인 숙실과熟實果 만드는 방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발전성까지 있다.

대령숙수가 최언순에게 처음으로 가르친 과자가 다식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주 기초 중에서도 기초인 것이다.

그러나 평생 과자를 손에 댈 일이라곤 먹을 때뿐이 없었던 최언순에게는 이마저도 벅찼다.

“자꾸 뭉개지는데…….”

가루를 꿀로 뭉쳐 만든 과자다.

모양을 내는 틀에서 분리할 때 조금만 세게 건드려도 뭉개진다.

“살살 집으셔야 합니다.”

대령숙수가 참견했다.

“살살 집어도 뭉개진다니까?”

“살살. 집으셔야 합니다.”

“아니, 살살 집어도 뭉개진다니까?!”

최언순이 성난 얼굴로 자신의 얼굴처럼 찌그러진 다식을 내려놓자, 대령숙수는 굳은 얼굴로 단어 하나를 강조해 말했다.

“대감께서는 지금 전혀, ‘살살’ 하고 있지 않으십니다.”

“이런 제기랄!”

최언순은 그놈의 ‘살살’이라는 게 자신이 아는 살살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게 맞는지 의문마저 들었다.

“그냥 다시 모양을 고치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왜!”

“이건 입에 들어갈 과자를 만드는 과정이지, 음식 재료를 가지고 장난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령숙수의 완고한 철학에 최언순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미 손으로 건드린 것, 몇 번 더 건드린다고 못 먹을 거라도 되나?”

“그런 허술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으니, 나중에는 음식을 장난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썅.”

“대감.”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

최언순은 일갈과 함께 다시 틀을 반죽으로 채웠다.

그리고 틀을 분리한 뒤, 남은 틀에 딱 달라붙은 다식을 분리해냈다.

“오.”

“흠.”

두 사람이 저마다 작게 감탄했다. 이번에는 다식을 뭉개지 않고 분리해 낸 것이다.

깐깐했던 대령숙수마저 제법 마음에 든 것인지, 그도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접시에 얹어놓기만 하면…….”

“악!”

최언순이 일순 비명을 내질렀다.

겉으로 다가온 노복을 뒤늦게 인식했다가, 그만 다식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모서리부터 흙바닥에 처박힌 다식은 형상이 완전히 뭉개져버렸다.

흙바닥에 떨어뜨린 것 자체가 이미 대참사였지만.

이번 것은 최언순이 대령숙수의 타박 끝에 어렵사리 완성해 낸 완벽한 표본이었다.

“멍청한 놈!”

최언순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외쳤다.

노복은, 제가 더 놀라서 황급히 허리 숙였다.

“송구합니다요! 손님이 찾아온 걸 알려드리느라…….”

“손님?”

최언순은 자문했다가 금세 손님의 정체를 깨닫고는 질린 얼굴로 탄식했다.

“아. 그놈들.”

최언순의 은행장 취임을 종용하는 이사들이다.

당사자의 의사와는 별개로, 자신을 우세의 증거로 삼고자 하는 이들.

“바쁘다고 해! 나는 지금 일생의 역작을 만드는 중이란 말이다!”

최언순이 다시 틀로 시선을 옮기자, 노복 역시 슬쩍 다식 반죽과 틀을 흘겼다.

딱히 일생의 역작이라기엔 대단치 않은 것들.

“뭣 하나?”

최언순이 큰 목소리로 다그치자, 노복이 그제야 허둥지둥 바쁜 척 문간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불청객들은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문간의 노복이 저들을 세워두기만 하고서 입장이 지체되자, 아랫사람을 시켜 담을 넘게 한 것.

그리고 뻔뻔하게 안에서부터 빗장을 열어 마당으로 들어서니, 노복이 황당한 얼굴로 물러났다.

“주, 주인어른.”

“뭐냐?”

최언순은 타박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어느새 문간을 넘어온 불청객들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다식 반죽이 여전히 붙어 있는 틀을 움켜쥐었다.

“대감.”

선두의 불청객이 과장되게 난처한 얼굴로 인사했다

그는 수 년 전 최언순보다 앞서 내시부를 은퇴했던 자로, 제법 수에 밝아 내수사의 경영에도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다시 뵙습니다.”

“이 사람은 자넬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최언순은 퉁명스럽게 옛 부하를 마주하고는, 함께 온 일행들도 둘러보았다.

다들 잘 먹고 잘산다는 게 낯짝과 의복에서 드러났다.

반질반질한 게 최상급 말 꼬리털로 엮은 게 분명한 갓, 호박과 옥 등 보석으로 치장한 갓끈.

허리춤에는 매끈한 상아에 금으로 이름을 상감해놓은 호패를 걸어놓았고, 윤이 나는 도포 밑단에는 커다란 자수 무늬까지 새겨놓았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썩어나는 부를 과시하는 형상들이다.

관리들이 은행 이사들을 돈벌레라 멸시하는 건, 비단 압도적인 부를 향한 질시만은 아니리라.

이사들 딴에는 억만금을 달성하여도 다신 회복하지 못할 남성성과, 이에 대한 증거로서 감추지 못할 수염의 부재를 대신해 부를 과시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불쌍한 놈들이지.’

최언순이 일행을 향해 딱한 시선을 보내자 선두의 이사가 말했다.

“다시 아뢰는 바이지만, 저희는 대감께서 궐을 나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상의도 없이 은행장직을 마다하시다니요?”

“옛말에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지.”

“평안감사야 저희도 마다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은행장직까지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하겠습니다.”

최언순의 뚱한 시선에 이사가 거듭 말했다.

“대감께서는 억만금億萬金을 부리고, 또 누리실 수 있으십니다. 금과 은으로 저택을 세우고도 남을 수 있는데 어찌하여…….”

이사는 최언순에 들린 틀과 그 너머 놓인 다식 반죽, 재료들을 훑고는 덧붙였다.

“그런 하찮은 잡기雜技를 익히십니까?”

그 순간이었다.

누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최언순이 틀을 던졌다.

이사는 화들짝 놀라 팔을 들었다. 퍽!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사는 곧장 팔을 감싼 채 휘청거렸다.

“어, 어억!”

“이 멍청하고 한심한 놈들. 내가 그깟 푼돈벌이나 할 여력이 있으면 애초에 궐을 나서지도 않았다!”

최언순은 울컥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이사의 발언이 유난히 모욕적으로 들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과자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게 비단 과자를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은퇴로 인하여 궐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자신이다.

왕은 언제고 방문하여도 좋다고 했지만, 내시부에서 상선까지 지낸 자신이 그저 추억에나 젖자고 바쁜 궐을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본인 역시 알고 있기 때문에 궐과 인연이 끊어진 데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과자를 만드는 건 비단 과자만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건 자신의 한평생이라 할 수 있는, 궐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바쁜 궐을 찾아가는 건 못 할 짓이지만, 과자를 만들면서 호시절을 회상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건 단순한 잡기가 아니었다.

황금기의 연장선이다.

자신의 사명으로서 대왕의 성업을 보필하던 그 순간의, 절대 짧지 않은 생애의.

이제 몸은 쫓아가지 못해도 마음만은 여전히 쫓아가고 싶다.

이건 그 아쉬움의 증거이자, 해소였다.

“꺼져!”

최언순은 틀의 나머지 반쪽을 들고서 외쳤다.

“꺼져라, 이 돈벌레 자식들아! 네놈들 다져서 다식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위협적인 선언에 이사와 일행들이 퉁방울 같은 눈을 하고서 흠칫 물러났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면서 뒷걸음을 치다가, 이내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듯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대문을 넘어 사라졌다.

“……후우.”

최언순은 진과 함께 자신의 체력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틀의 남은 절반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서, 돈벌레 이사에게 던져버린 틀을 주웠다.

주변에는 틀에 붙어 있던 다식들이 이리저리 뿌려져 있었다.

꽃무늬에, 각종 재료로 색을 낸 다식들.

“허.”

보기에는 좋은 광경이었다. 마치 마당에 꽃이 핀 듯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귀한 먹을 것을.”

최언순은 떨어진 다식 하나를 주웠다. 세심한 손길에, 다식은 뭉개지지 않았다.

* * *

최언순의 처소에서 멀지 않은, 어느 한 저택.

바깥의 소란을 알아보고 온 노복이 주인에게 보고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요. 그냥, 은행 이사들이 싫다는 데도 또 찾아갔다 합니다요.”

“소란이 작지 않던데 최 대감이 아직 정정한 모양이군.”

집주인, 장만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평했다.

그가 백두산 생활에 지쳐 완전히 낙향한 지도 꽤 되었다.

몇 번 전쟁을 지휘하면서, 비록 문관 출신일지언정 일신의 무용도 옅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그래도 백두산은 선을 넘었다.

어디 동네 야산도 아니고.

정상의 대택大澤과 그 북쪽의 달문?門을 통해 흐르는 비룡폭포飛龍瀑布의 원경은 분명 장관이었다.

그러나 살에는 추위에 표범과 호랑이를 이웃 삼아 늙은이 관절까지 혹사해야 할 정도로 두고두고 봐야 할 장관은 아니었다.

그 인세人世 아닌 듯한 풍경을 계속 눈에 담으려다 간 진짜로 인세를 떠나게 될 테니까.

그래서 장만은 은퇴했다.

“나중에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다. 상선까지 지낸 사람이니 이야깃거리가 많겠지.”

말년에 이르러서는 썰을 풀고 듣는 것을 낙으로 삼은 장만이었다.

“지필묵을 대령할까요?”

“그래라. 연적에 물도 좀 채워오고.”

“예.”

노복이 꾸벅 예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장만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몇 조각이 느긋하게 흘러갔다.

“둘째 왕자군 대감께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려나…….”

장만은 제가 더는 시종할 수 없는 봉림대군의 기억 속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히도 알아서 잘 살아갈 분이었다.

* * *

퉁!

파공음과 함께 화살 하나가 날았다.

촉의 날카로운 끝은, 호박처럼 작고 노란 호랑이의 안구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크허어엉!

나무둥치를 붙잡은 채 기어오르던 호랑이가 울음과 함께 추락했다.

놈은 사람 손바닥보다 큰 앞발을 버르적거리며, 힘없이 잡초와 낙엽들을 헤쳤다.

그 위로 봉림대군이 추락했다.

환도의 칼끝이 정확히 호랑이의 목을 찔렀다. 체중에 힘입어, 거의 코등이까지 박혀들었다.

눈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 있던 호랑이다. 그러나 이 일격까지 견디지는 못했다.

거대한 몸뚱이가 켁, 하고 거칠게 피 한 번 토해내더니 그대로 잠잠해졌다.

봉림대군이 환도를 당겼다.

죽은 호랑이의 몸뚱이는 제 깊숙이 박힌 칼날을 쉬이 놓아주지 않았으나, 봉림대군의 손길에 칼날은 끝내 한 줄기 피와 함께 뽑혀 나왔다.

“후.”

봉림대군은 묵은 숨을 토해냈다.

“이놈의 호랑이들.”

지리산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疊疊山中이었다. 백두산과 마찬가지로, 발에 채는 게 호랑이고 표범이었다.

보통 이놈들은 산에서 잘 내려오려 하지 않지만, 늙거나 다쳐 산중의 동물을 사냥하기 어려워지면 쉬이 생사람을 노리고는 했다.

봉림대군이 막 처치한 놈이 그러했다.

푸석한 털과 즐비한 상처 자국들, 부러진 엄니.

늙어서 싸움 끝에 도태된 놈이었고, 일대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명성을 쌓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는 그 명성에도 방점을 찍었지만.

“……아버지께 바칠 품급은 아니로군.”

늙고 다친 놈인 만큼 가죽의 질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호랑이 가죽과 뼈는 품급과 무관하게 언제나 수요가 있다.

봉림대군은 주변을 살펴 위치를 기억해두고는, 환도를 고쳐 쥐고서 호랑이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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