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63화
“대감!”
염소수염의 사내가 기겁하며 외쳤다.
그의 역할은, 지리산 비처에 놓인 장서각藏書閣을 수호하고 도서들을 관리하는 것.
그리고 봉림대군에게 처소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또 호랑이 사냥을 나가셨습니까?!”
“예. 인근의 주민들을 못살게 구는 놈이 있어, 아주 혼쭐을 내주었습니다.”
“혼쭐을 낸 것이 아니라, 아주 저승으로 보내주셨겠지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
봉림대군은 호방하게 웃었다.
건장한 사내가 피칠갑을 한 채로 껄껄 웃어대는 모습은, 혹자가 본다면 기겁부터 할 꼴이었다.
그러나 장서각지기에게는 그저 골치만 아픈 광경일 뿐.
“호랑이는 사냥꾼들에게 맡기시지, 어찌하여 존체를 돌보지 않으시고 매번 직접 손을 쓰십니까?”
장서각지기의 걱정에 봉림대군은 태연히 답했다.
“어지간한 사냥꾼들보다야, 내가 훨씬 더 호랑이를 잘 잡으니 어쩌겠습니까. 직접 나서야지요.”
그건 사실이었다.
산포수山砲手들이 소식을 듣고 채 나서기도 전에 먼저 손을 써버렸으니까.
백두산에서도 정상의 대택大澤을 끼고 살았던 봉림대군이다.
수시로 호랑이와 표범이 주변을 얼씬거렸고, 이놈들은 사람과는 달리 이웃이나 알아보자고 얼씬거리는 게 아니었다.
혹, 무리에서 낙오하거나 습격하기 좋은 약한 개체는 없는지 정탐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림대군은 맹수들에게 단호히 대처했다.
처음에는 쉬이 빗맞히던 화살이 점차 몸을 맞추게 되었고, 몸을 거듭 맞추다 보니 급소도 맞추게 되었다.
오늘날 봉림대군의 사냥 실력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호랑이와 표범을 상대로 수백 번이나 활시위를 당기다 보니, 놈들의 행동거지와 습성이 제 손바닥 보듯이 읽히게 된 것이다.
아무리 생업으로 맹수 사냥을 하며 단련된 산포수山砲手라도 자신만 하랴.
산포수들이 생업이라면, 이쪽은 생존이다.
“그리고 시일이 지체되면 호랑이가 또 사람을 노릴 수 있으니, 곧장 손 쓸 수 있는 사람이 손을 썼을 뿐입니다.”
“그, 그러다가 횡액이라도 맞으신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장서각지기는 사색이 되어 우려했으나, 봉림대군은 농이라도 된다는 양 태평한 얼굴로 답했다.
“안 죽습니다, 안 죽어.”
여러 사내를 죽음으로 몰고 간 마법의 주문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얼마나 많은 사내가 ‘안 죽는다’는 주문과 함께 기행을 일삼다가, 그만 절명하고 말았던가?
그러나, 이 마법의 주문조차 봉림대군을 거꾸러뜨리지는 못했다.
봉림대군이 죽지 않는다며 맹수 사냥에 임한 횟수만 합해도 백 번은 될 테니까.
과연 봉림대군은 죽지 않는 것이다.
“보통은 호랑이가 죽지요.”
봉림대군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품에서 누런 덩어리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것을 장서각지기가 품으로 받아서 보니, 호랑이 엄니였다.
“이건?”
“잘 보관해 두고 있다가 인편이 닿을 때 전해주세요. 인평대군에게 보내는 겁니다.”
“……인평대군에게 말입니까?”
“예. 요즘 막내가 연구 탓에 골치를 썩인다지 않겠습니까.”
호랑이 뼈에는 미신적인 효험도 있었다. 잘 때 머리맡에 두면, 악몽이 달아난다는 것이다.
“꿈자리 문제가 아닌 건 알지만, 이렇게라도 미력하게나마 응원한다는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장서각지기는 누런 호랑이 엄니를 힐끗 보았다.
심약한 그는 엄니만 보아도 호랑이의 성난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듯해 금세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에는 들어가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피딱지가 온 바닥에 뿌려지니까.
“씻을 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언제나 신세만 집니다.”
“아시면 존체를 조금만 신경 써주십시오.”
장서각지기는 툴툴거리며, 한 손에 엄니를 쥔 채 안쪽으로 향했다.
* * *
“야.”
“음?”
형의 부름에 인평대군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역시나, 세자였다.
“무슨 일인데.”
왕위 계승권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아니었으나, 세자는 개의치 않았다.
인평대군이 일주일쯤 뙤약볕에서 방치된 고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자신의 체형에 맞춰 의자와 함께 수제작한 서안에도, 경사진 상판上板 위로 종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무수한 도면과 기호들. 단순화된 숫자들.
그래서인지 인평대군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쓰지 않았다.
수시로 기록하고 작성하는 일이 많은 만큼, 일일이 먹을 갈고 붓을 놀리며 물기가 마를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으니까.
대신 인평대군은 쪼갠 나뭇가지에다 길게 연마한 흑연을 끼워 넣어 만든 자신만의 필기도구를 사용했다.
인평대군과 함께 일하는 일부 관상감원이 몇 자루 받아가고는 했지만, 그다지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
손에 익지 않은 사람이 쓰면 심이 쉬이 부러져서, 되려 번거로이 문방사우를 갖추느니만 못하다던가.
세자는 잡념을 차치하고서 일렀다.
“오다 주웠다.”
“뭔데.”
세자가 뒷짐으로 숨겨둔 물건을 서안에 올렸다.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휘어진 노란 덩어리가 나타났다.
인평대군은 확인차 들어서 살펴보고는 금세 말했다.
“호랑이 엄니잖아?”
“그래.”
“서궐에 호랑이가 나타나기라도 했어? 갑자기 호랑이 엄니라니.”
“봉림대군이 너 주라더라.”
“……아.”
인평대군은 자신이 봉림대군에게 보낸 서찰을 떠올리고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둘째 형의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이걸로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그게 꼭 용도가 있어야 해? 봉림대군이 너를 응원한다는 증거인데.”
“음.”
“잘 보이는 데 두기만 해도 기운이 날 거 아니야?”
“……그건 그래.”
인평대군은 엄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에 켜켜이 세워둔 책장 빈자리에 엄니를 얹었다.
“흐음. 잘 보이게 세워두려면 전용 받침대가 필요하겠는데.”
인평대군은 다시 쓰러진 엄니를 가져와 서안에 올렸다.
그리고 빈 종이에 대고 형상을 따라 그리려다가, 세자의 존재를 새삼 깨우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동생과 눈이 마주친 세자가 놀랍다는 얼굴로 말했다.
“직접 만들려고? 손재주 좋은데.”
칭찬이 민망했던 것일까.
인평대군이 얼굴을 붉히면서 중얼거렸다.
“……어지간한 건 내가 직접 만드는 게 빠르고 정확하니까.”
“이 정도 손재주라면 분명 큰일에도 쓸 수 있을걸?”
인평대군은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가 골치만 아픈 일에 휘말려서 낭패만 보라고? 절대로 안 돼.”
“이 형님을 못 믿겠다는 거야?”
“……형은 믿을 ‘수도’ 있지. 그런데 신하들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고.”
“지금 관리들은 그다지 문제 일으키길 좋아하지는 않는데.”
“당장이야 그렇지……. 아바마마께서 계시니까. 눈밖에 나면 뼈에서 살이 분리되는데 소란을 피울 수 있겠어?”
실제로 그러한 형벌이 집행되는 건 아니다.
다만 어심을 거스른 이들이 맞이한 최후는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은 필요하다면 사도邪道일지라도 거리낌 없이 취했다.
어심을 시험한 이괄과 김자점, 흥안군 따위가 차도살인에 이용되고 토사구팽까지 당한 일이야, 원숙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바.
설사 그들과는 다르게, 정당한 방법을 통해 어심을 시험하더라도 왕의 진노를 피하지는 못한다.
과거, 2차 의주대첩이 압승으로 귀결한 후 여러 신하와 사대부들이 입을 모아서 요동 정벌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그들이 어떻게 되었던가?
직접 정벌하라며 부왕에 의해 요동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들은 몇 년이나, 요동의 한 자락인 여문呂門에 발이 묶인 채 호전적이고 굶주린 현지 도적들과 다퉈야만 했다.
꼬우면 네가 뛰라는 식이었고, 왕에게는 그걸 강요할 힘이 있었다.
아무튼 눈밖에 나면 음양 양면의 수단을 가리지 않고 호되게 되돌려주니, 감히 어심을 능멸하는 일이야 뼈에서 살이 분리될 정도의 난폭한 죽음을 희망하는 이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오죽하면 그 천하의 이귀조차 고분고분 왕을 따르겠는가.
“형도 그럴 수 있겠어?”
“나는…… 음.”
세자가 쓰게 침음했다.
그 역시 부왕의 방식은 잘 배워 알고 있었으나, 서슴없이 취하기엔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못된 마음을 품고서 너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할 거다. 이것만은 내가 이름을 걸고서 약속할 수 있어.”
“……생각해볼게.”
보통 생각해본다는 대답은 80%쯤 거부와 같았지만, 세자도 마냥 강요할 수는 없었다.
역사에 형제간의 우애를 상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별개로 말이다.
이건 자신이 행동으로서 증명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신용을 주어야만, 동생을 부려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아무튼.”
세자가 화제를 돌렸다.
“뭐가 너를 그렇게 괴롭히는 중이야?”
“오성정렬.”
“……?”
“말 그대로 오성五星이 정렬한다는 뜻이야. 밤하늘에. 아주 장관이 펼쳐질 예정이라고.”
“그러면 경사 아니야?”
“보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경사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순간을 기록하려는 사람에게는 더한 고통이 없다고.”
인평대군이 개발한 필기도구는, 비록 손에 맞지 않는 이에게는 까다로울지언정 세밀한 묘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인평대군은 밤하늘의 오성五星과 여타 천체들을 관측하면서 형상을 기록했다. 만리경의 성능이 워낙 좋은 덕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는 법.
인평대군은 천체의 찬란한 모습을 많은 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수제작한 필기도구만으로는 묘사에 한계가 있었다.
이는 단지 자신의 손재주가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보이는 것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기술이 부재하기 때문인가.
길게 두고 느긋하게 고민해본다면 어떤 식으로든 나쁘지 않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성의 정렬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본디 오성의 공전 주기는 저마다 제각각.
정렬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기적이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또 이를 포착할 기회를 맞을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인평대군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필요해……. 하지만 어느 쪽이건 나로서는 촉박하다고.”
“그게 뭔데? 이 형님에게 말해 봐. 나도 수배해 볼 테니까.”
“음…….”
인평대군은 그다지 기대감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나는 감광물질이야.”
“응?”
“빛에 빠르게 반응하는 물질이 필요해. 적어도 몇 시간 안에 말이야.”
인평대군은 서안에 놓인 여러 문서를 뒤지다가, 설계도 하나를 꺼내 펼쳤다.
“만리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할 때처럼 암실暗室을 만들고, 외부와 통하는 바늘구멍을 만들어서 감광물질을 바른 벽면에 상을 조사하는 거야.”
이렇게 암실을 통해 상을 조사하는 건 수천 년 전에도 행해졌다.
이러면 일식日蝕을 안전하게 관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회화를 그릴 때 참고가 되기도 했기 때문.
이렇게 바늘구멍을 통해 비친 상은 반전되어 보인다는 점 또한, 당연히 밝혀진 상태였다.
인평대군은 이러한 암실을 통해 외부 조명을 차단하고, 바늘구멍을 통해서만 조사되는 상을 기록하고자 했다.
“밤하늘을?”
“응.”
“그런데, 밤하늘은 계속 움직이잖아.”
세자가 지적하자 인평대군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밤하늘의 운행에 맞춰 암실을 회전시킬 필요도 있지. 거기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설계가 되어 있다는 거지만…….”
인평대군이 덧붙였다.
“중요한 건 감광물질이야. 이게 없으면 모든 설계가 무의미해.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거고.”
“음…….”
세자는 쓰게 침음했다.
감광물질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단어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수 시간 빛의 노출에 의해 변화하는 물질이라?
본인의 학식이 부족하다고는 생각지 않는 세자였으나, 이쪽으로는 조금의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인데.”
“그렇지?”
인평대군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다른 하나는 뭔데?”
“머리가 엄청 좋은 사람.”
“……으응?”
“한 번 눈으로 본 것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
“나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인평대군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런 사람이 오성정렬한 밤하늘의 모습을 기억해준다면, 오성정렬은 물론이고 주변의 다른 천체들까지도 오차 없이 기록할 수 있겠지.”
“……으음.”
세자는 쓰게 침음했다.
그런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는 소문으로만 접해보았으니까.
과연 그런 사람이 실재하는지, 혹은 헛소문에 불과한지는 세자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중한 막내의 부탁이다.
도움 구하는 것을 보고도 축 늘어진 채 불가하다는 타령만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형제간의 우의겠으며 신용을 주는 모습이겠는가.
인평대군은 시원찮은 반응에 역시나, 하는 표정이었다.
세자는 그런 인평대군에게 반전을 날려주기 위해 약속했다.
“그래! 이 형님이 수소문해보마! 마냥 헛소문이 아니라면 팔도에 한 사람쯤은 있겠지!”
세자의 확언에 인평대군은 그제야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기대할게.”
그것이 세자에게는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