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64화
“그래, 막내는 잘 지내고 있더냐?”
왕이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다행히 별 탈은 없어 보였사옵니다.”
세자는 곧이곧대로 답하면서도 인상에는 조금 의혹을 남겼다. 자신이 할 말이 남아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다른 문제가 있는 듯하구나.”
“예, 아바마마.”
세자는 입술을 적시고는 덧붙였다.
“막내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하여, 소자가 물어보니 과연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
“조만간 오성五星의 정렬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흐음.”
“막내는 오성 정렬이 일어나는 밤하늘을 그대로 기록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계획을 이미 계획해 두었사온데…….”
세자는 인평대군에게서 들은 계획 두 가지를 고했다.
하나는 암실을 만들어, 구멍을 뚫은 뒤 감광물질을 발라놓은 벽면에 조사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기억력이 비상하게 좋은 사람을 수배하여 밤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었다.
왕이 답했다.
“두 방법이 모두 그럴싸하지만, 전자는 오늘날의 기술 수준으로는 실현하기 어렵겠구나. 감광물질을 구하더라도, 야간에는 광량이 극도로 적어 작은 천체의 위치는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400년이 지나 혁신적인 기술 발전이 이뤄진 뒤에도, 야간 촬영은 뭇 사진가들의 까다로운 작업이었으니까.
게다가 촬영만으로도 부족해, 결과물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보정까지 해야 했다.
반쯤은 창작이나 다름없는 수준.
거기에는 심미적 목적도 있겠으나, 아무튼 선명하고 깔끔한 야간 사진을 얻는다는 게 이토록 어려웠다.
“그렇습니까…….”
세자가 낙담한 얼굴로 답했다.
“두 번째 방법은 차선책으로 보이는구나.”
“예. 하지만, 수배한다고 해서 과연 나타날지 모르겠습니다. 소자는 단지 소문으로만 접해보았을 뿐입니다.”
“나 역시 이런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다. 아니, 실재한다.”
“그렇습니까?”
왕의 확언에 세자가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
서번트 증후군이라 해서, 지적장애나 발달장애를 앓는 사람 혹은 뇌손상을 겪은 사람 중 극소수는 특정한 능력이 매우 발달하기도 한다.
그 특정한 능력에는 기억력도 속해 있고.
“내시부와 내수사를 통해서 각지에 수소문해보마. 하지만,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겠다.”
“어째서 말이옵니까?”
“인평대군이 원하는 인재상은 찾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야. 잘 드러나지도 않고.”
서번트 증후군은 매우 희소한 확률로 발생한다.
더욱이 전제가 뇌손상인 만큼, 대부분은 혼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벅차다.
만약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 있다면 가족에게서 보호받는 중일 텐데, 과연 그들이 환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할까?
이것이 혹 서번트 증후군이 팔도에 실재하더라도 찾아내기는 어려운 이유였다.
“그래도 시도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지. 나는 인평대군의 진취적인 사고관이 마음에 드는구나.”
이러한 추구가 사화와 기술의 발전을 가져오니까.
인평대군은 카메라가 없는 세상에서 카메라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중이다.
아니면, 서번트 증후군을 겪는 환자들을 조명하던가.
세자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만약, 막내가 원하는 인재를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평대군에게도 생각은 있을 것이다. 가능성에만 모든 걸 맡겨두지는 않았을 테지. 어쩌면 최후의 최후의 수단을 이미 생각해두었을지도 모른다.”
세자는 그럴싸하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인평대군은 머리도 좋고 수완도 있다. 예로부터 교토삼굴狡?三窟이라 하였으니, 마냥 손 놓고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튼, 막내가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세자가 막내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주려고 이 아비에게까지 도움을 청해주니 역시 보기 좋고.”
애초에 그러라고 봉림대군에게서 온 호랑이 엄니를 세자에게 전달한 것이기도 했다.
대신 인평대군에게 전해주고,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라고 말이다.
부자父子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형제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말이 각기 다르니까.
“망극하옵니다.”
“그래. 이만 일 보러 가거라.”
“예에.”
* * *
왕은 내시를 불러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를 수배하게 했다.
“오성정렬이라.”
어렴풋이 먼 미래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행성들이 밤하늘에 일직선 위에 놓인다면서, 거의 수십 년마다 한 번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대서특필을 했다.
그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았던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전이다.
“여기서는 제대로 볼 수 있겠군.”
서안에는……, 그러니까 4개의 서안을 맞물려 만든 초대형 서안에는 여전히 권자들이 쌓인 채 나의 과로를 요구하고 있었다.
의금부에서 슬슬 직무유기에 돌입한 걸까?
지금 영의정인 남이공은 오래전부터 격무를 호소하긴 했다. 사직을 흉중에 품었던 적도 있었고.
어쩌면 그 발로이자 시위로서 나에게 자꾸만 업무를 가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못된 늙은이들 같으니. 봉록 주는 게 노인 연금인 줄 알아.”
내키지 않을지언정 과업에는 성실히 임해야 했다.
막내가 영광스러운 오성행렬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고했으니까. 그때 편한 마음으로 밤하늘을 보려면 지금 일감을 줄여놔야 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오성정렬에 대한 소문은 세간에 퍼지기도 시작해서, 궁인宮人마저 왕에게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전하, 혹시 오성행렬에 대해 들어보셨사옵니까?”
편전 내시가 물었다.
“들어보았습니다.”
“바로 오늘밤이라고 하옵니다.”
“시간이 참…….”
문득 서안 주변으로 시선이 향했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권자들은, 오늘날만을 향한 분발 끝에 거의 처치되어 있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는군요.”
“아? 예. 과연 그러하옵니다.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는 것이, 어찌도 이리 빠르게 흘러가는지…….”
편전내시가 감회에 젖은 듯 중얼대며 실소했다.
그리고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
“야간에는 일정을 비울까요?”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서궐과 중궁전에도 소식을 전해 주세요. 이미 알고들 있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을 테지요.”
“받들겠사옵니다.”
편전내시가 양손을 모아 예를 차리고는, 뒷걸음질로 조용히 물러났다.
……오늘 밤이라.
마침 일감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저 처리한 뒤에 잠깐 눈을 감아야지.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보다 밝은 머리로 오성정렬을 감상할 수 있을 거다.
몇 없는 권자 중 하나를 펼치니 굵직한 일감이 등장했다.
“서토西土의 장벽…….”
금나라가 한 번 교육이 되었던 덕인지, 서토에서는 탈 없이 장벽의 건설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군.”
장벽의 건설은 백년대계다.
단순히 국경의 방위만을 위해 세우는 게 아니었으니까.
중원에는 마력이 있다. 거기는 단순히 들끓는 머리와 방대한 국토에서 나오는 저력만이 전부이지 않다.
고래古來의 역사를 통틀어, 중원에 얼마나 많은 세력이 발을 뻗쳤고 또 그러다가 흡수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던가.
장벽을 통해 중원과의 교류를 물리적으로 차단하지 않는다면, 서토부터 언제고 중원에 다시 빼앗길 수 있었다.
서토의 평정은 지극히 단기간에 이루어진 일.
반대로 얼마든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마치 최초의 서토 행정구역 명칭의 어원이 되었던, 백제의 산동 거점처럼 말이다.
‘아예 억만년 알을 박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서토 수호에 임해야지……. 서토는 발해渤海의 조선 전유專有와도 직결되니까.’
마레 조선트룸의 항구적 번영을 위해서라도 서토는 보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장벽을 관한 장계에는 적당히 비답을 내려주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업인지 강조야 매번 한다마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말 그대로 매번인지라 신하들 입장에서는 귀는 물론 눈알에도 딱지가 앉을 지경일 테니까.
이외에도 크고 작은 장계들이 있었다. 보고, 제안, 상소 등.
여기저기서 날아온 장계마다 올바른 비답을 작성한 뒤 편전내시를 불러 내어가게 했다.
그러자 비로소 서안 위가 깔끔하게 비워졌다.
왕이 까마득한 격무 끝에 귀한 자유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잠깐 눈을 붙일 테니, 혹여 밤이 되기 전이라면 깨우지 마세요.”
나는 곧장 어좌에 드러누웠다. 다리가 팔걸이 위로 걸렸다가 빠져나가 편했다.
* * *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편전에서 업무를 마치고 눈을 붙였을 텐데, 어느새 바깥에 있었으니까.
밤하늘은 지구 자전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쾌속하게 흘렀다. 천체들이 천추성天樞星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이게 뭔.’
내가 미쳤나, 싶던 찰나에 은하수가 파도가 되어 쏟아졌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문득 든 생각은 칠흑의 밤바다였다. 그것이 몰아친다는 생각에 척추가 절로 시렸지만, 나를 휩쓰는 밤하늘은 조금도 시리지 않았다.
대신, 밤하늘이 휩쓸고 간 세상은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도 잘 아는 곳이었다.
‘여긴…….’
종묘宗廟.
역대 임금과 왕비들, 그리고 임금의 치세마다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의 신위를 모신 장소.
그중에서도 추존이 아닌, 정상적으로 재위한 임금들의 신위를 모신 정전正殿의 입구였다.
그곳에 용포를 입은 늙은이가 있었다.
“너!”
“나?”
“그래, 너!”
늙은이는 한밤 중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낯색이 검었고, 표정은 일그러졌으며,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과연 역대 조선 왕 중에 이렇게까지 상태 안 좋았던 인물이 있던가?
잘 고심해보니 대표적인 후보가 몇 떠올랐다.
예를 들자면, 세종대왕은 말년에 비만과 당뇨의 합병증으로 꽤 고생했다니 낯색이 좋지 않을 법하다.
‘하지만 그 천하의 세종대왕이 이렇게까지 성격 안 좋아 보이지는 않을 텐데…….’
세조가 말년에는 나병癩病으로 고생하긴 했다.
그라면 성격이 나쁜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은 된다.
‘그런데 막상 세조는 말년에 회개했단 말이지?’
성품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대신 이례적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僧侶를 왕사王師로 초청하고 여러 사찰을 중건 및 후원했다.
‘친족살해라는 굵직한 원죄를 계속 의식해온 건지 나병으로 건강이 악화하자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다지. 세조는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고.’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어졌을 때 종교에 귀의하고 참회를 통해서 고통을 해결하려는 건 흔히 보이는 사례다.
‘그랬던 세조가 이렇게 초면에 삿대질을 하고 성질까지 부릴까?’
뵈는 것 없이 주륙하던 시절의 세조라면 모를까, 말년에 세상이 업보로 추궁해 오자 살살해 달라고 눈물 흘리던 사람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면 영 죽어버렸다고 다시 성질을 버린 건가.’
그렇게 의혹을 품고 있으니, 늙은이가 삿대질 한 손을 말아 쥐고서 외쳤다.
“이놈! 내가 감히 이르는데 무슨 헛된 생각을 하고 있느냐?!”
“……이거 진짜 상태 이상하네.”
“뭐라!”
“너만 왕이냐?”
나도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것을 미친 늙은이도 흘깃 보며 의식하더니, 입술을 잔뜩 말았다.
“……이익!”
“너 뭐냐? 뭔데 초면에 삿대질이냐. 뭐 돼?”
“이 버릇없는 놈! 어디서 근본도 없는 망령이 나타나 옥체玉體를 강탈하더니, 이제는 선대왕마저 능멸하는 것이냐?!”
“선대왕?”
“그렇다!”
“바로 선대왕?”
“그렇다, 이놈!”
“……선조?”
“선조대왕이라 하여라!”
“어우…….”
왜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가 싶었더니, 말년에 유독 광란을 일으키다가 세자까지 망치고 간 미친놈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유독 심병心病이라 하여 정신상태가 안 좋았다는 기록이 강조되는 왕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낯짝이 핼쑥하고 면상이 일그러진 건 그 탓이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선조가 악착같이 왕위에서 버티며 자식을 포함해 주변인과 나라, 백성들을 혹사한 게 용서되는 건 아니다.
“이게 대체 다 뭔가 싶은데…….”
“멍청한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예를 보이지 못할까?!”
“너는 일단 뒤지게 처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