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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65화 (365/380)

인조, 명군이 되다 365화

얼핏,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친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 수 배의 힘을 발휘한다고.

과연 그러했다. 선조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처음 맞붙었을 때는 놀라 버둥대었지만, 본격적으로 몸싸움에 돌입하자 깜짝 놀랄 만큼의 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조는 끝내 복날 개 처맞듯이 처맞고 진압됐다.

거듭된 물리적 중성화 시도에 사타구니를 붙잡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는 사커킥의 연속.

뒤진 놈이 또 뒤질 정도로 뒤지게 깠더니 선조가 끝내 한 손을 뻗으며 항복했다.

“그만! 그만! 내가 졌다!”

선조는 중성화 시술의 여운이 아직 진하게 남아 있는지,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쥐고 있었다.

“왜 남의 꿈자리에 쳐들어와서는 초장부터 지랄이야. 보긴 언제 봤다고. ……확!”

또 걷어찰 기세로 다리를 들자, 선조가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낑낑대며 멀어졌다.

“이, 이건 그냥 꿈이 아니다!”

“뭐?”

선조의 말에 불안이 확 엄습했다.

게다가 종묘라니.

죽은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시는 곳 아닌가?

내가 이곳에 원치 않게 방문할 사유란, 단 하나밖에 없다.

“와…… 씨. 나 죽었나?”

요 한동안 과로가 꽤 심하긴 했다.

아니, 솔직하게 고하자면 과로가 아니 심했던 적이 없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말이다.

예전에는 나라를 정상화하기 위해 여러 일을 벌여놓았는데, 나라가 그럭저럭 정상화한 뒤 세력까지 뻗친 뒤로도 사업들은 대부분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러다 보니 업무에 업무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서안 하나로는 부족해서 4개를 맞물려놓았을까? 그게 과로사할 조짐이었던 것이다.

“큰일 났네.”

벌여놓기만 하고 다 마무리 지어놓지 않은 사업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백만 년짜리 사업이 되어버린 선혜법. 즉위 이래 꼬박 과로사할 때까지 추진했는데도 핵심 지역인 경상도는 아직 제패하지 못했다.

곡물 생산량이 나날이 폭증해버린 탓이다.

그 자체가 나쁜 현상은 아니다.

400년 뒤에야, 남아도는 쌀이 되레 문제가 되지만 전근대에는 풍족한 식량이 곧 인구와 경제 확대의 근간이 된다.

좋은 일이지.

단지, 그 변화와 발전상이 너무 빨라서 제도와 기반시설 확충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일 뿐이다.

‘딴에는 열심히 대응했는데.’

제도를 개선하고, 기반시설을 확대하고, 인력을 배치하는 정도야 너무나 당연한 절차들이다.

나는 여기에 범선을 도입해 수운水運의 주적인 태안반도와 안흥량安興梁까지 극복했다.

그리고 이건 꽤 잘 먹혀들었다.

곡물 생산량이 범선 건조 속도보다 더 빨라지기 전까지는.

다행히 산 펠리페를 온전히 확보할 수 있어, 역설계를 통해 대형함 건조의 초입에는 착수했는데…….

‘과로사해버리는 바람에 끝을 못 봤군. 이런 제기랄.’

나머지 사업들도 대강 이런 식이었다.

화폐의 유통?

이게 선혜법과 맞물렸다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경제와 거래가 팽창하는 상황에서 가치의 기준점이 될 화폐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식량이나 옷감과는 달리 단기간의 시간 흐름이나 환경 변화에도 손상하거나 변질하지도 않고, 무게 대비 적당한 가치 또한 지니고 있다.

이 가치는 실제 가치가 있는 금속 원재료와 회복된 국가의 권위, 금납제도, 은행이라는 초대형 경제주체가 공동으로 보장해주고 있고 말이다.

‘화폐가 도입되지 않았다면 조선의 경제도 이만큼 성장하지는 못했겠지.’

하지만, 이런 화폐조차도 경기 일대를 벗어나면 차순위 거래수단으로 밀려나고 만다.

경제행위가 극도로 팽창하여 되려 화폐를 쓰지 않고는 답답하고 까다로워지는 한양과는 달리, 지방의 향촌 단위에서는 그간 거래 수단으로 이용해온 곡식과 옷감이 선호되었으니까.

이따금 부동산이나 건물 등의 굵직한 거래가 일어나더라도, 향촌에서는 잘 통용되지 않는 상평통보보다 귀금속 그 자체인 쇄은이 선호됐다.

‘화폐도 아직 갈 길이 멀고…….’

서토西土는 어떠한가?

현지 관리와 아전들이 현지인들의 계몽과 교화를 위해서 분투하고는 으나, 혼란한 중원에서는 외지인들이 끊임없이 침투하고 있었다.

이게 장벽을 건설하는 이유이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뭍이 붙어 있기 때문에 이민을 완전히 차단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건 꽤 심각한 문제였다.

본디 중원에는 전쟁과 수탈, 약탈 따위를 피해 달아난 떼거리 이민자들이 각처를 횡행하면서 현지 토박이들을 상대로 혈전血戰을 벌여 농토와 거처를 강탈하는, 계투械鬪라는 미친 관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토의 관리와 아전들은 야만의 땅에서 이리저리 구르다가 와 물을 흐려대는 야만인들을 계도하면서도, 동시에 낙오자들은 수습하고 범죄자들은 적발해야 하는 셈이다.

듣기만 해도 두 손, 두 발로는 부족할 지경의 과중한 업무다.

‘현지 유지들이 순종적이라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만…….’

유지들은 지옥이 된 중원을 겪어보았다.

누 백 년 부패와 몰락 끝에 완전히 망해버린 명나라 위로 갖은 해충들이 시체를 뜯어먹고자 궐기했으니까.

패잔병들을 규합해 난을 일으켰던 자칭 등래대원수 진광부, 명나라와 오랑캐의 이중 약탈에 눈깔이 돌아버린 이자성과 순나라 농민 반란군, 여기에다 명나라의 몰락을 가속해온 금나라까지.

중원 서쪽 말단에서 발호하여 일대를 혼란하게 만든 나전왕?甸王 안방언安邦彦과 대량왕大梁王 사숭명奢崇明, 그리고 서나라를 일으킨 장헌충張獻忠 따위의 제왕병 환자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명나라는 이 갖은 개판을 다 견디다 못해, 조선의 권고를 받자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장강 이북을 포기해버렸고 말이다.

이렇게 중원이 개판에 이판사판이 되어버렸으니, 아무리 콧대 높은 현지 유지들이라도 조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일부는 호락호락 협호하지 않고 명나라의 충신을 빙자해 진광부 시즌2를 시도하다 쓸려나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튼 서토에는 순종적인 유지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밖에서 굴러들어와, 박힌 돌들을 상대로 중국식 전통놀이인 계투 혹은 이에 준하는 기 싸움을 시도하려는 외지인들을 상대로 제 몫을 다해주고 있었다.

한 줌에 불과한 파견 관리들로 서토가 유지되는 건 이들 현지 유지들의 협조가 유효했던 셈이다.

‘하지만, 현지 유지들이 조선에 협력하는 건 진정으로 조선에 충성해서나 팔도의 선비들처럼 충성이 관습이 되어서가 아니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공존일 따름이다.

그러니, 서토는 표면적으로만 건재할 따름이다. 장벽이 완성되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세심한 교화와 동화가 추진되어야 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굵직한 골칫거리들은 국경 너머에도 산재해 있다.

‘이 와중에도 조선을 상대로 견제를 걸어대는 명나라는? 포르모사를 상실하고 독기를 충전 중일 스페인 제국은? 눈과 귀가 모두 멀지 않은 이상에야 이상을 감지했을 일본은?’

그뿐인가?

몇 번 두개골이 깨지고도 정신 못 차리는 금나라에다, 같은 포르모사 섬을 두고 남쪽에 개척지를 펼쳐놓은 네덜란드 역시 잠재적인 불안요소들이다.

이놈이고 저놈들이고…….

“아직 조선이 가야 할 길이 구만리인데.”

그냥, 죽어버린 건가?

그나마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은, 세자만은 똑바로 교육해두었다는 점이다.

심약하지는 않은데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는 건 약간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그런 올곧음이 급격한 팽창과 발전으로 혼란한 조선에 적절한 처방이 되어주리라.

“으음……. 그나마 다행인가.”

미래는 세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하고.

중성화된 선조가 말했다.

“바보 같은 놈!”

“뭐?”

“헤, 아직이다!”

선조가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뭐가 아직이라는 거야? 여전히 싸가지가 없는 걸 보니 중성화가 덜 됐다는 뜻 같은데.”

생식기능을 마저 파괴해주기 위해 다가가니 선조가 사타구니를 웅크리면서 외쳤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가?”

“그래!”

다급하게 말하는 걸 보니 거짓은 아닐 듯했다.

하기야, 거짓이라면 선조는 무한대의 중성화 수술을 받게 될 테니까. 본인의 생식기능이 영적으로 말소되는 기쁨을 무한정 누리고 싶지 않다면 감히 거짓을 고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선조가 있는 걸 보니 지옥에 떨어진 줄 알았더니, 아직 아니란다.

하지만 이 별세계에서 나는 의식도 멀쩡했고 주먹에 선조의 비루한 몸뚱이가 쫙쫙 감기는 게 감각도 정상이었다.

여느 꿈결처럼 여기서 깨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사 가능하더라도, 방법을 알지 못했다.

굳이 볼을 꼬집어봐도 볼만 아플 뿐.

그러자 선조가 몸을 웅크린 채 사악한 내시 같은 표정을 짓고서 웃었다.

“흐흐흐……. 멍청한 놈. 종묘에 왔으면 당연히 열성께 문안부터 드려야 할 게 아니냐?”

주먹을 들자 선조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이놈은 처맞을 소리는 계속하면서 처맞는 건 무서워하네. 진짜 대가리가 어떻게 됐나…….”

이런 놈이 왕이랍시고 설치고 있으니 세자가 돌아버릴 수밖에 없지.

아무튼, 이 미치광이가 해준 말은 단서가 되어주었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종묘다. 선조를 갈구는 와중에도 또 은하수가 쏟아져 나를 어딘가로 날려 보내지는 않았다.

정말로 종묘는 나의 방문을 기다리는 것이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서 선조의 옆구리에 한 방 갈겨주었다. 광해군의 몫이었다.

그리고 밖에서 똥 지려대는 듯한 소리는 대강 무시하고서, 기억대로 펼쳐진 드넓은 종묘의 장관을 마주했다.

그곳에 열성列聖이 있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선조만 덩그러니 밖에 있어서 몰랐는데, 어쩌면 그 역시 단서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열성 또한 종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그리고 그 열성들은 막 내가 선조를 중성화해버리는 것을 문 안쪽에서 다 들어버린 참이다.

과연, 자신들의 말예末裔가 족보상의 아버지를 어머니로 성전환해버리는 것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당연히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다.

원래 미친놈을 상대할 때는 똑같이 미친놈이 되어야 한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야 대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소통은 물리적인 수단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그걸 이해해주느냐, 말 것이냐는 내게 달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

별다른 말이 없음에도 나는 쭈뼛거리면서 안으로 향했다.

여러 감정이 섞인 시선들이 꽂혔다.

‘윽.’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하는 일이야, 왕으로서는 일상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 내가 겪는 집중은 그간 경험해온 이목들과는 종류가 달랐다.

신하들은 아무리 거리에서 날고 긴다 해도 왕 앞에서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야 했다.

그곳에서 왕은 중재자이자 결정권자였고, 신하들은 제 목청을 과시할 요량이 아니라면 일단 왕을 설득해야 했다.

양편의 관계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되레 정반대다.

이쪽은 미치광이 말마따나 옥체를 강탈한 근본도 없는 망령이다.

반대로, 저들은 종묘가 모셔진 실제 이 나라의 주인들이었고 말이다.

나는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어쩐지 열성들 또한 먼저 입을 열지 않았고 말이다.

“…….”

어색한 대치가 시작되려는 가운데, 푸른색 곤룡포를 걸친 건장한 체구의 왕이 열성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묘호를 듣지 않아도 어쩐지 정체를 알 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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