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66화
건장한 체구.
어디서 자주 뵌 듯한 존안.
그에게는 태산마저 깎는다는 세월의 풍파조차도 꺾지 못한 풍모風貌가 있었다.
여기에 치세의 시기를 알려주는 푸른색 곤룡포까지.
나는 거의 확신을 담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태조…… 대왕이십니까?”
푸른 곤룡포의 왕이 답했다.
“그렇다.”
지레짐작으로 맞추게 되었지만, 내가 무어라 말하는 일은 없었다.
종묘를 방문한 건 나의 의지가 아니었고, 그곳에서 열성과 함께 태조를 마주하는 건 더더욱 예상한 바가 아니었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건,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알게 될 터였다.
“갑자기 우리와 만나게 되어서 많이 놀란 듯하구나. 당연히 경황이 없었겠지.”
문 너머에서 벌어졌던 소동을 그렇게 일축한 태조가 덧붙였다.
“우리 역시 너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망자에게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법이니까. 생자와는 좀처럼 만나는 일이 없지. 그러길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들어보니 이 만남은 열성에게도 예기치 못한 듯했다.
무엇이 이 필연적인 만남을 앞당기게 되었을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밤 다섯 개의 행성이 일직선에 놓인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어쩌면 그것이 원인일지도 모르겠구나. 오성五星은 제각기 상징하는 바가 있고, 그 운행을 통해서도 점을 친다고 하였지. 무슨 주술적인 영향이 있었던 듯하다.”
태조의 말에 열성 중 장신에 꼬장하게 생긴 왕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태조가 시선을 쫓아 뒤를 돌아보더니, 코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성종成宗이다. 생긴 것처럼 꽉 막힌 놈이지. 지금 내가 주술을 입에 담았다고 해서 저러는 것이다. ……제는 음행만 일삼다가 요절한 주제에 말이야.”
태조가 비릿하게 웃으며 속삭이자, 성종은 귀가 좋았는지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다시금 아룁니다만 소손은 종기가 도져서 죽은 것이지 방탕하게 살아서 죽은 게 아닙니다.”
“흥! 밤낮으로 술이나 마시고 여인을 끼고 살았던 주제에 어찌 방탕하지 않았다고 둘러내느냐? 그렇게 기력을 허비하지만 않았어도 요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성종은 치국과 학문에 헌신하면서도, 그로 인한 피로감을 술과 여인을 통해 해결했다.
하지만 성종도 그건 억울하다는 것일까.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신하들이 뭘 조용히 허락하는 게 있어야지요…….”
그건 사실이었다.
성종은 선대에 급격히 팽창한 훈구파를 억제하고자 대간臺諫들을 크게 기용했는데, 이게 되려 자신의 발등을 찍게 됐다.
대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별 시답잖은 트집을 잡아 왕에게 다른 유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술이야 대간 저들도 마셨고 왕이 여인과 함께하는 건 왕실을 번영시키는 것이므로 달리 타박하지 않았을 뿐.
그래서 성종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해소 수단이 그 두 가지였던 것이다.
방탕했다곤 해도 유별나게 후궁이나 자식을 많이 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쪽으로는, 음행이 덜 조명받는 선대왕들도 마찬가지였다.
명군으로 칭송받는 태종과 세종들도 성종과 마찬가지로 자식이 스무 명이 넘었으니까.
그러나 성종은 차마 그들을 거론하지는 못했다.
자신보다 항렬도 위에다, 업적마저 남다른데 어떻게 자신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으랴.
그저 억울하고 꼬운 기색만 옅게 드러낼 따름이었다.
“……크흠.”
성종이 헛기침과 함께 슬쩍 시선을 피하자, 태조는 쯧 혀를 차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계기야 무엇이건, 아무튼 잘 되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긴 하나 우리는 너와 마주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점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언젠가 죽기야 하겠지만, 이렇게 아쉬울 정도로 일찍 선대왕들을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정말로 죽은 건 아니라니 천만다행이다.
태조는 만족스러운 인상으로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네가 조선을 번영시키는 모습은 잘 지켜보았다. 우리 모두 그랬지. 일면으로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 그랬습니까?”
“네 잘못이 아니다. 우리 중에는 네가 시행했던 것과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려 한 자들이 있지.”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모두 무산되었고, 그렇기에 한참 뒤에 이르러서 다시금 시행됐다.
“지금에라도 규율을 갖춰 제대로 시행되는 모습을 보니,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것이지. 나조차도 그렇다.”
“태조대왕께서도 말입니까?”
“무얼 그리 놀라느냐. 나 역시도 사람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민망하고 후회되는 민망한 역사들이 여럿 있지. 하물며 치국에서겠느냐.”
태조는 회전하는 밤하늘을 보곤 묵은 숨을 토해냈다.
“나의 가장 큰 숙원은 명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군사적인 방법만을 말하는 건 아니야. 당대의 명나라는 정말로 강대했다. 모든 방식을 고려해야 했지.”
그런 태조가 명나라와 두고 다투었던 것이 바로 요동이었다.
삼한의 고토이자, 과거 태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여진 부족들이 각처에 웅거하는.
그래서 명나라는 더더욱 요동에서 조선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했다.
당대의 명나라는 명확하게 조선을 고려와 마찬가지로 삼한의 후신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을, 과거 수나라와 당나라가 끝내 멸망하게 한 고구려 및 요나라와 금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에도 대승을 거뒀던 고려의 연장선으로 봤다.
이러한 조선에 요동의 방대한 토지와 무수한 백성들은 물론, 규합되면 언제든 중원마저 위협할 수 있는 여진족까지 합류하는 건 명나라에 있어 무척 위협적인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당대의 명나라는 구차하리만치 조선과 태조를 압박했다.
“잘 풀리지 않았다.”
태조는 쓰게 웃었다.
“시쳇말로 하자면,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지. 내가 홍태주 이놈을 산 채로 씹어버려야 분이 풀리겠다고 수백 번은 앓았다.”
“하지만, 그때 명나라는 정말로 전성기였습니다. 지금의 다 죽어가는 명나라와는 다릅니다.”
“대신 금나라가 들어서지 않았느냐?”
태조는 나의 반박을 일축했다.
“그 깜찍하고 우둔했던 머저리들이 이렇게까지 머리가 굵어질 줄은 나도 몰랐다. 놀랍더구나. 그 천하의 명을 위협할 정도로 자라다니! 이래서 세상일이란 모른다는 거지.”
태조는 허탈하게 웃고는 다시 일렀다.
“너는 그런 여진족들을 단숨에 제압했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도 말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기는? 네가 벌이는 갖은 수작들을 다 보았다. 그게 정녕 운에 불과했다면, 나를 포함해 여기 있는 사람 과반은 바보로 만드는 셈이지.”
태조의 말에 열성 중 비만한 체구이나 핼쑥한 인상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세종이다.”
태조가 나의 시선을 읽고는 소개했다.
“그렇게 운동을 하라고, 제 아비까지 타박을 주었거늘 뒤룩뒤룩 살만 쪄서는 저런 모습이 되어버렸다.”
“평가가 가혹하십니다.”
먼 미래에도 유일하게 대왕이라는 존칭이 자연스럽게 수식되는 인물인데 말이다.
그래도 태조의 눈에는 차지 않는 듯했다.
“일 좀 덜 하더라도, 평소에 나가 뛰고 볕도 봤으면 최소한 십 년은 더 살지 않았겠느냐? 제 형만 해도 90살은 살았는데 말이다.”
과연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91살까지 살았다.
“저놈이 딱 십 년만 더 살았어도 나라가 더 좋아졌을 거다. 어떤 못된 패륜아가 패륜아 짓거리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테고.”
태조의 날 선 시선이 열성 중 유일하게 종이 가면을 쓴 왕에게로 향했다.
“너도 짐작했겠지만, 세조다. 천벌을 받아서 낯짝이 제 성품처럼 일그러졌지. 꼴에 부끄러움은 아는지 저러고 있다.”
세조는 장갑을 낀 손으로 제 종이 가면을 슬쩍 매만졌다. 똑바로 붙어 있는지 확인이라도 한 걸까.
민망했던지, 혹은 과묵해진 건지 말은 없었다.
“아무튼.”
태조가 말했다.
“잘 해주었다! 너는 금을 깨트렸고 명나라는 멀리 보내버렸지. 지금처럼 조선이 요동에 가진 힘이 강했던 적은 없다. 이만큼 나라가 강성했던 적도 없고. 네 후대가 너의 반만큼이라도 해준다면, 요동은 조선의 것이 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는 먼 미래에도 써먹을 법한 지하자원이 많으니까.
태조는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들뜬 얼굴로 덧붙였다.
“그리고, 하! 요동에서 산동까지 길을 뻥 뚫어놓은 건 어떻고? 발해渤海는 아예 조선의 바다가 되어버렸지!”
“제 숙원사업이었습니다.”
“괜히 원의 옥새가 너에게 간 것이 아니다. 주원장이 이걸 알면 죽은 상태에서 또 죽으려고 하겠지? 그 빌어먹을 놈! 아주 개 쌍놈!”
태조는 분이 풀리는 건지, 분을 삭이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상태로 원한을 풍겨댔다.
“다른 패륜아 한 놈만 없었더라도…….”
태조는 어쩌면 자신 역시 이러한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는지, 성난 얼굴로 또 다른 왕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후보도 적은 만큼 왕들의 정체를 짐작하기도 쉬워졌지만, 태조가 특히 세조와 함께 패륜아라고 지칭할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태종.
“누가 보는 앞에서는 자식을 혼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까마득한 후손 앞에서 이 아들을 이렇게 핍박하시는 겁니까?”
“나는 너처럼 못돼 처먹은 아들은 둔 적이 없어!”
“그런데도 세종은 귀여운 손주입니까?”
“너만 없는 자식이야! 네 막내 반만이라도 하지 그랬냐?!”
태조는 태종에게 삿대질하며 성을 냈지만, 태종은 살아 있을 때도 그랬듯이 당당히 태조에게 맞섰다.
“요동정벌……. 그거 아바마마께서 하시는 게 맞습니까?”
태종이 일침을 날리자 태조는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린 그대로 입술을 씹었다.
본디 고려 시절, 우왕과 최영이 추진한 요동 정벌에 사불가론四不可論으로 맞섰던 태조다.
그 사불가론에도 불구, 요동 정벌이 강행되자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서 고려를 장악한 게 역시 태조였고 말이다.
“요동을 치려고 하셨으면 예전에 하시지…….”
“야아!”
“예.”
“그거랑 그거랑 같냐? 어?!”
“뭐가 다른데요…….”
“……이, 이익! 이 못돼 처먹은 쌍놈 새끼가……!”
태조가 파란 곤룡포와 대조적일 정도로 얼굴이 붉게 변했으나, 태종은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맞섰다.
“제가 쌍놈 새끼면 아바마마께서는…….”
“……!”
태조는 영적 고혈압이라도 온 것처럼 뒷목을 잡았다.
“어, 어억……. 이 개쌍놈의…….”
태조가 화병으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 상황에서, 세종이 나섰다.
“할바마마. 아바마마. 두 분 모두 고정하시지요. 까마득한 후손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종이 중재하자 태조는 여전히 앓는 소리를 내며 목을 문질렀지만, 더 화를 내지는 않았다.
태종은 그런 태조의 눈이 닿지 않는 뒤편에서 슬쩍 손을 들어 인사했고 말이다.
‘생각보다 더 태평한 사람이었군…….’
아니면, 더 뻔뻔한 사람이던가.
저런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개국공신들과 본인의 이복형제, 그리고 처남들과 사돈 집안을 보내버린 게 태종이다.
‘여기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오죽하면 태종이 아닌 다른 왕이 선대왕과 맞서는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나는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