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67화
태조가 노기를 삭이고서 말했다.
여전히, 어조에는 해소되지 못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지만 말이다.
“네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여주었구나. ……더 못난 패륜아 자식 때문에 말이야.”
태조가 얼핏 미련을 드러내자 뒤에서 태종이 과장되게 콧방귀 뀌는 척을 했다.
“…….”
여태 나의 시선 이동을 잘 읽어냈던 태조였지만, 이번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세종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어중간한 자세를 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눈치껏 다시 태조를 마주했다.
“……아무튼, 이 만남은 우리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만남 자체는 필연적이겠으나 수십 년 뒤에 이뤄지리라 생각했지.”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렇게 이른 시점에서 만나게 되었고.”
“예.”
태조가 문득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단지,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우리가 각기 미진했던 바가 있어 조선을 크게 부흥시키지 못했다. 단지 좁은 땅에 갇힌 채로 조금씩 쇠락해갔을 뿐이지.”
뒤에서 태종이 슬쩍 세종을 쳐다보았다.
유일하게 태조의 자조에서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영토도 넓혔고, 조선도 부강하게 했으니까.
그러나 직접 끼어들어서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적절한 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아니지.”
“……운이 좋았습니다.”
“또 그놈의 운 타령.”
태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덧붙였다.
“잘 해주었다. ……그리고 계속 잘해줄 테지? 네가 아직 천명天命이 다다르지 않았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안도하지는 말아라. 누구에게나 명운命運은 있지만, 옛말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다. 천명이 남아 있다고 해서 누구처럼 방탕하게 살며 기력을 훼손하거나, 혹은 움직이지 않고 뱃살만 기르며 건강을 해쳐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성종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세종은 그저 멋쩍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옥체玉體를 잘 다스리면서 오래도록 조선을 다스리길 바란다. 앞으로 조선이 어떻게 될지, 어디까지 나아갈지는 우리도 기대하면서 지켜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당부를 마친 태조가 더 말을 잇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선조만은 밖에 있나요? 혹시, 대왕들께서 내쫓으셨습니까?”
“그놈이 유별나게 못나고 한심하긴 했지만, 우리는 다 죽은 사람이다. 인세에서 벌어지는 일을 추궁하는 것도 잠깐이지. 영원토록 얼굴을 붉히며 살 수는 없잖으냐.”
태조의 말에 태종은 어깨까지 으쓱이며 새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태조는 자신 뒤편으로 향하는 나의 시선을 무시하며 덧붙였다.
“녀석을 밖으로 내보낸 건, 여기서 네가 우리와 함께 녀석을 보았다간 정상적인 소통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어음……. 그랬을 겁니다.”
선조와 인조라면 맨손으로 머리 가죽을 벗겨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바깥에서 한바탕 푸닥거리도 하고, 영적 중성화 수술도 집행하지 않았던가.
태조의 말마따나 여기서 열성과 함께 원수인 선조를 맞이했다간 대화도 뭐고 없이 개판이 벌어졌을 거다.
그 정도는 나도 자각할 수 있었다.
“너조차도 수긍할 정도라니 미리 내보내기를 잘했구나. 녀석은, 딴에 우리와 있으면 봉변은 안 당할 거로 생각했는지 버티려고 했지만.”
“못 버텼네요.”
“우리 중에 녀석을 좋아하는 이가 없어서 말이다.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 시점에서 선조는 유일하게 외침에 수도를 내어준 왕이다.
그것도 전통적으로 수생 야만인쯤으로 여겼던 왜인들에게 말이다.
하물며 그뿐인가.
한양만 빼앗긴 게 아니라, 그곳에서 살던 수많은 백성이 모조리 학살당했고, 누백년 왕실의 법궁이었던 경복궁마저 전소해 버렸다.
그 외에 갖은 중요한 건물과 기물, 도서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역대 임금들의 신주가 모셔진 종묘 역시 전소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질 못했고 말이다.
‘심지어 성종과 중종의 능묘인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도굴당해서 시신이 사라지기까지 했지…….’
이 와중에 선조는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의탁하려 시도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뒷수습까지.
‘처음 열성을 마주했을 때 가루가 되도록 처맞았겠는데.’
확신하는 차에 문득 성종이 나섰다.
“네가 놈을 싫어하는 이유야 나 또한 백 번 공감한다마는, 백관들 앞에서 대놓고 선왕을 병신이라 면박 준 것은 성급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들어보아라. 뭐든지 처음만 어려운 법이다. 네가 경솔하게 놈을 병신이라고 천명하였으니, 장차 후대에서도 어떠한 옛 왕을 꼬집어 치세를 평가하고 힐난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예.”
“이는 왕의 권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필요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성종은 일순 목석이라도 된 것처럼,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느냐?”
“조선이 고작 일, 이백 년 이어질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구나.”
“만약 조선이 한철 꽃처럼 있다가 사라질 나라라면 선왕에 대한 평가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이 장대한 세월 영화를 구가해야 한다면 반드시 반성과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발전은 반성이 선결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자신의 맹점을 돌이켜보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을 개선할 수 있겠는가?
이건 반성도 마찬가지다.
“잘잘못을 돌이켜보지 않고서 반성이 이뤄질 수는 없습니다.”
“…….”
“선조의 치세는 실망스럽고 한심한 구석이 한가득입니다. 과연 이때의 잘못과 추태들을 애써 덮어둔다면 훗날 임란과 비슷한 재앙이 벌어졌을 때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성종은 답하지 못했다.
“역사를 배우는 건 과거 사람들이 마주한 난관과 대응을 익혀, 선인들이 무엇은 잘했고, 무엇은 그렇지 못했는지를 파악해 현재와 미래에 발생한 재난에 더욱 잘 대처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쨌거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기술과 문화의 변모로 형태만이 달라졌을 뿐.
과거의 인간들과 오늘날의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왕의 권위가 수호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자체가 수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왕의 권위가 수호되어야 치국이 수월하여 환란과 재난에 잘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까?”
“……크흠.”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왕의 권위도, 필요한 반성과 발전 앞에서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잘 수호된 왕의 권위 자체가 환란과 재난을 막아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오므린 입술을 한 차례 움찔하고는, 이내 수긍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옳구나.”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은 듯했으나, 그게 어디인가.
이해해주어 감사하다며 사의를 드러내려는 차에 태종이 불쑥 나섰다.
“후손이 치국에도 능하더니 말하는 것도 조리가 있어 틀린 바가 하나 없다!”
성종이 살짝 몸을 돌려서 숙였고, 태종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왕의 권위야 응당 수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의 전후를 따지면 결국 후손이 선왕을 욕보이게 만든 그놈이 못난 게 원인 아니냐?”
“…….”
“제가 왕이 되어서는, 왕이라는 존재가 병신 취급당하게 처신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조건 그놈 잘못이야. 정리 끝!”
태종이 못을 박듯 단호하게 팔을 교차하니, 성종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태종은 족하지 않았던 걸까.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너는 후손으로서 왕의 권위가 어떻고 저떻고를 운운하면 안 되지. 우리 묘호廟號를 지워버리려고 했던 게 너 아니냐?”
“그건…….”
“그냥 닥쳐, 인마.”
“……예.”
과연 성종은 제후국 신분에 황제들만 쓰는 묘호를 쓸 수 있겠냐며, 책을 출간할 때 역대 왕들을 묘호 대신 명나라에서 준 시호諡號로 기재하도록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이 시도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그때의 업보를 이렇게…….’
백 년짜리 업보가 청산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등골이 확 서렸다.
‘나도 치세 중에 잘못한 게 있으면 저렇게 말 잘못 나올 때마다 곧바로 징벌당한다는 뜻 아닌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선조 이놈은 진짜 숨 한 번 쉴 때마다 얻어터졌겠는데…….’
워낙 걸릴만한 구석이 많은 탓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본인이 잘못한 게 많은 것을.
그리 생각하니 이런 분위기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싶었다.
내가 억만년 동안 선조의 담당일진이 될 테니까. 심심할 때마다 참교육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조 못지않게 교육이 필요한, 다른 불쌍한 영혼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이 역시 태조에게 물어보려던 바.
나는 어색하게 서 있던 그에게 말했다.
“선조는 제가 원래 왕이 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태조가 눈을 끔뻑였다.
“……그놈이 말이냐?”
태종도 끼어들어서 말했다.
“누가 들으면 제놈은 원래 왕이 될 사람이었는 줄 알겠어.”
듣고 보니, 나는 내가 말을 헷갈리게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건 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제 말은, 제가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
태조는 나의 정정에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 역시 이 이른 만남처럼 기이한 일이긴 하나,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구나.”
“제가 원래 왕이 돼야 했을 혼의 몸을 빼앗은 셈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느냐?”
신경 쓰지 않는 건 태조만이 아니었다.
다른 열성들 역시,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종묘는 조선에 재임한 역대 ‘왕’들이 모셔지는 자리다. 어쩌면 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혼이 모셔지는 자리가 아니라.”
태조의 말에 태종도 거들었다.
“네가 현세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면, 원래 왕이 돼야 했을 놈이라고 딱히 왕다웠을 놈은 아닌 듯한데.”
“……그건 그렇습니다.”
명백하게.
“그러면 차라리 잘된 거 아니냐?”
“……그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이겠느냐? 하물며 우리조차도, 네가 조선을 맡아주어서 다행이다마는.”
태종이 실소했고,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열성들 역시 저마다 주억거리며 수긍해주었다.
무척 힘이 되는 풍경이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하고서 다시 물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르지…….”
태종이 답했다.
“어쩌면 우리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지도? 딱히 왕다웠을 놈도 아니고, 왕이 되지도 못했으니, 우리가 알 바는 아니다. 네게도 알 바 아니고.”
“……그렇습니까.”
“그래.”
태종이 단언했다.
“선조 같은 놈이 둘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아예 뇌리에 담아두고 싶지도 않아. 우리 모두가 그렇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해지는 것 아니냐?”
“……대왕의 하교가 옳습니다. 그래도 조금 아쉬운 마음은 듭니다.”
“왜?”
“선조와 마찬가지로 아주 가루를 내버리고 싶었습니다.”
“흐음.”
태종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로서는 그놈을 여기서 볼 일이 없다는 게 다행일 뿐이다.”
그건 그랬다.
오리지널 인조 이놈을 종묘에서 볼일이 없다는 게 공적으로는 다행이다.
직접 손을 봐주지 못한다는 건 사적으로 불행이고.
“더 궁금한 건 없느냐?”
태종이 물어보았으나, 딱히 더 궁금한 건 없었다. 중요한 건 모두 확인했으니까.
세월에 가려진 자잘한 비사들을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차피 종묘에 다시 찾아오게 됐을 때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왔던 길로 다시 나가보아라. 여기서는, 현세로 돌아가는 길은 없으니까.”
“예.”
물러나기 전 열성조들에게 인사를 올리려는 찰나에,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왕이 다가왔다.
다행히, 먼저 소개를 해주었다.
“중종이다.”
“대왕…….”
“이렇게 나서는 것조차 많이 민망하구나. 과인이 하필이면 후사를 탄탄하게 하지 못하여서…….”
중종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대왕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중종이 쓰게 웃었다.
“위안은 되었다. 그건 변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사후 벌어질 일들은 대강 예상하였음에도 미리 손을 써두지 못한 과인의 과오다.”
중종 사후 뒤이어 즉위한 인종은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효심이 너무나 깊었던 나머지, 장례를 혹독하게 치렀던 데다 이 와중 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려놓기 위한 문정왕후의 견제까지 겹친 탓이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는 선조의 계비 의인왕후가 성공한 버전이라 봐도 될 정도로 욕심과 독기가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을 혹사하는 인종을 설상가상으로 견제했으며, 끝내 인종이 요절하자 자신의 자식인 명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명종은 친자를 남기지 못해, 이복형제인 덕흥대원군의 삼남 하성군河城君을 양자 삼아 보위를 잇게 했고 말이다.
중종 본인은 사후 현세가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겠지만…….
이렇게 흘러갈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만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덕분에 고생이 많았다. 과인의 잘못이 크구나.”
“아닙니다.”
나의 사양에 중종은 재차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과인이 폐만 끼친 주상에게 도움을 청하려니 많이 민망하구나. 괜찮다면, 말을 꺼내도 되겠느냐?”
“부디 말씀해주십시오. 어떤 분부든 받들겠습니다.”
“이르게 확약하지는 말아라. 작은 일은 아니니까.”
중종의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에, 어쩐지 그가 청하려는 도움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는 듯했다.
그의 어깨너머에서, 성종 역시 연신 힐끗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말이다.
“……말씀해주십시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애써보겠습니다.”
“하.”
중종은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주상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하구나. ……그래. 과인은 임진년에 능묘가 도굴되어서 시신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게 천추의 한이 되었구나.”
“……혹시, 대왕께서는 옥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중종이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