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70화
“저놈이 절대 허튼짓을 벌이지 못하게 우리가 관리해 주마. 다들 기꺼이 협조할 것이다.”
“선조는 제외해 주세요. 의기투합한 듯이 보였습니다.”
“아, 그래. 그놈도 있었지. 유유상종이로군.”
태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외쳤다.
“균이! 너 이놈!”
태조가 일갈하자 조용히 처박혀 있던 선조가 쭈뼛거리면서 나타났다.
못난 낯짝에는 뺨 맞은 자국이 여전했다.
“부, 부르셨사옵니까.”
“감히 악령과 결탁하여서 아직 현세를 살아가는 조선의 인군을 해하려 들다니! 네가 그러고도 조선의 임금이라 할 수 있느냐?!”
태조의 일갈에 열성의 시선이 모였고, 선조는 황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못난 놈……. 금왕今王에게 일러 네놈 신주를 불태우고 관을 파내라고 명하고자 하였으나, 금왕이 수행하다가 불이익을 얻을 수 있기에 내 지시하지 않았음을 감사히 여기거라!”
저승의 종묘에서 열성들을 뵙고 태조께 친히 명령받았다는 건, 신하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일 테니까.
물론…….
이건 상식적으로 보면 그렇고, 선조와 인조에게 매우 유감스러운 나로서는 얼마든 불이익을 감수하고서 태조의 지시를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태조는 내가 현세로 돌아가서는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걸 알기에 지시하려다가 말았다는 식으로 자중을 청한 걸 수도 있으리라.
“예, 예!”
선조는 그러한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마냥 정신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야.”
찌그러진 선조에게 이르니, 선조가 날 선 눈으로 올려보았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말을 하는데 대답이 없어?”
선조는 슬쩍 좌우를 돌아보았다.
아마 이 패륜에 대해서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열성에게 신호를 보내는 모양이었는데, 열성들이 인조와도 결탁했던 쌍으로 무능한 선조를 두둔해줄 리가 없었다.
나는 그 두 쌍으로 무능한 임금의 분탕에 맞선 사람이었고 말이다.
선조는 열성의 무응답에 완전히 좌절해버렸는지, 축 늘어져서 답했다.
“……아닙니다.”
“내가 천명을 다하면 또 너 보러 오겠지?”
“……예.”
선조는 무척이나 받아들이기 싫다는 듯이 답했지만, 현실은 그런 식으로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게 왜 인조랑 사이좋게 덤벼들었을까.
지금처럼 얌전히 찌그러져 있기라도 했다면 백만 년짜리 담당 일진의 눈 밖에 나지도 않았을 텐데.
“너는 내 시야에 들어 있을 때 절대로 두 발로 서 있지 마.”
“…….”
“지금처럼 계속 무릎 꿇고 있으라고. 알았냐?”
“……예.”
나는 인조를 향해 턱짓하면서 말했다.
“저놈도 마찬가지야. 저놈도 내 시야에 두 발로 서 있는 게 보이면, 일단 너부터 박살을 내버릴 거야.”
“……예?”
“덜 못난 놈이 더 못난 놈 관리해야지. 안 그래?”
선조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턱 얹고서 이리저리 돌려주니, 선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왜 대답이 없어? 주둥이 막혔어? 돌아가서 네 시체 낯짝에다 구멍 하나 더 뚫어주랴? 마빡에 새로 생길 바람구멍으로 말해볼래?”
“아니요…….”
“처신 잘하라고. 죽은 상태에서 또 죽고 싶다 염원하지 않으려면.”
“예.”
선조와의 인연을 잘 매듭지어준 뒤 일어서니, 열성들이 다들 멋쩍은 표정으로 있다가 쉬쉬 고개를 돌렸다.
“소손이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에 태조가 모두를 대신해 응해주었다.
“아니다. 매듭은 지어놓아야 나중에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고생하였다. 다음에는 편한 마음으로 보자꾸나.”
“예.”
물러나는 인사는 종묘에서 해두었으므로 또 하지는 않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현세로 돌아가나 궁금해졌다.
이미 종묘 밖으로 나온 상태.
그러나 의문을 가지기 무섭게 밤하늘이 회전을 시작했다. 당혹하는 찰나에 나는 이미 열성과 종묘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 * *
“헉.”
눈을 뜨고 나니 편전 집무실이었다.
여기서 잠이 들었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광경.
그럼에도 이 공간이 새삼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승의 종묘를 다녀온 게 개꿈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했고 현세와 집무실은 마치 보름 만에 돌아온 집처럼 느껴졌다.
편안하고 익숙하지만, 다시 적응하는 데 약간의 시간은 필요한.
“전하.”
때마침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편전내시였다.
“무슨 일입니까?”
“밤이 되었사옵니다.”
“밤?”
“오성정렬을 감상하시고자 야간의 일정을 모두 비우지 않으셨사옵니까.”
“아. ……그랬지요.”
기억이 났다.
“제때 깨워주어서 고맙습니다. 내가 원래는 눈만 잠깐 붙이려고 하였는데 정신없이 자버린 모양입니다.”
그리고 저승의 종묘에 다녀왔지.
수확이 무척 많았다.
나는 원래 왕이 될 운명이 아님에도, 그간 이룬 바가 있어 열성조에게 재임을 인정받았다.
오리지널 인조의 행방도 원래는 답을 얻지 못했지만, 제가 알아서 튀어 나와준 덕에 처치도 해냈고 말이다.
‘조용히 찌그러져 있었으면 두고두고 나의 우환거리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은 진짜 처신을 못 하네.’
도망의 명수인 선조와는 달리 도망조차 똑바로 못 쳤던 인조다운 처신이었다.
덕분에 열성조들에게는 이전 역사의 왕으로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되려 나라를 망치고 나를 해치려던 악령으로 정의되어 구속되지 않았던가.
‘과분하게 태조 대왕에게 아이언 클로와 파운딩을 처맞고 면상이 교정되는 광영도 누렸고 말이지.’
다시 저승 종묘를 찾아가게 되었을 때도 계속 그 상태일지 궁금했다.
태종이 손봐주겠다 했으므로 어쩌면 상태가 더 나빠질지도 모르리라.
그리고 여기에다가, 선조 악령의 기강도 잡아놓았다.
놈이 열성 모두가 제 편이 아님을 깨달았으니, 왕조를 구성하는 조상님들 모두와 맞붙지 않으려면 내 앞에서는 얌전히 있겠지.
가장 결정적인 수확은 따로 있었다.
무려 성종과 중종의 유해 행방을 알아낸 것이다.
텅 비어버린 채로 애꿎은 사람이 대신 차지해버린 선정릉의 복구에 현실성이 생긴 것이다.
‘저승의 종묘를 다녀온 걸 세자에게 말해주어야겠네.’
당장 실방사는 세자가 이끌고 있으니까.
두 선왕 옥체의 행방을 알아낸 경위를 설명해주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물론, 내가 세자였어도 믿기 어려운 소리겠으나 세자는 아비를 신뢰해주니 반신반의하더라도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지는 않을 거다.
그 정도만으로도 족하지.
‘어차피 저승 종묘의 진위는 녀석도 때가 되면 확실하게 알게 될 테니까.’
기왕이면 최대한 늦게 알아주었으면 하지만 말이다.
“곧 나가겠습니다.”
* * *
나와 가족은 인평대군의 인도로 북악산에 올랐다.
자다가 일어나 아닌 밤중에 등산까지 하려니 처음에는 피로했지만, 차가운 산바람에 금세 정신이 돌아와 즐겁게 산을 탈 수 있었다.
물론, 세자도 함께였다.
“밤에 산에 오르는 건 처음인데, 불이 없었더라면 위험하겠습니다.”
“그래서 보통 산은 밤에 오르는 게 아니지.”
실족할 위험 외에도, 이 시대의 산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살았다.
이런 시대에 야간에 등산한다는 건 맹수에게 자신을 배달해주는 꼴인 셈.
이는 수도인 한양에서조차 마냥 예외는 아니다. 잊을 만하면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맹수가 등장하고는 하는 탓이다.
“그나마 군사들이 불을 가지고 앞장서주니 오를 수 있지. 이 아비는 둘째가 무슨 재주로 첩첩산중을 전전하는지 궁금하구나.”
지금처럼 앞길을 밝혀주는 군사도 없을 텐데 말이다.
세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답했다.
“뻔뻔하게 일신의 무용으로 호랑이를 잡고 다니는 놈입니다. 아마 호랑이들이 세인世人 호랑이 피하듯 둘째를 피해 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구나.”
개들은 개장수를 알아본다던가.
호랑이도 상당히 영리한 짐승이니, 봉림대군이 제 동족들을 사냥하는 위험인물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둘째에게 녀석과 아비의 비밀에 대해서는 알려주었느냐?”
“아직이옵니다.”
“시일이 꽤 되었거늘.”
“서면으로 전달할 내막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데 녀석을 한양에서 좀처럼 보기가 힘들어야 말이지요.”
“그건 그렇구나.”
묵묵하게 등산을 이어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자야.”
“예, 아바마마.”
“오늘, 이 아비가 참으로 진귀한 경험을 하였다.”
뒤따라 등산하던 세자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진귀한 경험이시라니요?”
마치 궁궐에서 뭐 특별한 일이 있겠냐는 듯이 말이다.
“아비가 일을 마치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지금처럼 한밤중이지 않겠더냐?”
“…….”
“그런데 내가 눈을 붙인 곳은 분명 편전이었는데, 어느샌가 종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성을 뵈었지.”
정문을 넘어서기 전에 선조와 맞붙었다는 점은 과감히 생략했다. 더 믿기지 않을 이야기가 이어질 테니까.
“열성께서는 이 아비의 분전을 치하해주시고 내가 대위大位에 오른 것을 긍정해주셨다. 실로 망극한 일이지. 세자는 이게 단순히 꿈이라 생각하느냐?”
“……흔히 꿈은 헛된 것이라고들 하지만, 소자는 영령英靈이 꿈을 통해 생자와 소통한다고도 들었습니다.”
“평범한 꿈은 아니라는 말이지?”
“예. 하물며 대왕이신 아바마마께서 종묘에서 열성을 뵈셨습니다. 절대로 평범한 꿈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샌가 나는 인평대군이 기다리는 곳에 다다랐다.
“아바마마.”
“오래 기다렸느냐?”
“아니옵니다.”
한참 전부터 나와 있었을 인평대군이었으나, 사양하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가 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산비탈 한가운데 펼쳐진 평평한 평지.
나무와 초목은 근처에 없고, 죄 뒤나 비탈 아래에만 있어 창연한 밤하늘이 가려지는 부분 하나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명소였다.
“인평대군의 안목이 좋구나.”
나의 칭찬에 인평대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런 명소는 언제 알아두었느냐?”
평소에는 천문대에서 살다시피 하는 인평대군이다.
하물며 그리 살아온 세월조차 짧지가 않아서, 오죽하면 세자가 되지 못한 채 장성한 왕자는 사가私家를 마련해 따로 살아야 한다는 법도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인평대군은 원래 천문대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냐는 듯이.
그만큼 천문대에 당당하게 거주하면서, 만리경을 끼고 사는 인평대군이다.
북악산이 천문대가 있는 경복궁 터와는 지척이라고는 하나 상주하는 연구시설과 시대를 초월하는 장비를 두고서 노지露地의 관측 명소를 알고 있다는 건 꽤 의외 같았다.
그러나, 인평대군에게는 아니었을까.
막내는 미소를 머금은 그대로 밤하늘을 마주했다.
“만리경이 오성五星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낼 정도로 뛰어나고 대단한 기물이기는 하나, 반대로 그래서 밤하늘 그 자체를 담아내지는 못하옵니다.”
“음. 그렇겠구나.”
“소자가 밤하늘에 매료된 건 오성의 참모습을 보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이 광경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사옵니다. 천문대 밖의 명소인들 마다하겠사옵니까?”
세자는 나라를 물려받을 예정이고, 봉림대군은 특혜를 입어 강산을 자유로이 유람한다.
아비가 딱히 자식을 더 두지도 않았으므로 막내인 인평대군은 본인만 형제와 달리 심한 구속을 당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처지일지라도 창공蒼空을 선망하거나 무한히 펼쳐진 우주를 탐구하는 것은 자유다.
저 찬란한 은하수에 인평대군이 바라는 이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인평대군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밤하늘을 사랑했던 무수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밤하늘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타고난 두뇌와 정점인 기물에 힘입어, 인류 최초로 별이 아닌 행성으로서의 오성五星을 마주했으니까.
“아바마마 덕분이옵니다.”
막내와 잡담을 나누고 있으려니, 올라온 산길에서부터 장정들이 힘 쓰는 소리가 났다.
“네 어미가 온 모양이다.”
중궁과 세자빈은 직접 등산에 동참하지 못했다.
궁중 여인들의 의복이 보통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잘 닦인 궐내를 다닐 때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의복도 없으나, 험난한 산길에서는 너무나도 위험한 복장이 된다.
이전에도 궁중 여인들은 산중에 오를 때 매번 가마꾼들의 도움을 받았다.
‘가족과 야연野宴을 즐긴지도 오래 되었구나.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바빴다.’
나는 언젠가 시간을 내어서 가족들과 함께 다시 산에 오를 것을 기약하면서, 그새 도착한 중전을 맞이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야 교군轎軍이 했지요.”
중전은 조심스레 가마를 내려놓는 이들에게 일렀다.
“다들 물러나서 쉬거라.”
가마꾼들은 예를 표하고는 기꺼이 물러났다. 마침 야간에 산중이라, 바람이 선선하니 어깨가 가벼워진 시점에서 천국이 따로 없었으리라.
“안으로 듭시지요.”
이제 밤하늘을 관측해야 했으므로 위사들이 횃불을 꺼둔 참이었다.
나는 중전이 거추장스러운 의복에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함께 세월을 공유한 가느다란 손을 붙잡아 인평대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세자 역시, 뒤이어 세자빈을 맞이하고서 함께 데려왔다.
“봉림대군이 함께하지 못한 게 무척 아쉽지만, 둘째는 너무 멀리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가족이 다 모였는데 유일하게 한 사람만 모이지 못했다. 새삼스레 아쉬워진 부분이다.
이에 인평대군이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소자가 형님에게 오성이 정렬하는 소식을 미리 알렸고, 또한 아바마마와 함께 모두 이를 보겠다고 하였으니 분명 둘째 형도 지리산에서나마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호랑이 엄니를 선물 받은 것에 대한 비답이었을까.
나는 가상한 인평대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덕분에 멀리서나마 가족이 한 하늘을 보게 되었구나. 막내의 공이 크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나는 재차 인평대군의 머리를 쓸어내리고는 청했다.
“이 아비는 막내와는 다르게 밤하늘을 관측하는 데 조예가 부족하다. 그러니, 우리 막내가 아비와 가족들을 위해 오성五星을 소개해주겠느냐?”
“예, 아바마마.”
인평대군은 기꺼이 받들겠다는 듯 얼굴을 밝히며, 하늘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소자가 가리킨 방향이 황도黃道가 있는 방향으로, 오성五星 또한 지나다니는 길인데 지평선 근처 서쪽에서부터 차례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