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371화 (371/380)

인조, 명군이 되다 371화

“못다 한 이야기가 있구나.”

가족과 함께 행성 정렬을 관람하던 날. 나는 세자와 함께 산에 오르면서 몽중夢中의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본론이 나오기 전에 도착해 버려서 어중간하게 끝나고 말았지.’

그래서 나는 세자를 불러 일렀다.

“간밤에 이 아비가 꿈속에서 선대왕들을 뵈었다고 했었지?”

“예. 생생히 기억하옵니다.”

세자가 당차게 답했다. 고작 어젯밤의 일이다.

“이 아비가 선대왕들께 치하를 받고서 물러나려 할 때, 중종 대왕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무엇이옵니까?”

“선정릉이 임진년 왜구들에 의해 참변을 당한 것은 세자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예.”

세자는 그것만으로 내가 중종에게서 들었다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한 기색이었다.

“대왕께서 이 아비에게 이르시기를, 전왕前王이 정릉 현궁玄宮에 둔 시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진짜 옥체玉體는 일부나마 성종대왕의 옥체 일부와 함께 왜족들의 수괴인 도쿠가와 가문의 창고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셨다.”

세자는 당혹한 눈빛이었다.

“간밤에 세자도 말하였지? 절대로 평범한 꿈은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예.”

“이 아비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몽중夢中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저승 종묘에서 열성을 뵙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선조와 인조 악령은 죽은 놈이 또 죽을 정도로 패놓았던 그 기억과 감각은 절대 개꿈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벌어진 일에 무턱대고 달려들 수는 없는 법이야.”

저승 종묘를 다녀온 기억과 감각은, 타자와는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다.

하물며 나는 일국을 이끄는 위치에 있다.

이런 위치에서 강력한 외부 세력인 일본과의 관계를, 대마도 이후 또 시험하는 걸 함부로 결단해서는 안 되었다.

“두 대왕의 옥체를 되찾는 것이 과히 사명에 족할지라도 말이다.”

이에 세자가 답했다.

“정릉에서 발견된 유해가 정녕 중종대왕의 옥체가 아닐 수 있다, 과거 중종대왕을 모셨던 이들이 증언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랬지.”

“정녕 그 유해가 중종대왕의 옥체가 아니며, 나아가 중종대왕의 옥체가 난리 중에 유실된 것 또한 아니라면, 옥체가 있을 가장 가능성 큰 장소가 왜족들의 소굴입니다.”

“그래서 더욱 믿기 힘들다.”

세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당황한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이 아비 역시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흉중胸中에 깊게 둔 생각은 때로 꿈이 되어서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다.”

“소자는 아바마마께서 꾸셨던 꿈이 평범한 꿈은 아니리라 생각하옵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물증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이는 앞서서 이미 거론했던 부분.

그럼에도 세자가 같은 이야기를 꺼내어 새삼 강조하는 건, 내가 우려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중종의 청이 무척 현실적이기 때문이리라.

세자는 그럴싸하니 믿을만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그럴싸하니 되려 믿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이고.

“두 대왕의 옥체를 찾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사실로 전제하였다가 해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야.”

중종과 성종에게는 송구스러우나, 그들의 유해는 과거의 것이고 오늘날의 조선은 갈 길이 구만리이다.

명분이나 옛것에 매몰되어서 앞길 창창한 조선을 그르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중종대왕께서도 옥체의 반환으로 나라에 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셨다.”

결국, 세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이것이었다.

“선정릉에 옥체를 다시 안치하기 위해 응당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겠지만, 수법이 얕거나 한심하여서 국가와 어심을 그르치는 결과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야.”

결과적으로는 뻔한 소리였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막부는 최근 대마도에서의 일로 조선을 의식하게 됐다.

본디 막부에서는 대마도의 종씨 가문을 비호하면서도 동시에 견제해왔다.

막부가 난세를 종식하고 수립한 새 질서에 구속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부의 계획은 처참하게 어그러졌다.

본디 막부가 종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패로서 쥐고 있던 인물이 갑자기 대마도주로 등극해버렸기 때문이다.

에도에서의 혈혈단신 칩거 생활에서 탈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생겨난 수하들과 함께 말이다.

여기에, 이전에 우대하던 종씨 가문이 몰살당해버린 건 덤이다.

대마도에 새로운 도주와 함께 자리잡은 가신들의 표면적 성분은 열도에서 밀려난 낙오자들이었다.

난세의 종식과 함께 실직자가 되어버린 오갈 데 없는 무사들.

살인적인 세율에 의해, 제 자식을 목 졸라 죽이는 것이 비극보다는 전통이 되어버린 빈자들.

생자生者들을 위해 마련된 지옥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해, 제국주의 첨병들이 속삭인 감언이설에 매료된 자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따로 없다.

제각기 성분과 지향점마저 다르다.

모두 제도에 핍박을 당하기로는 매한가지 신세이나, 서로를 소 닭 보듯 할 뿐이다.

그런데 이 오합지졸들이 서로 결탁했다.

그리고 정치적 낙오자와 의기투합하여, 바다 건너 그들만의 지상낙원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다.

배후에 특정한 세력이 있어 이러한 결과를 설계하고 유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막부가 의심할 만한 이 ‘특정한 세력’의 후보에는, 오직 단 하나의 세력만이 있었다.

조선.

과연 이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남의 나라에서 낙오자들의 낙원을 만들었겠는가?

금나라, 명나라?

당치도 않은 소리다.

“당장 일본이 대마도에서의 영향력을 제거당하고도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타자의 손에 의해 세워진 낙오자들의 낙원.

막부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가장 단순하고 확실하며 빠른 방법이 있다.

군사를 동원하여 물리적으로 쳐부수는 것이다.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천명되지 않은 이상, 신속함과 단호함만 충분히 기한다면 대마도에 심어진 이국의 끈은 쉽게 끊어낼 수 있다.

그렇게 조선이 심어놓은 세력만 일소해버린다면, 조선에서는 방법이 없다.

뒤에서 한참 대마도를 먹기 위한 공작을 벌이던 중인데 무슨 훼방이냐며 자백이라도 할 게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막부에 썩 매력적이지 못하다.

전쟁에 내란이라면 지긋지긋하게 겪어온 열도다. 막부의 권위는 이 전쟁과 내란을 종식한 데 있었다.

하물며 대마도는 바다 건너의 섬.

본토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난세의 시대와 달리 오갈 데 없는 무사들이 저들만의 낙원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맞선다면, 막부는 시체로 가득한 섬 하나를 얻고자 무수한 피만 흘리는 꼴이 된다.

반대로, 대마도를 낙오자들의 낙원으로 내버려 둔다면 겉돌던 영토를 기어코 잃게 되겠으나 효용이 없지는 않다.

열도 본토의 여타 낙오자들이 알아서 대마도로 이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들이 알아서 분리수거가 되는 셈.

이런 상황에서 대마도라는 쓰레기통을 뒤엎는다는 선택지는, 더더욱 매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조선이 정말로 간섭했느냐, 마느냐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나 실리적인 태도에도 한계는 있다. 막부의 주인 또한 사람이니, 그 역시 얼마든지 감정에 휘둘릴 수 있다.”

조선이 대마도 상황에 개입한 게 맞다는 명확한 증거만 확보된다면, 기실 막부에서는 물리적인 충돌만 지양할 뿐 심리적으로는 적대 관계가 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쟁은 그것만으로도 벌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가능성이 현실로 이어지지 않은 건, 막부가 실리를 따져 심증을 심증만으로 남겨두고 있어서일 뿐.

절대로 조선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 가문의 창고까지 들쑤시는 일이 적발된다면, 설령 부처라도 참기 어려울 테지.”

선열과의 만남을 꿈이 아닌 실제라 믿으며, 나아가 두 대왕의 옥에 탈환이 중대한 사명일지라도 무턱대고 덤벼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의례적인 조심성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여기에는 진짜, 진짜, 진짜로 조심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세자가 단언했다.

“소자 역시 일의 경중을 구분하였으며, 근래 일본이 대마도를 빼앗긴 뒤로 크게 경계하게 되었음 또한 인지하였사옵니다.”

“세자가 이 아비의 걱정을 기우로 만들어주니 참으로 고맙지만…….”

신중을 기해야 하는 건 세자만이 아니었다.

“실방사의 일원들 또한 세자처럼 경중을 엄격하게 분간하여, 사명에 잘 임해줄지 모르겠구나.”

“소자가 수하들에게 거듭 강조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실방사의 중대한 과업을 받든 지 수 해가 되었습니다.”

나의 우려처럼 실방사 일원들이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확언이었다.

‘하기야…….’

그간 실방사에서 얼마나 많은 과업을 세워주었던가.

조직의 태생부터가 한윤에 의해 실전 상황에서 창설되어 지금까지 운영되어왔으므로, 검증되지 않은 하수가 중임을 맡았다가 망쳐버릴 걱정은 안 해도 좋으리라.

“그래. 아비가 괜히 노파심에 크게 걱정하였는데, 세자가 그리 말해주니 안심되는구나.”

앓는 소리도 이만하면 족하겠지. 위태롭다 하여서, 옥체의 탈환을 포기할 것도 아니니까.

“……잘 부탁한다.”

이 아비의 말이 새삼스러웠을까.

세자가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바마마…….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아바마마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이시고, 또 소자의 부친이시니 응당 조상이자 선열이신 두 분 대왕의 유해를 탈환하는 건 응당 받들어야 할 의무이옵니다.”

“작지 않은 일이다. 또한 숭고한 일이기도 하지. 그러니 이 아비도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구나.”

선정릉의 도굴은 선조의 무능과 당대 조선의 유약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흔적이었다.

다른 역사에서는 이 선정릉이 수백 년 지난 뒤에도 타자에 변모된 허묘墟墓이자 조선 역사의 오점으로서 남았지만, 이 역사에서는 아니다.

짐짓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로 남을 듯했던 이 상처를, 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서 고쳐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세자는 가장 강한 정통성을 가지겠구나.”

그동안 조선에서 역대급 정통성을 꼽으라면, 단연 단종이다.

조선사 500년 동안 재위한 27명의 임금 중에서 적장손 출신은 오직 단종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역사에서는 아니다.

아비의 출신이 복잡하긴 하지만, 나는 선조와 광해군에 의해 거의 몰락해버린 조선을 다시금 중흥시킨 공로가 있다.

그뿐인가.

팔도를 재건한 데 이어서 여진족을 복속시키고 요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지배하여, 요동은 물론 산동에도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대해大海로 통하는 대만도 일부 장악했다.

이는 어느 열성도 달성하지 못한 지점이다. 가문으로 비교하자면 나는 왕조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셈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되려 이상한 상황에서, 천운天運으로 국체를 건사하였으나 그 기회마저 내다버렸던 선조와 인조도 딴에는 중시조로 추앙됐지만…….’

이놈들이 분수에 넘치는 우대를 받아 각기 선종宣宗에서 선조宣祖로, 열조烈祖에서 인조仁祖로 추숭한 것은 실제로 그만한 공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부친의 치세가 너무나도 병신같았기 때문에, 그러한 부친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조금이라도 강화하려는 애처로운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네 골목대장 같은 것들이 저들을 왕이라 자칭한다고 왕의 권위가 생기던가.

세월이 지나 세인이 내린 객관적인 평가로 인하여, 본디 시법에서는 최상의 공덕과 공로를 의미하는 선조와 인조가 되려 병신의 대명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변에다가 금가루를 뿌린다고 해서 그것이 금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귀한 금가루만 못 쓰게 되었을 뿐.

하지만, 이 역사에서는 아니다.

나는 선조나 인조와는 다르게 진정으로 중시조다운 업적을 세워냈다.

강경하게 마다하지 않았다면, 명나라는 가지지 못한 원나라의 전국시대가 입수된 시점에서 제왕을 참칭하더라도 무방했으리라.

이 역시, 고종의 구차했던 발악과는 판이하게 말이다.

소현세자는 이러한 나의 전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성장해 왔다.

군사적으로는 총검銃劍을 개발하고 포르모사를 점령한 공로가 있으며, 민간에서는 의료를 혁신하고 공중보건의 개념을 도입한 공로가 있다.

여기에 선정릉의 복원은 화룡정점이 되어주리라.

세자의 권위와 정통성을 부왕인 중시조와 본인, 심지어는 누대의 열성들 또한 보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필시 단종과도 달라지겠지.

단종은 가진 것이 무결한 정통성‘뿐’이었지만, 세자는 무결한 정통성‘마저’ 가지게 될 테니까.

‘나 후대後代의 신민들에게 이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테지.’

그리고 자신의 후대를 이토록 완벽하게 준비해두는 것은, 칭송받는 여느 왕들조차도 쉬이 해내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문종과 정종.

각기 조선 전기와 후기에서 황금기를 일으킨 유능한 임금들이었으나, 자신의 후대를 대비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 임금들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땠던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후대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세자가 앞으로 보여줄 행보가 너무나 기대되는구나.”

“……아바마마.”

“되었다. 본론은 마쳤고 세자는 중임을 맡았으니, 이만 돌아가서 사명을 다하는 게 좋겠다.”

“……예.”

세자는 자세를 공손히 하고 꾸벅, 물러나는 예를 올렸다.

“하면 소자는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그래. 오늘도 고생 많았다.”

세자는 작게 머리를 조아린 뒤, 뒷걸음으로 어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복도에서 좌우 문이 닫히기 전 등을 돌렸다.

반정이 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장성해버린 세자의 뒷모습이 조금은 아쉽게도, 그러나 동시에 고맙게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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