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73화
경운궁의 궁인들에게 해산을 명했지만, 모두가 떠나가지는 않았다.
은행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전도유망한 장밋빛 미래에도 소수만은 어전에 남은 것이다.
이는 자신이 그만두는 것을 전제했던 상선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가라고 명하였거늘, 어찌하여 그대들은 물러나지 않고 나의 앞을 막으십니까?”
이에 상선이 답했다.
“전하께서 보위를 내어주셨다고 해도 소신들은 전하 이외의 주인은 모셔본 적도, 모셔볼 생각도 없사옵니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하였는데 신은 마땅히 본받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습니까?”
양손으로도 셀 수 있을 궁인들을 돌아보며 물으니, 다들 금세 결의에 찬 얼굴로 끄덕였다.
과연 그들까지 상선의 말마따나 충신불사이군의 고사를 본받고자 하는지, 혹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궐 밖은 막막했던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라도 생각이 그렇다면, 처음 그들을 궁인으로서 받아준 내가 책임지는 게 당연했다.
“알겠습니다. 경들이 나의 충신으로 남고자 하니, 나만의 충신으로 남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나의 윤허에 상선만 아니라 다른 궁인들까지 한숨 놓은 표정을 지었다.
달리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가슴까지도 쓸어내렸을 기색이다.
“전하, 아뢰기 송구하오나 혹 대보를 전달하신 뒤에 궁인들을 내보낸 것은 경운궁에서 떠나기 위함이시옵니까?”
“과연 그러합니다. 상선께서는 어떻게 짐작하셨는지요.”
“주인 없을 집에 주인 받들 사람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옵니다.”
“과연 상선의 짐작대로이십니다.”
상선은 망극하다는 듯 허리를 굽혔다.
“이어하신다면 어디로 행차하고자 하시옵나이까? 신들은 그곳에서도 대왕을 보필하고자 하옵니다.”
“태조대왕께서는 선위하신 뒤에 함흥본궁咸興本宮에서 여생을 보내셨고, 정종대왕께서는 또한 선위하신 뒤에 산천을 유람하며 보내셨으니, 나는 일단 태조대왕의 선례를 받들어 함흥본궁에서 거처를 꾸리고 각지를 다녀볼까 합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소신들이 대왕을 보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행차하시는 곳마다 수발을 들어야 할 사람은 필요할 터이므로, 신들이 대동하겠습니다.”
상선이 전보다 기세가 오른 것이, 이제 와 동행하지 말라 내쳐도 끝까지 따라붙을 기색이었다.
하기야 상왕이나 되어 수행원도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면, 본인부터 불편한 건 차치하고 다른 사람들도 전전긍긍하게 만들 터이지.
“상선의 의지가 이토록 굳건하고 고마운데 내가 어떻게 내치겠습니까.”
“망극하옵나이다. 만약, 대왕께서 조용히 함흥으로 이어하고자 하신다면 한양을 나서기도 전에 수문장이 막아설 것입니다.”
“그럴 테지요?”
아무리 그래도 공식적인 행사조차 없이, 또한 새로 왕으로 즉위할 아들의 인가조차 없이 훌쩍 함흥으로 떠나버린다면 여러모로 곤란할 상황이 생길 테니까.
그런데 내가 지금 달아나지 않으면 내가 곤란하다.
만에 하나 아들이 위험하다며 함흥으로 보내주지 않거나, 나아가서는 막 비워놓은 경운궁에 다시 궁인을 충당하고 헌 전각마저 개수해 버린다면?
아들은 내가 비좁고 낡은 경운궁을 고수해온 이유를 알고 있다.
서궐에 얽힌 지독한 낙인을 덜어내면서도, 어렵게 지어놓은 서궐을 허물어 괜히 백성들을 또 착취하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아들이 이런 아버지 이제야 호강을 시켜드린다며 경운궁을 고치는 일이 얼마든 실현될 수 있다.
혹은 이전의 화재로 거의 폐허가 된 채 방치된 동궐이나 경복궁을 재건하려 든다면?
본디 서궐을 건사시킨 건 근본적으로 백성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들이 효도 좀 해보겠다고 좋은 마음을 품어버리면, 서궐을 건사시킨 보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들 딴에 부모님이 낡고 좁은 집에서 사는 모습이 편하지도 않을 터.
‘얼마든지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수 있어. 대보를 넘겼으면 빨리 달아나야지. 그래서 궁인들도 즉각 해산시킨 건데.’
눈치 좋고 실방사까지 거느린 세자가 이를 알아차리는 건 금방이다.
막 대부를 받아 들고 중신들을 소집한 참이라지만, 지금 아버지가 한양에서 달아나려고 하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상선의 말마따나 수문장이 나를 곱게 보내줄 리가 없다는 점이다.
전하, 어디로 행차하고자 하시옵니까?
함흥이요.
예에?! 어찌하여 그리 먼 곳을 갑자기 행차하고자 하시옵니까?
왕 노릇은 이미 아들에게 인계했으니 이만 쉬러 가도 되잖아.
이런 태평한 담소나 나누었다간 수문장에 의해 즉각 저지당할 것이다.
수문장이나 되어서 아 그렇군요, 하고 상왕을 그냥 보내주었다간 뒤이어 즉위할 아들에게 어떤 불벼락을 맞을지 모르니까.
“어디,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마침 신의 처소에 가마가 있으니 노복들을 시켜 대왕은 동문으로 모시고, 신 등은 따로 남문을 통해 나가 합류한다면 함흥으로 능히 막힘 없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하. 상선의 방안이 매우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예. 즉각 분부를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상선은 가까이 있던 내시에게 눈짓했다. 다 들어서 알고 있으니 가서 가마를 대령해 오라는 의미였다.
그 눈짓에 내시는 두 눈이 동그랗게 되더니, 금세 바깥으로 허둥지둥 내달렸다.
나는 막상 궐을 나서게 되니 새로운 걱정이 들었다.
“함흥까지 가는 길이 짧지 않은데, 그렇다고 관아에 방문해 숙식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수령이 아들의 명령을 받고 나를 도로 잡아갈 수 있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신 등이 미리 나서 민간의 처소를 빌리고, 집주인이 출입하지 않도록 양해를 구한다면 이는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옵니다.”
“그 또한 상선의 방책이 합당하군요.”
“망극하옵나이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니, 뛰쳐나갔던 내시가 돌아와 곧 가마가 이를 거라는 소식을 밝혔다.
과연 머지않아 가마가 궐 앞에 당도했다.
상선이 소란을 피할 요량으로 가마꾼들을 잠시 몰린 사이 가마에 올랐는데, 항상 크고 넓은 의전용 가마에 탔다가 평범한 가마에 오르니 좁아서 불편했다.
잘도 이런 걸 타고 다녔군.
일단 몸을 비집어 넣으니 상선이 창 너머에서 아뢨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동문 너머에서 맞이하겠사옵니다.”
“예. 다시 봅시다.”
상선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창을 닫았다.
곧, 주변으로 사람이 모이는 게 느껴지더니 일순 가마가 훌쩍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비좁은 공간에서나마 등을 벽에 붙이고 눈을 감았다.
* * *
성공적으로 동문을 탈출한 나는 말을 구해 안장에 올랐다.
역시 가마는 너무 비좁고 불편해서 차라리 말을 타는 게 더 편안했다.
물론, 의복 역시 입던 것은 내시에게 맡겨두고 나는 편하고 평범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함흥까지 탈출하겠다는 사람이 곤룡포를 휘날리며 다닐 수는 없으니.
그렇게 남녀 궁인 한 무리와 함께 논틀밭틀 개간된 땅과 야산 사이의 골짜기를 태연하게 지나가다 보니, 길잡이 삼아 앞서 보낸 내시가 돌아와 알렸다.
“곧 양주목楊州牧에 다다르옵니다.”
이에, 곁에서 마부를 자처해 말고삐를 잡은 상선이 고개를 돌렸다.
“본디 안장에 오르실 일은 잦지 않으셨는데 편의는 어떠시옵니까?”
“물어주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가 불편하지 않고 날 또한 아직 늦지 않았으니, 양주목은 지나치고 영평현永平縣이나 그 너머에 숙소를 구했으면 합니다.”
고작 고을 하나 건넜다고 지쳐 주저앉는다면 어렵게 한양을 탈출한 보람이 없다.
“예, 전하.”
상선은 고개를 돌려 다시 길잡이 내시에게 일렀다.
“전하께서 이르신 바는 자네도 들었을 터이니, 다시 나아가서 앞을 살펴주게.”
“예.”
내시가 꾸벅 고개를 돌리고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흐음…….”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시옵니까?”
“양주목이 한양에서 지척이라고는 하나, 출행이 느긋해져서 한 무리 궁인들을 이끌고 어기적대며 나아가는데 붙잡으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이상합니다.”
그러자 상선도 거짓말을 하지는 못하겠던지, 조금 민망해진 얼굴로 답했다.
“신 또한 막상 출행이 지체되면서 생각이 많아졌사옵니다. 하오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고 마침 전하께서 바라시는 바와 그르치지 않으므로 개의치 않고자 하였사옵니다.”
“혹시 양주목에 다다르면 목사 등이 미리 전교를 받들어 나를 잡으려 할까요?”
“읍치는 피해서 감이 좋겠사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미봉책인 만큼 아들이 마음을 먹었다면 금세 붙잡히겠지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 번 봅시다.”
상선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예. 신이 최대한 애써보겠사옵니다.”
* * *
나는 양주목을 지나 영평현에 이르렀다.
읍치를 일부러 돌아서 왔기 때문인지 양주목에서는 붙잡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직은 영평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이라는 단위가 말해주듯 영평현은 전형적인 소읍小邑이었다.
그래서인지 읍치와 통하는 대로大路를 비껴가니 금세 길이 좁고 험해져서, 대동한 말과 일행들이 피로해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하기야 다들 무턱대고 나를 따라 한양을 나선 참이다.
말에 얹혀서 가는 나와는 달리 이들에게는 급작스러운 강행군이었겠지.
“민가가 나오면 그때 의탁을 청해서 숙식을 해결합시다. 꼭 반가의 거처가 아니어도 무방합니다. 쉬는 게 중요하지요.”
나의 말에 궁인들이 면면으로 반색했다. 다들 내색하지 않고자 애쓰고는 있어도, 역시 지치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산골짜기의 움푹 파인 냇가를 따라서 만들어진 마을이었는데, 좌우로 부쩍 가까운 산과 짙은 녹음이 인상적이었다.
앞서가던 길잡이 내시가 미리 집을 빌려둔 덕인지, 나와 수행원들은 길 위에서 서성이는 일 없이 곧장 한 저택으로 향했다.
마침 집주인은 출타할 일이 있어 막 자리를 비운 참이라는데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덕분에 저택은 나와 수행원들이 오롯이 점유할 수 있었다.
저택의 노복들은 단체로 다니는 길객들이 궁금했던지 호기심을 드러냈다.
안전상의 이유로 상인이나 나그네가 무리 지어 다니는 일이야 흔하지만, 이곳은 대로大路에서 비껴진 곳에 자리한 마을.
평소에도 외부인은 흔치 않을 텐데, 무리를 지어 몰려왔으니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 집을 내어준 사람은 때마침 자리를 비웠다는 말이지요?”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이미 아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듭니다.”
이에 상선이 멋쩍은 미소로 답했다.
“양주목에서는 읍치를 제하고 대로로만 다녔는데 잡인과 마주하지 않았으니 또한 의아하게 여겼사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평현에서도 다르지 아니하였으니, 어쩌면 행로 앞에서 먼저 손을 쓰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료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들이 속히 자리를 물려주려는 이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일까요?”
“금상은 즉위하기 이전에도 매우 현명하고 사려 깊으셨습니다. 그러니 전하께 드러내지 않은 채로 행차를 보필하려는지도 모르겠사옵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군요.”
나의 치세는 짧지 않았고, 그간 남긴 업적 또한 작지 않았다.
이러한 내가 한양에 기거한다면 아들은 기껏 즉위하고도 나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부친이 황급히 한양을 떠난다는 점을 깨우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외지로 향하는 부왕을 공공연히 전송할 수도 없는 노릇.
‘대놓고 아빠 잘 가, 하고 떠나보내면 미친 패륜아 취급을 받을 수 있으니…….’
상선 말마따나 조용히 앞만 닦아준다는 거다.
“그렇다면 조금은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셨사옵니까?”
“하하. 그렇긴 한데, 자식이 너무 잘 커서 아비가 원하는 바를 다 알아준다면 그것대로 조금은 섭섭지 않겠습니까?”
나의 말에 상선이 작게 미소지었다.
“조금은 섭섭할 듯하옵니다.”
“아비의 마음을 이토록 잘 알면서도 얼굴 한 번 보이는 성의가 없으니, 내 아들이 얼마나 아비 가는 길을 잘 전송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마뜩치 않다면 한양으로 돌아가 다그치고자 하시옵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물론, 농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빌린 저택에서는 하루를 꼬박 푹 쉬고 다시 길에 올랐다.
아들의 의사를 거의 짐작하였으므로 영평현을 지난 다음에는 관아의 객사를 거치면서 편하게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