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74화
새로이 즉위한 왕은 상왕의 마음을 헤아렸음이 분명했다.
상왕의 행차는 경기도를 다 벗어날 때까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타자의 의사가 개입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상왕과 수행원들은 대로大路를 타고 공공연히 나아가는 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즈넉하고 적막한 행차도 결국에는 끝이 있었다.
예로부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디에도 눈과 귀는 있다는 의미였다.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상왕의 행차가 경기도를 벗어난 뒤에는 금세 공공연하게 알려져 수령과 유지들 그리고 사연 있는 백성이 앞다투어 상왕의 행차를 방문했다.
이 직전에는 한 무리의 경무장한 선비들이 나타나 행차의 호위를 자처했다.
소문에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실방사에서 즉각 은폐를 포기하고 상왕의 호위에 나선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잡인雜人은 사사로이 행차에 범접하지 못하였는데, 여기에는 사연 있는 백성들만 아니라 유지와 수령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왕 본인부터 행차가 지체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公적으로는 사사로이 연회를 일으켜 각 읍의 행정과 부민의 생활에 차질을 안기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상왕은 단지 함흥행만을 서두를 따름이었다.
물론, 상왕의 의사가 이러하다고 수령과 아전들 그리고 유지와 선비들이 상왕의 행차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상왕은 살아있는 전설이었으니까.
상왕은 본디 왕위를 물려받을 태생이 아니었으나, 나라가 어지럽고 어려울 때를 맞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혼란은 평정하고 국적은 깨트렸다.
그렇게 국가를 소생시키고 재건하며 부흥시킨 다음에는 권좌에 미련을 두지 않고 전도유망한 후계자에게 보위를 물려주었으니, 이러한 사실 또한 알려진 시점에서 상왕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져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니, 어찌 수령이 아전들을 대동하고서 대왕의 행차를 시종하지 않으며, 또한 어떻게 유지와 선비들이 명망 높은 대왕의 천안天顔을 뵙고자 몰려들지 않겠는가.
개중에는 대왕을 통하여 신세를 고치고픈 조잡한 인사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야심을 시험해볼 기회는 없었다.
대왕부터 그런 조잡한 인사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러한 자들이 천안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수령만 아니라 실방사 또한 거쳐야 했으니까.
그리고 고작 요행이나 바라는 잡인 따위가 실방사의 철통 호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덕택으로, 대왕의 행차는 공공연한 소식이 되었음에도 지체되는 일 없이 함흥에 이를 수 있었다.
이즈음에는 현지의 관찰사가 상왕의 길잡이를 자처하고 있었다.
“이곳이 태조대왕께서 지내셨고, 또 생활하셨던 함흥본궁咸興本宮이옵니다.”
함경도 관찰사는 소박한 궁궐의 내부에 이르러서 소개했다.
함흥본궁은 태조가 태종에 의해 축출된 뒤 잠시 생활했던 그의 옛 잠저였다.
태조가 왕이 되기 이전 생활했다가, 상왕으로 물러난 뒤 임시로 기거했던 만큼 내부는 그다지 넓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외려 한양의 경운궁慶運宮과도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았는데, 상왕은 이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내색은 하지 않는 상왕을 대신하여 관찰사를 상대하는 이는, 상선이었다.
내시일지라도 상선은 내시부의 장관. 품계만은 관찰사와 동등했다.
“종사宗社를 일으키신 옛 대왕께서 기거하셨던 궁궐인데도 내부가 무척 허전합니다.”
상선의 감상에 관찰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눈치 하나 없이 능력만으로 관찰사에 오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관찰사는 상선의 말이 마치 상왕 전하의 당도하는 소식을 접하고도 행궁을 더 갖춰두지 않은 데에 대한 지적처럼 느껴졌다.
관찰사는 서둘러서 둘러댔다.
“함흥본궁은 본디 태조대왕께서 오래전 생활하셨던 잠저 터에 세워진 궐인지라 원래 공간이 넓지 않고, 전각 또한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본궁本宮이라고는 하나 태조대왕께서는 이곳에서 정무를 보지 않으셨으므로 행궁行宮과도 다르지 않지요.”
그러니 부속 건물이 많지 않았고, 많을 수도 없었다.
아무리 대왕을 맞이한다고 한들 없는 전각을 하루아침에 세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관찰사는 내심 변명하면서도, 해명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재차 입을 열었다.
“더욱이 이곳의 전각들은 임란 때 소실되었다가 폐주의 말엽에 이르러서야 재건이 시작되어, 갖춰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관찰사는 제법 그럴싸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상왕께서는 궁궐의 영건을 혐오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리하여 한양의 불타고 무너진 궁궐들을 재건하지 않고, 오래된 경운궁에서 치세하였는데 이러한 모범을 두고 함흥본궁의 재건에 힘을 들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관찰사는 괜히 아차 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도, 중요한 전각들은 충실하게 복원되어 열성을 모시는 제례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임해오고 있습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상선이 느긋하게 침음했다.
그 묘한 반응에 관찰사가 눈치를 살폈지만, 사실 이는 유난에 지나지 않았다.
관찰사가 괜히 제 발을 저려댄 것과는 달리 상선은 함흥본궁의 현황에 불만이 없었으니까.
그는 이런 소박한 구성이야말로 대왕께서 더 편하게 여기신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시이자 내시부의 장관 아닌가.
그리고, 그간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던 상왕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함흥본궁에서는 열성을 기리는 제례를 정기적으로 행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내가 갑자기 이곳으로 이어하였으니, 혹 제례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까 우려됩니다.”
이에 상선이 미소와 함께 답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기거하실 본전本殿과 열성의 위패를 모셔놓은 이안전移安殿은 따로 떨어져 있고, 제례를 위한 기물을 보관해두는 곳과 제례를 준비하는 장소 또한 별도이므로 차질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설사 차질이 생길 상황이라도, 그렇지 않게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추존된 사대조의 제례와 황제로 즉위할 수도 있었던 대왕의 생활을 비교한다면, 그냥 사대조 쪽에서 물러나 주는 게 맞았다.
이러한 상선의 계산은 알지 못한 채로 상왕이 안도했다.
“아하…….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외려, 전하께서 당도하신 덕에 제례에 격식을 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동안에는 내수사에서 별차別差를 파견하거나, 이마저 여의치 않다면 때때로 현지의 무격巫覡이 맡아 제례를 주관하기도 하였사옵니다.”
무격이란 여성인 무당과 남자 무당인 박수를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었다.
태조의 고향인 함흥에서 이뤄지는 사대조 제례의 격식이 고작 이러했던 셈이다.
상왕의 생활과 사대조 제례가 비교되면 후자가 양보해줄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아무래도 열성을 모시는 예법에는 걸맞지 않은 바가 있었사온데, 전하께서 본궁에서 기거하시며 이따금 제례를 주재하신다면 다르지 않겠사옵니까?”
“그러한 방법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내가 함흥의 본궁을 잠시 빌려 쓰더라도 열성께 부끄럽지 않겠습니다.”
말이야 아름다웠지만, 상왕은 내심 아쉬웠다.
기껏 은퇴했으니 날백수처럼 살아가겠다는 환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제례를 주재하게 된다니.
그런 왕의 속내는 알지 못한 채 관찰사가 마냥 해맑은 얼굴로 나섰다.
“그렇다면 이안전과 전사청典祀廳을 소개해드리겠사옵니다. 다 본궁 내에 있는 전각이기도 하니, 기거에 앞서 열성의 신위를 안치해둔 곳과 유물 등을 보관해 둔 곳을 살피셔도 좋을 듯하옵니다.”
함흥본궁의 현황이 혹 대왕의 기거에 부족하지는 않을까 괜히 자신의 발을 저렸던 관찰사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제례로 옮겨지자 관심을 돌릴 셈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상왕은 쉬지 않고 한양에서 함흥부까지 온 참이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열성의 말손末孫이 실로 누 백 년 만에야 이르렀으니, 당도한 김에 예를 올려야겠습니다.”
“대왕께서 그 같은 품성으로 행차해주시니 열성과 천지신명이 다 기뻐하실 것입니다.”
관찰사는 상왕의 진심도 모르고 희희낙락 앞장섰다.
* * *
당도하는 소식이 이미 있었던 덕인지 본전의 내부는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지친 참에 무척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관찰사 덕분에 종일 똥 마려운 개처럼 끙끙대면서 지냈군…….”
한양에서 함흥까지 오는 동안 틈틈이 휴식은 취했지만, 충분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로가 꽤 길고 고됐으므로 쌓인 여독이 작지 않았고, 그래서 수행원들도 더 괴롭히지 않고 본궁에 이른 시점에서 해산시켰다.
그리고 나 또한 곧바로 퍼질러져서 잘 생각이었는데 관찰사가 소개에 너무 열정적이었다.
‘그렇다고 조상들 신위를 보여주겠다는데 마다할 수도 없고 말이지.’
마지 못해 관찰사에게 끌려다녔다.
그래도, 태조가 직접 사용했다는 용두검龍頭劍과 어궁구御弓具만은 흥미로웠지만.
어쩌면 나의 유물도 이곳에 안치되어 후대까지 전해지지 않을까.
“……잠이나 자자.”
시답잖은 생각을 이어가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웠다.
침소에는 앞서 해산한 수행원들이 고맙게도 침석寢席을 깔아두었으므로, 나는 몸만 뉘면 되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차갑게 식은 이부자리가 푹신하게 위아래로 몸을 감싸왔다.
이제 잠만 자면 되는데.
꽹꽹! 꽹꽹!
“저언하!”
꽹꽹!
“하아아…….”
꽹꽹꽹!
미친 수준의 청각 테러가 고막에 직격했다.
태조 시절의 궁궐로 이어해서였을까. 궁궐의 방위 수준도 태조 시절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격쟁擊錚이라니.’
그래도 궁궐에 배치된 군사들이 나섰는지, 혹은 실방사 요원들 덕인지 꽹과리 소리는 잠시 멀어지다가 완전히 멎어버렸다.
난동을 피우던 사람이 제압이라도 된 걸까.
잠이 들려던 차에 훼방을 당했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어 격쟁까지 한 것인지 호기심은 들었다.
이런 식의 난동은 무척 유서 깊은 행위였고, 관련 법까지 만들어져 중대사가 아니라면 엄벌하게 되었으니까.
‘재위 때에도 당해보지 않은 격쟁을 여기서 당하다니…….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딴에 목숨을 걸었으니 사연은 들어봐야겠지.’
하지만 시답잖은 사연 때문이라면 응당 율대로 처벌이다.
단지 피곤하던 참에 수면을 방해받아서는 아니요, 그저 하소연할 만한 사연이 있다고 벌을 주지 않는다면 오늘부로 함흥본궁은 격쟁 맛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게 밖에 있습니까?”
밖을 향해 부르니, 숙직 내시가 문 너머에서 답했다.
“예에. 전하.”
“내가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누군가 격쟁을 한 듯합니다.”
“그러하옵나이다. 그러나 염려치 마시옵소서. 금세 조용해진 것을 보아 해결된 모양이옵니다.”
“소란은 당장 해결되었지만 격쟁한 사람의 사연마저 해결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비록 왕위는 내려놓았으나 한 때의 백성이 억울한 사연을 가지고서 벌인 일을 무시하고 싶지 않으니, 격쟁인을 불러 사정을 들었으면 합니다.”
“바깥에 전하겠사옵니다.”
내시가 물러나고 잠시 후.
내시는 금세 돌아와 격쟁인을 뜰에 불러놓았다고 보고했고, 나는 벗어둔 용포를 대충 어깨에만 걸친 채로 본궁을 나섰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야간의 함흥을 마주하니 밤하늘만은 맑고 화려했다. 은하수의 찬란한 광채가 북방의 한풍만큼이나 시렸다.
‘열성들을 본 꿈이 생각나는군…….’
나는 용포를 좀 더 여미고는 마당에 꿇려진 격쟁인을 마주했다.
격쟁인은 야간에도 흑립黑笠의 윤기가 선연했고 도포 자락에는 은은한 빛깔로 채색이 되어 있었는데, 살림에 관해서만은 억울할 구색이 없어 보였다.
다만 소란을 일으켰다가 제압되는 와중에는 작은 사연이 생겼을 듯 때깔 좋은 흑립도 한쪽은 구부러졌고 보기 좋은 도포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나는 궁인이 미리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아 일렀다.
“말해 보아라. 무슨 연유로 오밤중에 과인의 휴식을 방해하였는가? 만약 작은 일이라면, 율대로 벌을 받도록 하겠다.”
나의 엄포에 격쟁인은 좌우로 두었던 손을 공손하게 모아 바닥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