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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75화 (375/380)

인조, 명군이 되다 375화

“신은 본디 함흥을 중심으로 일대에서 상품을 거래하는 하찮은 상인이온데…….”

어쩐지 차림새가 범상치 않다 싶더니 상인일 줄이야.

‘상왕으로 물러난 내게 신臣을 자칭하는 건 예법에 맞지 않기도 하지. 양반 차림새는 흉내일 뿐인가?’

아무튼.

“해마다 세금을 내는 데 있어 올해가 예년과 다르고, 예년은 그 예년과도 달랐사옵니다.”

세금 문제라…….

절대로 작은 문제는 아니지.

하물며 나의 치세 동안에는 상업이 나날이 중흥하여 이제는 농업 못지않게 국가의 경제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제도만은 상업이 발달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항상 소란을 일으켜왔다.

‘그리고 상업이라는 경제활동과 미비한 제도의 쟁점은 언제나 하나뿐이지.’

어떻게 해야 세금을 공정하게 거둘 수 있느냐?

‘그런데 이게 절대로 가벼운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상업과 제도가 극도로 발달하고 전 세계가 전산화된 미래에서도 세금 정책은 항상 분란을 일으켜왔다.

그런데 전산화란 상상조차도 하지 못하는 시대에서, 신흥 경제활동인 상업과 느리고 제한적인 전근대 행정은 항상 마찰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골치 아픈 소리를 하겠군…….’

그리고 과연 예상대로였다.

“신은 장사하는 사람인 만큼 가진 것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때로는 공납貢納하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금납金納하기도 하였는데, 신이 금납할 때에는 항상 관官이 편의에 따라 액수를 정하였으므로 매번 난처하고 곤란하였습니다.”

북방의 양계兩界로 아우러지는 이곳 함경도와 평안도는 중앙과는 분리된 독자적인 조세 제도 및 집행 절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북방의 양계가 지형의 험난함과 토질의 척박함에 반해, 국경 지역으로서 들어가는 비용은 많아 매번 수취하는 것 이상으로 세금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여기서 거두는 세금은 현지에서 다 쓰고도 부족한 판국인데 중앙과 연계하여 그쪽으로 보낼 필요가 있겠냐는 거다.

이러한 사실은 대동법의 대대적인 확대에도 달라지지 않는지라, 북방의 양계 지역만은 별도로 남았다.

조세 방식을 대동법처럼 세곡으로 일원화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양계는 춥고 척박한 땅이라 쌀이 충분히 나지 않았다.

‘정말로 불가피한 사유로 옛 조세 제도를 유지하는 셈이지……. 그러다 보니 현황과는 더더욱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양계는 국경인 만큼 상업이 진흥하기 더욱 쉬운 환경인데 제도만은 다른 지역보다 낙후해 있으니까.

상인의 불만이 바로 이것이었다.

“물건의 가격이란 사정에 따라서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법인데, 관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멋대로 값어치를 정하여 이에 따라 받고자 하니 이미 여러 사람이 불편해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공론公論을 모아 진언하여도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사옵니까?”

평안도에서는 옛 조세 제도와 금납이 병행되고 있다.

그런데 금납을 원한다면, 관에서 원하는 세액을 맞춰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납부할 공물의 가치가 최근 폭락해 반 토막이 났는데, 관에서는 옛 시세를 고수한다면? 금납을 시도한다면 두 배의 세금을 내야 하는 셈이다.

사정에 따라 공납과 금납을 변통한다는 상인의 입장에서는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벼이 찬동해줄 사안은 아니었다.

조세는 나라의 근간.

중대사인 만큼 한쪽 의견만 듣고 결정할 수는 없으며, 설사 그러고자 하더라도 금상今上은 내가 아니었다.

“그대가 제기한 의문은 이해했다. 내가 사정을 전반적으로 헤아려서 주상主上에게 상주할 터이니, 이만 물러나도록 하라.”

“하오나!”

상인이 채근하려던 차에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이 이상으로 나를 번거롭게 만든다면 반드시 율대로 집행되게 하겠다.”

단호한 엄포에 상인은 반쯤 열린 입을 꾹 닫았다.

그 역시, 이게 하소연을 잘 들어주다가 생뚱맞게 하는 경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도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군.’

만약 나를 군림만 해온 고지식한 사람으로 알고서 답변을 재촉했다면, 그대로 끌고 가 법을 집행하게 했을 것이다.

비록 아들에게 양위했다고는 하나 한때의 군주거늘 우습게 여기고서 기망했다는 뜻이니까.

상인 주제에 감히 왕에게 답을 재촉해서가 아니다.

공물 가격의 변동에도 관이 가치를 자체적으로 규정해 금납을 받는 것을 무턱대고 금지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반대로 상인들이 공물 가격을 조종해서 세금을 회피하겠지.’

누구도 세금을 더 내고자 하지는 않는다.

만약 공물의 현재 시세만 반영하여 금납하도록 규정한다면 상인들은 즉각 담합해 때마다 시세를 교란하여 세금을 회피할 것이다.

부를 축적해낸 증거를 온몸에 걸친, 머리 좋은 상인이라면 처음부터 이러한 전개를 바랐을 터.

과연 그렇다면 상인은 단순히 제도의 미비함에 따른 부당함을 호소한 게 아니라 본심을 감추고서 나를 기망한 것이다.

‘그러니 길게 생각하지 못하게 당장 편들어달라고 답변을 채근한다면, 이것이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해야겠지.’

그렇다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함부로 격쟁을 일으키고 기군망상欺君罔上한 셈이다.

응당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삼을 사유다.

“…….”

괜히 성공한 장사치는 아니라는 것일까.

내 의사를 눈치챘는지, 아니면 감이 안 좋았는지 상인은 감히 더 재촉하지 못했다.

“신은 삼가 물러나도록 하겠사옵니다.”

“가라.”

상인은 예를 올린 뒤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빠르게 어전에서 사라졌다.

‘……역시 괘씸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러나, 저 한 놈 꼴사납다고 제도가 미비한 현실을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

‘기껏 한적한 여생을 누리려고 함흥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제례의 주관이니 제도의 개편이니 따위를 신경 써야 하는 건가…….’

아무래도 장밋빛 깔끔한 은퇴는 이제 포기해야 할 모양이었다.

* * *

나는 다음날이 되어 함경도의 관찰사를 호출했다.

함경도는 자체적으로 세금을 수취하고, 관찰사는 그런 함경도를 담당하는 위치이니 상인이 거론했던 문제를 상의하기에는 적절한 대상이었다.

‘물론 관찰사에게는 그 이외에도 본연의 업무가 많으니 무턱대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함경도의 관찰사는 동시에 함흥부의 부윤을 겸직하기도 했다.

도지사가 광역시 시장을 겸임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함경도 관찰사 겸 함흥부윤의 바로 아래는 종오품에 불과한 판관判官이 있다.

상왕으로서 함경도의 수취 제도를 논하려는데 종오품에 불과한 보좌역과 논의할 수는 없는 노릇.

별수 없이 관찰사를 불렀는데, 막상 관찰사는 호출이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관찰사는 빈손으로 방문하지도 않았다.

수행원들을 대동시켜 약간의 예물까지 상납한 관찰사는, 잡인을 물리고 희희낙락한 얼굴로 예를 갖췄다.

본디 함경도에서는 왕이나 마찬가지였을 관찰사다.

예기치 않게 상전이 굴러들어왔으니 꺼려질 법함에도, 이렇게 좋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니.

“경의 얼굴이 좋아 보입니다.”

“신이 대왕의 존안을 뵈었으니, 어찌 기뻐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나이까.”

‘오호라. 알만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신을 자칭하는 걸 보니 아들에게 한마디 들었구나.’

아마 상왕을 잘 모시면 나중에 잘 챙겨주겠다고 약조라도 접한 모양이다.

벽지인 함경도의 관찰사로서 출세가 무척 고팠을 테니, 내가 아주 금송아지처럼 보이겠지.

과연 이런 인사가 적합한가, 혹은 아들에게 복심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상왕으로 물러난 내게 대신의 인사는 관할이 아니었다.

“내가 경을 호출한 이유는 간밤에 있었던 격쟁 때문이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예에…….”

관찰사는 송구스러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굽실거렸다.

“신이 무능한 소치로 대왕의 휴식을 방해하였으니, 한없이 수치스러울 따름이옵니다.”

“내가 그자의 말을 들어보았는데 함경도의 조세 정책에는 난잡한 여지가 있는 듯합니다.”

“소란을 일으킨 인물은 오래전부터 정책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이전 관찰사 때부터 빈번하게 분란을 일으켜왔사옵니다. 개의치 마시옵소서.”

관찰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 내가 관할 구역의 정책에 간섭하려 들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겠지.

“나는 쟁송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않습니다. 부당하게 비칠 여지는 있으나, 관의 입장에서 살핀다면 이는 불가피한 사정이지요.”

“과연 그러하옵니다.”

관찰사가 안도한 얼굴로 덧붙였다.

“상인은 금납의 편의를 개선하자는 허울 좋은 명분을 빙자하나, 실제로는 시중의 물가를 교란하여 때때로 세금을 회피할 의도밖에 없사옵니다. 이러한 연유로 관에서는 적절한 가치로 금납을 허용해주는 것인데, 이것이 싫다면 이전처럼 공납으로 응하면 될 따름이옵니다.”

그런데도 소장疏章을 남발하여 분란을 일으키니 수령 또한 학을 뗄 수밖에 없다.

방법이 금납만 있는 것도 아니거늘, 고작 사사로이 정책을 기망해 이익을 거두려는 의도로 끈질기게 덤벼든단 말인가.

“내가 지금은 만승萬乘의 업을 내려놓았으나, 항상 관과 부민의 편의를 위하여 금납이 진흥되기를 바라왔습니다. 동전은 세곡이나 공물과는 달리 세월에도 쉬이 상하지 않으며 운반과 보관에 있어서도 이점이 매우 크지요.”

“과연 그러하옵니다.”

다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사정과 사유가 있어서 금납의 확대는 미진한 상태다.

일단 백성들에게는 화폐에 대한 신뢰를 새겨두었지만, 오늘날의 상거래는 미래처럼 활달하지도 않았고, 평상시에는 특별한 쓸모조차 없는 쇳조각은 크게 선호되지 않았다.

화폐에 대한 신용 자체와는 별개로서 말이다.

그러나, 편의가 분명하고 역사가 증명하는 만큼 금납은 조선이 대동법에 이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정책인바.

“진흥과 확대를 끊임없이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병행마저 여의치 않아서야 금납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관찰사가 답했다.

“신인들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오나, 수취에 있어 일개 상인들의 저의대로 따라줄 수는 없는 노릇이옵니다.”

“경의 말이 지당합니다. 조세의 방식을, 내야 하는 사람에게 정하게 한다면 누구도 세금을 내지 않게 되겠지요.”

관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진전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금납의 진흥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새로운 방법을 고민해 봐야지요.”

“…….”

흔쾌한 대답 대신 멋쩍은 표정만이 돌아왔다.

세금은 누구라도 내고 싶지 않아 하듯, 공무를 좋아하는 공무원은 없는 법이다.

더욱이 관찰사는 임기직.

상왕을 잘 모시는 대가로 장밋빛 출세를 이미 약조받은 상태라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플 이는 어디에도 없으리라.

‘그러나 그런 얕은 안주로는 장밋빛 출세를 이룩하더라도 출세를 오래 누리기에는 힘들 테지.’

아들은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자신이 이미 준비된 유능한 왕재王才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어떠한 조직일지라도, 유능한 우두머리는 무능한 일원을 우대하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국가의 단위에서야.

그러나 이미 아들의 안배가 있는 상황에서, 그러다간 오래 못 간다고 이실직고해줄 수는 없는 노릇.

“나와 경이 당면한 함경도의 문제는, 경이 이미 말해주었듯이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진전을 이뤄내지 않는다면 개선 없이 적체된 여느 제도가 그러하듯 인습因習으로 남아 나라의 해악이 되겠지요?”

“……예.”

“우리가 궁리하여서 좋은 결과를 이뤄낸다면 함경도에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관만이 아니라, 부민들은 물론 나라 전체가 덕을 보겠지요. 이는 작은 공로가 아닙니다.”

혹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상왕인 내가 이름을 같이 올려주겠다. 그러면 후환이 크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성과를 거둔다면 이것이 작지 않은 공로임을 상왕으로서 인정하고 알리겠다.

정리하자면 이런 소리였다.

관찰사의 안색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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