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76화
“대왕께서 이토록 함경도의 진흥과 백성들의 편의를 헤아리고자 하시니, 이는 신이 미처 직무를 다하지 못한 소치이옵니다.”
관찰사가 비통한 얼굴로 아뢨다.
연기를 업으로 삼았다면 굶어 죽었을 수준으로 말이다.
“대왕의 심려가 이처럼 깊고 자애로우신데 한갓 신하에 불과한 소인으로서 어떻게 이견이 있겠사옵니까?”
“나의 편의를 봐주시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편의라니 당치 않사옵니다. 이는 원래 신이 마땅히 수행했어야 할 과업을 이제라도 맡고자 함에 불과하옵니다.”
알고는 있구나.
공무원 이전에 인간으로서 괘씸한 부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괘씸한 인간이 관찰사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이다.
그가 비록 인성에는 하자가 있을지라도 능력 면에서는 이를 메울만한 자질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반대로 이런 사람이 알면서도 태만을 저지르니 더욱 괘씸하기는 한데…….
일단 제 몫을 하기로 했다니 망정이다.
* * *
처음 관찰사에게 일러둔 이후, 함경도 감영에서는 세법의 개정을 두고 분분하게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난해한 문제였기 때문일까.
논의만이 분분하게 이루어질 뿐 타개의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양자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같은 주장만을 거듭해 반복하므로, 간극이 조금도 좁아지지 못한 실정이옵니다.”
함경도 관찰사 밑에서 일하는 판관判官의 대답이었다.
나는 혹여 이 사람들이 겉으로만 바쁜 척을 하는 게 아닐까, 회의록會議錄을 작성하여 납부하게 했다.
관찰사가 기분이 좋지는 않을 수 있지만, 의심 외에도 혹 내가 회의록을 보며 타개의 여지를 발견해낼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판관이 본궁을 방문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작성한 회의록을 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은근했던 의심과는 달리 상세한 회의록에는 판관의 말마따나 첨예한 대립만이 방대한 분량에 이어서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감영에서 고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핵심 이해관계자들인 함흥의 상인들까지 불러놓아 세법 개정의 방향성과 정당성을 논의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에는 제자리걸음이란 말인가…….’
제도의 미진함 이전에 쟁점은 이것이었다.
관에서는 세금을 납부할 대상들이 자의적으로 세액을 결정할 권한이나 여지를 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그래서도 안 되었고 말이다.
반대로 상인들은 제도의 미비함을 들어 관의 권한을 약화하거나 심지어는 빼앗고자 하였다.
양자의 대립이 이러하니 논의가 반복만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각자 쟁점에 대한 본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관에서는 순전히 제도의 개선만을 바라고 있는데 장사치들은 제도의 변화로 돌아올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고 있으니…….’
맞물리지조차 못한다.
이러니 합의가 요원할 수밖에.
잿밥만을 생각하는 장사치들이 괘씸하긴 하지만, 그것을 책망할 수는 없다.
상인이 이문을 쫓는 건 본디 그들의 업이니까.
애초에 이들이 제도의 미진함을 제기한 것도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당한다는 판단이 서서였다.
어느 정도는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고, 상인들이 이를 제기한 덕에 제도의 미진함을 인지하고 금납의 진흥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달리 말하면 이 단계에서는 상인들의 역할은 끝났다는 건가.’
그들이 금납 확대의 핵심적인 이해관계자는 맞지만, 그들의 본의는 제도 개선에 있지 않다.
사업과 경제의 발전은 필수적이고 그 과정에서 상인들의 역할이 불가결하다는 점 또한 사실이지만, 그들은 거국적인 목적으로 상업과 경제를 발전시키는 게 아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 하나를 주워도 이익을 위해서이고, 대상단을 꾸려 군림하더라도 이익을 위해서이다.
애초에 국가의 정책, 심지어는 국가를 유지하는 근간이기도 한 세법을 함께 논의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일단 그려놓은 개요에서, 이것이 실현되었을 때 경제나 상계에 미칠 악영향은 없을지 의견 청취는 적절할지 몰라도…….’
공공을 논할 역할은 아니고, 그럴 자격 또한 없었다.
“방대한 회의록을 작성하고 내게 가져오기까지 하느라 판관과 감영의 수고가 작지 않겠습니다.”
젊은 판관에게 이르니, 그는 아직 때가 덜 탔기 때문인지 진심으로 감격한 얼굴로 조아렸다.
“소관이 과분한 직책을 얻어, 분수에 넘치는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라고는 오직 공무를 수행하는 것뿐이니 그저 그리하였을 뿐이옵니다.”
관찰사의 의례적인 발언과는 달랐다.
“경과 같은 전도유망한 관리는 주상主上의 치세에서 앞날이 더욱 밝을 것입니다.”
“과, 과분한 하교에 망극하옵나이다.”
“이만 물러나셔도 좋습니다.”
“예에…….”
판관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이에 복도를 지키는 내시가 문을 열어주었다가 닫았고, 나의 집무실 아닌 집무실에는 여태 써온 것과는 다른 서안과 두꺼운 회의록만이 남았다.
‘일단 회의록에 내용이 없지는 않으니, 일독하면서 양자의 의견과 근거를 종합한다면 방법이 보일지도 모른다.’
난해한 문제인 만큼 확신은 없었지만, 아랫사람에게 일을 맡겨놓은 채 마냥 방관하는 건 나의 방식이 아니었다.
* * *
선선하고 차가운 바람이 본전의 내부를 휩쓸었다.
정신을 차리겠다고 일부러 문들을 열어놓은 탓이었는데, 역시 오한만이 들 뿐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방대한 회의록은 이미 완독을 마쳤다.
한 번만 읽었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읽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이골이 날 정도로 들춰본 탓에 중요한 내용은 사서삼경처럼 뇌리에 박혀 버렸으니까.
“……돌아버리겠군.”
세상에 산재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난제는 아예 해결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어쩌면 함경도가 당면한 이 문제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관에서 구상하는 개선들이란 허울만 그럴싸할 뿐 실효성은 없어 조악했으며, 상인들은 저들 이익만을 위한 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니 일고할 가치조차 없었다.
어느 쪽이라도 도저히 편을 들어줄 수 없을 지경이다.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은 진리나 마찬가지고,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 또한 분명한데도 말이다.
‘금납을 통한 수취의 일원화…….’
그러나 무턱대고 이 수준을 강제한다면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할 테지.
함경도가 본디 농업이 크게 진흥하지 않은 데 반해, 생산하고 국경을 통해 유입되는 가죽과 보석 등의 상품은 있어 상업이 미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수준일 뿐.
절대적인 경제 규모는 여타 지역과 비교하면 한참 뒤떨어진다.
금납의 일원화를 시행하기에는 민간의 경제활동이 활발하지도 않고, 화폐의 유통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러한 환경에서 금납의 일원화를 강요하다간 즉각 전황錢荒 현상이 발생하고, 물가는 교란되어 민생이 파탄 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전개다.
조선 전기의 황금기를 주도한 세종대왕이 어찌하여 화폐의 도입에는 실패했던가?
결국에는 환경, 그러니까 현실이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책은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정책은 그저 현실에 따라 적합한 형태를 취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을 유도하고 추구해내는 정도가 한계일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외려 현실의 발전과 질서를 저해하는 경우가 대다수지.’
지금 함경도의 조세 방식이 그러했고 말이다.
‘과도기라서 그래. 제도가 뒤처지는 동안 현실의 발전이 너무 빠르면, 그 간격만큼 마찰과 분란이 발생하기 마련이지…….’
그다지 의미는 없는 고찰이었다.
마치 해는 동쪽에서 떠오르고, 바람은 불며, 물은 흘러내린다는 수준의 진리니까.
왕은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잠깐. 내가 왜 현실의 과도기에 집착하는 거지?’
과도기란 말 그대로 두 상태의 중간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변화하지 않는 현실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현재 함경도는 분명 두 상태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전통적인 고전후古典後 농본 사회와 상공업의 발달로 화폐 중심의 경제가 도래한 근세近世 사이 말이다.
전자에는 이에 걸맞은 조세 방식이 있고, 후자 또한 이에 걸맞은 조세 방식이 있다.
전자는 조용조租庸調로 일컬어지는, 곡물과 인력 그리고 지역 특산품 그 자체를 거두는 방식이다.
화폐가 없으니 상품 그 자체를 종류별로 따로 거두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조선이 취해왔던 방식이다.
그러다가 경제가 발전하고 화폐가 도입되어 곡물과 인력, 지역 특산품을 모두 입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자 조세 방식은 금납화로 일원화되었다.
중국에는 이미 명나라 말기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는 이름으로 금납의 일원화에 다다랐다.
다양한 잡세들을 일원화하여 오직 은화만으로 납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도기에 있는 현재의 조선은 잡세의 일원화 단계에 있다.
공납을 철폐하고, 아직 화폐가 전반적으로 정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범용적인 곡물 하나만으로 세금을 거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영동 등 일부 지역에 한해서는 곡물 대신 옷감으로 대체하였으나 의의는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폐를 도입 및 확산시키고 금납을 허용하여, 궁극적으로는 금납의 일원화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선혜법 중심에 금납을 병행하는 현행 제도와, 금납 일원화 사이에는 어떠한 과도기가 있을까?’
전자를 조금 바꾸기만 하면 된다.
선혜법 중심에서 금납 중심으로.
병행은 금납 대신 선혜법으로.
함경도는 지리적 정치적 특성 탓에 선혜법이 아닌 조용조를 고수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선혜법이 아닌 조용조를 병행하면 될 따름이다.
‘마치 내가 선혜법을 순차적으로 확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과도기적 조세 방식을 발달한 함흥부부터 도입해 차근차근 주변 지역으로 확대해나간다면 적은 반발과 혼란으로 현실의 과도기에 정책의 과도기를 발맞춰 진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과도기로서 급변하는 현실에 정확히 들어맞는 제도를 강구한다는 건 품이 너무 많이 들어갈뿐더러, 그럼에도 일시적인 해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계속 급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답으로서는 다소 엉성할지라도, 정책 역시 과도기적인 형태로 운영하면 되지 않겠는가?
궁극적으로는 금납의 일원화를 전제하고, 또 추구하는 형태로서 말이다.
이미 현실 또한 금납 일원화에 적합한 화폐 중심의 경제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그래. 이것이 정답이다!’
시점을 반대로 옮기는 것뿐이지만 편의의 개선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다.
공납 중심의 현행 제도를 현실에 끼워 맞추고자 한다면, 도에서 요구하는 무수하고 다양한 공물들의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가치들을 품목마다 일일이 규정해야만 한다.
애초에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은 하겠는가?
반대로, 금납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계산은 훨씬 쉬워진다.
필요한 공물들의 가치 전반을 뭉뚱그려 계산한 다음, 이를 차질없이 확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세율만 내놓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물론, 화폐가 백성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 만큼 일부는 기존의 방식이 익숙하고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기존의 방식대로 공납에 응하면 된다.
아직은 경제와 상거래가 활달하지 않은 만큼 어떠한 특산품들은 관이 시장에서 확보하는 것보다 생산자 혹은 산출지에서 입수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도 할 테니, 이러한 절충은 관에서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미쳤군. 애초에 정책에 사족蛇足 따위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도대체 왜 공물들의 시시각각 변동하는 가치를 공정히 계측할 방법 따위를 고민했지?’
단지 시점과 중심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는데 말이다.
생각보다, 격쟁인의 하소연에 너무 매몰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상인으로서 공물의 가치를 관에서 일일이 환산해주는 것을 막고 시장을 교란해 세금을 덜 낼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관에서도 어떻게 정책을 수립해야 그런 상인들의 얄팍한 술책을 차단해낼지만 고민했고 말이다.
하지만 정답은 애초에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있지도 않았다.
‘정답은 현실과 내가 알고 있는 미래 사이에 있었다.’
정책의 공정성? 시시각각 변동하는 무수한 공물들의 가치를 어떻게 매번 공정히 계량할 것이냐?
멍청한 의문이었다.
‘……어쩌면 관이나 상인 모두 나와 같은 방식을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언급하지도 않았고.
‘왜냐하면, 기존의 조세 방식에서 관점 자체를 옮겨 금납이 중심이 되면 화폐의 발행과 유통을 관장하는 주조소와 은행이 주도권을 가지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