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377화
경제의 부속인 화폐를 통한 수취가 중심이 되면, 분명 경제의 큰손인 상인들이 악용할 여지는 분명 생긴다.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는, 감영에서 예산을 집행할 때 의도적으로 물가를 올려 부정한 수익을 노리는 방식이 있겠지.
하지만, 상인들의 무기인 화폐 자체의 주권이 주조소와 은행에 있으니 나라에서 능히 징벌할 수 있다.
금납 중심의 수취는 확대하고 함경도에 유입되는 화폐는 축소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전황錢荒을 일으키고, 이로써 상평통보의 가치가 폭등하면 각각 화폐의 발행권을 보유하고 유통을 주도하는 주조소와 은행이 함경도의 경제를 잠식해 버리는 것이다.
‘잔챙이들이 설치려 들면 진짜 시장 교란이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주조소는 내수사의 부속이며, 은행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존재는 왕이다.
두 조직의 정점에는 현재의 임금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함경도의 조세 정책이 금납 중심으로 재편되었을 때 발생할 현상은 명백하다.
함경도의 독자적인 세금 수취 및 재정 집행의 관례가 무색하게도 이곳 경제에 왕의 일방적인 지배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왕권 전반의 강화로도 이어지겠지.
함경도가 왕에게 경제적으로 귀속되는 건 물론이고, 여기에 금납 중심의 세법은 함경도 너머에서도 확대될 테니까.
마침 좋은 명분도 생긴 참이었다.
‘품계만은 대신大臣에 준하는 관찰사와 지역의 유지有志로서 함경도 전반에 뿌리내렸을 아전들, 그리고 상재를 발휘해 상단을 이룬 상인들까지 모두 한 가지에서만은 동의했겠군…….’
이 분쟁에서 왕이 난입해 죄 평정해 버리는 일은 원치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내가 좋은 타개책을 떠올렸는데.’
격쟁인은 상왕인 나를 앞세워서 제도적으로 세금을 회피하고자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공사公私 양면으로 두들겨 맞을 일만 남을 듯했다.
이리끼리 싸우는 데 호랑이를 끌어들여서는 모두를 호랑이 입에다가 밀어 넣어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격쟁인의 괘씸한 발상을 최초 인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딱히 비난도 유감도 없다.
상인이란 이문을 쫓는 게 습성이고, 이를 세상이 질책할 수는 없듯이.
알량한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굴렸다가 도끼로 제 발등이 아닌 대가리를 찍어버린 꼴이 되어버린들 세상이 동정해 줄 수는 없다.
그냥 참교육 당하는 거지.
‘그러게 왜, 피곤해 쓰러지려던 사람 단잠을 깨워서 이런 일을 만드냐?’
제도의 미진함을 개진하는 건 좋은데, 이참에 두고두고 해 먹겠다는 태가 나버렸으니 보호해주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아들아, 이 애비가 기껏 은퇴했다마는 여기서도 한 건을 했구나.’
결과적으로 이 일이 왕권의 강화로 이어질 것인 만큼, 나는 궁극적으로 아들에게 나조차 예기치 못한 선물을 주게 된 셈이다.
이것이 순전히 제도의 개선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우습기까지 했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
공익公益을 추구했더니 아들에게 큰 선물도 주게 되지 않는가.
* * *
“이제 회의록은 가져오지 않아도 됩니다. 감영에서의 논의 또한 당분간은 중지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예?”
관찰사가 당혹한 얼굴로 물었다.
“어찌하여 신에게 그 같이 이르시옵나이까. 혹, 좋은 방도가 떠오르셨사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한참을 고민하다 보니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으므로, 한양의 주상에게 글을 보내 문의하였습니다. 주상이 합당하다고 여긴다면 곧 그리 시행하겠지요.”
“…….”
조세는 나라의 근간이니, 세법은 곧 대법大法이다.
함경도가 아무리 자체적으로 운영되어 왔다고는 하나 이러한 중대사에 왕을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
관찰사도 짚이는 구석은 있었는지 당혹한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 들었을 때 곧장 현실성과 타당성을 따져 시행했다면 적어도 세목細目이나 확대에 있어서는 주도권을 가졌을 텐데.’
태만을 부리다가 그만 모든 것이 왕의 소관으로 넘어가버렸다.
앞으로 함경도의 조세 정책은 온전히 왕의 의사에 따라 시행될 것이고, 세목과 확대 역시 왕의 의도대로 되겠지.
이미 한계까지 강해진 왕권王權을 의식해왔을 관찰사로서는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런 문제를 의도적으로 방기해왔다는 점 또한 인지된다면 출세를 보장받았더라도 말 뿐에 지나지 않을걸…….’
그래도 관찰사에게 능력이 없다고는 느껴지지 않았으니, 아들의 의사에 잘 따라주기만 한다면 자리보전만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한동안은 왕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겠지.
이 역시 한양에서 있을 아들로서는 만족스러울 일이다.
함경도가 한양과는 제법 멀어 의사가 곧이곧대로 반영되기 어려운데, 마침 관찰사가 아쉬운 지경에 놓였으니까.
‘어떻게 이렇게 만사가 착착 이쁘게 맞아들어가냐.’
아무래도 진짜 복을 받은 게 분명하다.
* * *
내가 아들에게 개진한 세법은 즉각 반영됐다. 함흥부의 읍치에 한하여 금납 중심의 조세 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전황錢荒이 예상되었던 만큼, 함흥부에는 은행의 지점이 설치되었다.
세법의 개정으로 약간의 부산스러움은 있었으나 시끄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두 방식이 병행된다는 점은 이전과도 다를 바 없었고, 거시적인 변화 또한 크지 않았다.
애초에 부민 대다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예리한 관념을 보유하지 않았다.
이런 미묘한 변화에서 야기될 거대하고 분명한 흐름을 감지는커녕, 예상조차 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직 이를 포착해낸 소수만이, 호들갑이라는 치부를 받으며 불만을 토로할 뿐.
그러나 이러한 불만조차 대다수 세인은 공감하지 못했고, 공감할 수조차도 없었으므로, 금세 잠잠해졌다.
이로부터 달포가 지났다.
세법의 개정조차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린 시점에서, 함경도는 어제나 그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를 이어갔다.
백성의 대다수는 한 해의 결실을 위해 바삐 살아갔고, 한때는 치열하게 대립했던 관과 상인들 또한 각자의 과업에 다시 집중했다.
사람 사는 곳에서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법이며 이문은 느리고 게으른 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법이니까.
그리고 오늘도 하늘이 맑고 찬란한 밤하늘로 변모했을 때, 본궁은 국경 너머에서 찾아온 손님들로 바빠졌다.
“대왕!”
크고 두꺼운 체형에 갖옷을 걸친 사내가 인사했다.
“조선의 명망 높으신 대왕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본궁 내부에는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의 사내들로 즐비했다.
다들 함경도의 국경지대에서 저마다 부족을 이끄는 추장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만주를 통일한 홍타이지를 일방적으로 분쇄한 전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당시 조선을 이끌었던 주역이 함경도로 이어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참이었다.
오늘의 자리는 이러한 연유로 만들어졌다.
누가 만주의 통합자였던 홍타이지를 분쇄하고 조련했으며, 그의 나라였던 금나라를 굴복시키고 구속했는지 직접 보겠다며 몰려든 것이다.
‘내가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더 인기가 많았군.’
추장들은 국경지대 번호藩胡의 수장들로 조선과의 교류가 중요하기 때문인지, 대부분은 어색하게나마 조선말을 구사할 줄 알았다.
내게는 만족스러운 점이었다.
단순히 소통이 편해져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동북아의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의 수장이었고, 조선의 문명을 추종하는 외부인들을 마주하는 건 무척 즐거웠다.
“뭇 세력의 주인들이 이미 권좌에서 은퇴한 늙은이들을 보고자 이렇게 모여주었으니, 내가 기쁜 마음이 큽니다.”
소소한 겸양이었다.
“내 비록 대업大業은 자식에게 물려주었으나, 종묘와 사직에 헌신하고 백성들을 돌보며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으므로, 일대 지근거리의 수장들과 한 곳에 모여 우의를 다지는 이 순간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조선의 영토가 혼란한 중원에도 뻗어 나가고, 망망대해 한가운데 섬에도 자리 잡은 오늘날에조차도, 함경도의 국경지대는 늘어난 국경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수위에 드는 위험성과 혼란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번호들은 고작 전왕 시절에 니탕개泥湯介와 우을기내于乙其乃, 율보리栗甫里 따위의 추장들이 서로 결탁해 조선을 침공한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번호들의 잠재적인 위협 외에도, 이들의 북쪽 너머에는 통제받지 않는 야인여진이 있었다.
‘그렇다고 군사를 보내 평정해 버리자니 인구는 적고 문화는 상이한데 생산성까지 떨어지는 계륵인지라.’
도저히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한 땅이 아니었다.
이미 함경도조차 세입보다 세출이 많아, 아예 거둔 세금을 중앙으로 보내지도 않고 알아서 쓰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춥고 척박하며 얼마 없는 인구조차 습속이 험하고 야만스러운 강 너머는 어떠하겠는가.
오랑캐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토벌이나 소탕을 시도할 수는 있어도, 완전한 평정과 동화를 도모할 수는 없었다.
‘이런 밑 빠진 독에 투입할 여력이 있다면 차라리 요동이나 중원을 개척하고 말지.’
왜 득 될 것 하나 없는 험지를 개척하려 들겠는가?
‘그래서 실제로 요동과 중원을 개척하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을 안정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번호들과 긴밀히 교류하며 그들에 대한 우호도와 영향력을 강화하여 ‘번호藩胡’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권장하고 유도하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그들이 번호藩胡라고 불리겠는가?
마치 입술이 이를 덮어 한풍을 막아주듯이, 번호藩胡들이 더 야만스러운 족속들에게서 조선의 국경을 덮어주고藩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이 좋고 여유가 있다면.’
간접지배 형식으로 두만강 이북을 개척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험지에서 살아가는 오랑캐들을 통한다면 개척이나 지배에도 차질이 적을 테니까.
‘중원의 왕조들 또한 이런 식으로 이민족을 지배했지.’
그러나, 중원에서 이렇게 만들어진 집단은 제국의 지배력이 약해질 때마다 내분을 일으켰다.
평소에는 제국이 변방 험지에서 살아가는 이민족들을 간접 지배하는 대가로 제공하는 자율성과 지원을 받으며 잘 살다가, 제국이 흔들리면 곧바로 세력을 넓히려 드는 것이다.
‘청나라 이전에 명나라 내부에서부터 난을 일으켜, 제국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사안지란奢安之亂이 이런 경우였지.’
간접 지배를 위해 설치한 집단을 너무 오래 방치해두면, 뿌리를 내리고 독자성을 강화하다가 끝내는 반기마저 들게 되는 것이다.
‘당장 조선이 함경도 너머에서 이 같은 사업을 꾀할 수 있을까? ……역시, 요동과 중원에도 거점을 마련한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벅차겠지.’
이외에도 조선은 남해의 포르모사도 평정했고, 이미 금나라를 통해서도 요동 전체에 대한 간접지배를 실현해나가고 있었다.
여기에 연해주까지 욕심을 새로 내기에는 이미 할 일이 많은 셈이다.
‘……그러나 내가 아들과는 별개로 함경도에 와 있으니 묘한 욕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유능한 아들이 조선의 왕위와 함께 이상의 과업들은 승계했으니, 새로 생겨난 상왕의 존재가 괴뢰집단 하나쯤은 새로 맡아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이 더 길어졌지만, 이 이상은 역시 시기상조다.
내가 두만강 너머를 탐내고자 하여도 아들이 원치 않는다면 별수 없으니까.
지금은 은근한 복심을 숨기고, 내 존안을 보기 위해 몰려든 추장들을 상대해야 할 때였다.
나는 주변의 얼굴들을 둘러보고서 미소지었다.
“우리 다 함께, 천 년의 우호를 기약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