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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379화 (379/380)

인조, 명군이 되다 379화

며칠 뒤 관찰사는 판관을 통해 자신의 총평과 북방 수령들의 기록을 보내왔다.

대개는 짧게나마 정기적으로 보고서가 작성되어 있었는데, 일부는 몇 개월 단위로 기록이 전무하거나 혹은 무성의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기도 했다.

“내가 재위하던 시절에도 잘도 이렇게 태만을 저질렀군.”

그 한심한 실체를 보아하니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당대의 관찰사들이 못마땅했고, 그런 관찰사들의 역임을 허락한 나 역시도 불쾌했다.

관찰사나 당대의 수령들이나 내가 직접 함경도로 와서 옛 기록을 들쑤셔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겠지.

하지만 알게 되었으니, 아직 현역이라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몰랐으면 모르는 것으로 끝인데, 알게 되었으니 그냥 넘어가 줄 수 없거든.

“다 죽었다, 진짜.”

나는 서안 한쪽에 문방사우를 펼쳐놓은 채 태만한 수령이 있다면 직함과 이름을 기록했다. 이건 아들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질 거다.

그동안 나는 충실한 기록과 보고들을 검토했다.

표창할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기록해두면서, 머릿속으로는 아직 가보지 못한 두만강 너머의 정세를 그려나갔다.

각 읍의 경계마다 어떠한 부락이 위치했고 부락들의 수장은 누구이며 다른 수장 및 부락과는 사이가 어떠한지.

그리고 그러한 번호藩胡들 너머의 세력도 또한.

내가 재위하는 동안 조선이 실력 행사를 거듭하면서 국력을 증명했기 때문일까.

과거에는 다소 반항적이었던 번호들조차 근래애는 세대교체와 함께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조선의 저력을 몸소 체험해보고 싶은 자는 없었을 테지.

그러나 국경의 이런 안온한 분위기에, 정탐 활동은 축소되었는지 번호들 너머의 동향에 대해서는 거의 파악된 바가 없었다.

드문드문 간접적인 형태로 알려진 것들이 있으나, 지극히 혼란스러운 야인의 땅에서 족히 수년이나 된 부스러기 같은 정보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건 추장들에게 물어보면 확실하겠지. 일단은 건수 잡아서 다시 모아볼까.”

마침 그들의 수장이 될 봉림대군이 본궁을 방문한 참이다.

내가 봉림대군을 금상今上의 동생이자 아끼는 차자이며 마침 함흥을 방문해 소개하고자 한다면 다들 기꺼이 응할 터.

여건이 좋으니 그들의 좌장座長으로 추대하기도 어렵지 않을 테고, 더욱이 봉림대군은 체격과 함께 무재를 갖추었으므로 추장들을 납득시킬 수도 있을 터였다.

‘활쏘기 대회 한 번 열어주면 제대로 증명할 수 있겠지.’

그동안 호랑이를 마치 동네 똥개 잡듯이 잡아대었던 봉림대군이다.

하물며 이제는 외견마저 산적으로 전락해버린지라, 여진족인 추장들에게조차 이질감 적게 받아들여질 터.

‘좋아, 좋아. 봉림대군이 네가 비록 조선의 왕은 되지 못했어도 칸汗은 되겠구나.’

이것이 바로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

어쩌면, 장난 아닌 운명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봉림대군이 원래 타고난 운명처럼 어떻게든 국가적 집단의 수장이 되게 되었으니까.

* * *

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과녁에 화살이 꽂혔다.

“관중貫中이오!”

화살 가림막인 핍乏 너머에서 내시가 외쳤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수 있으므로 북을 치고 붉은 깃발 또한 휘둘렀다.

무려 과녁을 120보 거리에 두었으니까.

미터법으로 따지면 150m. 사람 얼굴조차 똑바로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관중이라 외친들 아련하게만 들릴 따름이다.

깃발 들어야지.

그만큼 과녁까지의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여진족 추장들 또한 꽤 인상적이라는 얼굴을 하고서 박수를 쳤다.

“대감의 활 실력이 과연 범상치 않으십니다. 이 같은 실력을 어찌 연마하셨습니까?”

한 추장이 묻자 내가 봉림대군을 대신하여 나섰다.

“나의 둘째는 장성한 이후로 궐을 박차고 나서, 산야山野를 헤치고 다니며 맹수들을 사냥했지요.”

“……?”

추장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들을 지었다.

각자가 어색하게나마 조선말을 구사하는 추장들이다. 조선에 대한 문화에 해박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왕자가 궐을 나가서 맹수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니?

험한 호지胡地에서조차 그러고 사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믿기지 않는 얼굴들을 하십니다만 이 녀석이 어디 평범한 왕자군王子君의 상입니까?”

“아바마마…….”

“봉림대군이 일찍이 궐을 나섰다는 것도 사실이고, 첩첩산중을 다닌 것도 사실입니다. 한때는 백두산의 정상에서 지내기도 했지요. 이례적인 사례인 건 맞습니다만 나의 둘째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내가 호언장담을 하니 추장들은 그런가, 싶어하는 표정을 지었고 봉림대군은 특별하다는 말이 민망했던지 짙은 얼굴에 약간의 붉은 기운이 올랐다.

“물론, 맹수를 사냥하고 다녔다는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봉림대군은 단호하고 강건한 사람이어서, 절대 공허한 글줄로는 안부를 전하지 않았지요. 오직 짐승의 털가죽만을 멀리서 진상하여 자신의 근황을 전했습니다.”

그러한 처신이 제법 인상적이었을까.

추장들은 감명이라도 받은 얼굴을 하고서 봉림대군을 바라보았고, 봉림대군은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짧게 헛기침했다.

“크흠.”

봉림대군을 소개하겠다는 나의 목적은 달성된 듯했다.

다만 아직 활쏘기 시합은 끝나지 않아서, 봉림대군의 시범 겸 차례가 끝나자 수령들도 차례대로 단에 올라 순巡을 비웠다.

다들 야만의 땅에서 수장 자리를 지켜온 만큼 실력들이 만만치는 않았다.

하지만 봉림대군에 비할 만한 자는 없어서, 그들의 호승심은 봉림대군의 존재만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 * *

“내가 전도유망한 후계자를 세자 자리에서 썩힐 수 없어 기껏 보위를 물려주었는데, 막상 이곳으로 오니 몸이 근질거립니다.”

활쏘기가 끝난 뒤 주연酒宴이 마련된 장소에서.

나는 신뢰할만한 추장들을 하석에 앉혀둔 채 안쪽의 상석에서 일렀다.

“…….”

추장들은 나의 발언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는지 안색을 굳었다.

나는 재위 기간 열성적으로 국경을 확장시킨 임금이다.

그런 내가 본인들이 변방에 있는 함경도로 와서 ‘몸이 근질거린다.’고 함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추장들 딴에는 주변을 시위하던 무사들이 갑자기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상황을 머릿속에서 그릴 법도 했다.

나는 굳고 당혹한 면면들을 마주한 채로 느긋하게 일렀다.

“다행히 그대들은 내가 재위하는 동안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번호藩胡로서의 역할을 다해주었지요. 그런 그대들이라면, 내가 믿고 대사大事의 일익을 맡겨도 될 듯합니다.”

여러 추장이 저마다 한숨을 돌리는 가운데 하나가 물었다.

“대왕께서 말씀하신 대사의 일익이라 하심은…….”

“당연히 두만강 이북을 평정하는 것이지요.”

“……!”

“내가 이미 홍타이지를 굴복시키고 금나라를 구속하였는데, 하찮은 야인들이 주변에서 횡행하는 모습을 방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추장들은 시선을 깔거나, 두 손을 내려 무릎을 짚는 등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강대한 조선의 강역이 그들 너머로 확장한다면, 군소한 저들의 부락들이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건 만의 하나라도 불가능할 터.

그리고 이들은 본디 용의 꼬리보다는 닭의 머리를 바라는 자들이었다.

아니었다면, 진즉 조선에 귀부했지 번호로 남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세파世波는 무정하고 가혹하다.

다른 역사에서는 금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어 그들의 일부가 되었을 그들은, 역사의 개변으로 약간은 독립성을 더 누리게 되었으나 이제는 그것조차도 끝이었다.

이 역사에서 그들에게 닥칠 평정의 파도는 금나라가 아닌 조선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의 조선은 초창기의 금나라나 청나라보다 군사적으로 강대하고 제도적으로 치밀했다.

일개 추장 따위가 항거하려 든다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으로 배제될 터.

“내가 신용할만한 사람들을 이 땅의 사준사구四駿四狗로 삼아 하찮은 무리들을 배제하고 조선의 국경을 흑룡강까지 넓히고자 하는데, 부디 그대들이 나의 명을 쫓아 붘녘까지 말과 군사들을 몰아주었으면 합니다.”

흑룡강은 만주의 북쪽 끝자락에 위한 거대한 강이다.

장차 금나라까지 조선에 동화될 것을 염두에 둔다면, 조선의 북방 국경으로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자연국경이 되어줄 터.

“…….”

추장들은 섣불리 찬동하지 못했다.

저마다 조선의 국경에 붙은 군소한 무리만을 이끌며 빈대와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과연, 이 땅의 지척에서 야망을 꿈꾸는 자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고 적당히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교양을 보유한 자만이 오랫동안 목숨과 하찮은 지위나마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여기에 사세事勢를 읽고 대세에 순응하며 주인의 명령에 잘 따르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자신의 새로운 과업을 잘 수행할 수 있다면, 더는 닭의 머리로는 남지 못하더라도 용의 발톱은 될 수 있겠으나, 그렇지 못한다면 그 용의 발톱에 가장 먼저 찢어지고 말 테니까.

“모든 건 귀공들의 선택이고, 나는 각자의 의향을 존중합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부디 주연이 파한 뒤 각자의 처소에 이르러서 깊게 고민하고 결정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추장들에게 이르자, 그들 중 가장 눈치 빠른 사람이 즉각 주안상을 밀어내고서 무릎을 꿇었다.

“깊게 고민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대업을 맡기시니 소인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소인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이 추장은 눈치만 빠른 게 아니라 처신마저도 좋았다.

대답과 함께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찧었으니까.

그 광경에 다른 추장들도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앞다투어 주안상을 밀어내고서 머리를 박았다.

“소인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대왕!”

그리고서 묵직한 적막이 이어졌다.

나는 충분히 뜸을 들인 뒤, 추장들이 저마다 불안해질 즈음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예기치 못하였는데 그대들이 앞다투어서 충성을 맹세해주니, 나는 고맙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과분한 인연들을 만나 단숨에 북녘 정토의 기틀을 마련하니, 오늘 이 자리가 더없이 즐겁습니다. 다들 고개를 드세요.”

추장들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이 자리는 비단 친목만을 다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바야흐로 군신君臣의 맹약을 맺고 함께 드넓은 땅을 평정하기로 결의하였으니, 이 또한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궁인을 시켜 술을 더 가져오게 한 다음, 추장들의 앞을 다니며 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자리로 돌아와 직접 잔을 채우고 높이 드니, 추장들 역시 어사주를 높게 받들었다.

“대조선의 무궁무진한 영광을 위하여!”

* * *

새벽이 되어 추장들이 막 해산한 시점에서.

연회의 장소로 쓰인 복층의 누각, 풍패루豊沛樓는 사람의 온기를 잃고 빠르게 식어내렸다.

이 장소를 채우는 건 오직 시원한 바람과 그 아래에서 갈 곳 잃은 채 굳어가는 안주들과 잔 바닥을 적시는 술뿐.

몇 없는 본궁의 궁인들이 이러한 주안상을 차근차근 내어가며 풍패루를 비우는데, 오직 이 풍패루의 주인인 나와 둘째 봉림대군만이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호인胡人들이란 본디 사납고 야만적이어서 다루기 어렵다고 배웠는데, 아바마마께서는 몇 마디 말로써 그들을 모두 무릎 꿇리셨사옵니다.”

“새삼스럽게 아비에게 금칠을 하는구나.”

“……소자는 아바마마처럼 하지 못할 듯하여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그래?”

“……예.”

봉림대군의 얼굴에 짙은 근심이 어렸다.

“그들을 무릎 꿇린 것은 나의 몇 마디 말이 아니다. 나의 치세와 행보가 증명한 것이 그들의 무릎을 꿇렸지.”

선조나 오리지널 인조 같은 하찮은 놈들이 백날 입을 놀린들, 과연 그들이 따랐겠는가?

따르지 않으면 당장 자신의 골이 깨져 죽으리라는 걸 나의 행보가 증명하고 있으니, 죽기 싫어서라도 따라야 했을 따름이다.

“나는 외려 그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굳이 고민할 시간을 주고자 했던 건 불충할 종자를 미리 걸러내기 위함이었는데. 놈들이 먼저 지레 겁을 먹고 허리부터 숙였지.”

이래서야 불온한 놈을 미리 솎아낼 수가 없었다.

“너는 다른 추장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여 수좌首座를 석권하였다. 이만하면 과하지 않게 좋은 인상은 남겨준 셈이다. 그 누구도 자신보다 못난 사람을 따르고 싶어 하지는 않지. 설령 지위나 세력이 뒷받침하더라도 말이다.”

그 점에서 봉림대군은 추장들이 받들기에는 적절한 실력과 배경이 모두 잘 어우러지는 셈이었다.

이런 요소가 너무 과하다면, 외려 내가 잠재적인 불안 요소를 미리 솎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통치와 지도가 어려워질 수 있다.

“추장들이 일단은 나와 조선에 질려 충성을 맹세했으나, 술에 깨고 난 뒤 각자의 숙소에서 식은 머리로 고심해본다면 태도가 달라질 자들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하물며 평정은 이 땅이 아닌 두만강 너머에서 이루어질 터이니, 더더욱 그렇지.”

“……두렵습니다.”

“호인을 반인伴人 반수半獸라고 생각하여라. 두 발로 서서 입고 말하는 것은 사람과 다르지 않으나, 습성은 짐승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첩첩산중에 비경을 들쑤시고 다녔던 봉림대군이라면 야생동물을 다루는 데는 도가 텄을 터.

“또한 인지하거라. 너는 본디 무리를 다스릴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

“네가 아니라면 누가 호지에서 야만한 무리들을 거느릴 수 있겠느냐? 첫째도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첫째의 교육은 장차 녀석이 조선을 다스릴 것을 전제하였고, 그 과정에서도 느꼈던 첫째의 품성은 조선을 다스리기에도 다소 이상적이라 여겼을 정도다.

그런 첫째라면 반인반수나 마찬가지인 호인들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할 터.

외려, 봉림대군이 첫째는 물론 나보다도 더 호인胡人들을 다스리는 데 적합했다.

“당장은 네 스스로를 믿지 못하여도 상관없다. 장차 추장들을 거느리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나는 네가 타고난 운명을 믿는다. 이 나라 왕실에 내재한 제왕의 혈통이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 너는 내 아들이기도 하거니와, 오래전 모든 야인들을 발밑에 꿇렸던 태조대왕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태조대왕의 성업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함흥본궁은 본디 태조대왕이 자랐던 생가에 세워진 궐.

“내가 추장들 앞에서 잔을 들고 외친 말을 기억하느냐?”

“예……. 대조선의 무궁무진한 영광을 위하여, 라고 말씀하셨사옵니다.”

“네가 그리 할 것이다. 사나운 무리를 이끌고 흑룡강까지 나아가라.”

“……예.”

봉림대군이 결의했다.

“아바마마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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