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2화 (2/119)

〈 2화 〉 정시현(남자) ­> 정시현(여자)

* * *

맑은 오후.

방에 나 있는 창에서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검은 머리 소녀의 눈꺼풀을 때렸다.

이윽고 소녀가 보랏빛 눈동자를 느릿하게 움직여 쏟아지는 햇빛을 마주했다.

침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탁자에 얹힌 해골모양 자명종이 멋대로 울려대며 그녀의 귓바퀴를 긁어댔다.

"에이 씨"

분명히 알람을 꺼뒀는데.

소녀가 가느다란 팔을 뻗어 자명종을 멈췄다.

눈을 반 쯤 뜨고 있던 소녀가 다시금 잠을 청하려다, 잠이 이미 다 달아난 걸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흰 발을 내디뎌 자연스레 화장대 앞으로 간 소녀가 거울을 마주봤다.

그녀가 눈 앞을 가려대는 앞머리를 대충 귓가로 넘기고 거울 속에서 마주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그녀 자신이었다.

"얼레."

깜빡, 깜빡.

눈을 비벼 눈곱을 털어낸다.

"응?"

거울 속 미소녀는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괜히 방긋 웃으며 토끼귀를 만드는 애교를 부려본다.

사랑스럽다.

"헤?"

얼빠진 목소리마저 사랑스러운 미소녀.

혹시

"나인가?"

정신이 급격히 차가워진다.

"어... 어?"

방을 둘러본다.

칙칙한 색감의 가구, 벽에 덕지덕지 붙은 귀신이나 유령 그림들.

하지만 책상과 화장대에 널린 물품들로 미루어보아 여자아이의 방이 확실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켜본다.

2051년 2월 15일. 말도 안 되는 날짜다.

전화번호부엔 6명 남짓한 생소한 연락처가, 갤러리엔 뭔지 모를 호러사진과 제사 영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검은 공책을 펴본다.

정체 모를 글씨가 괴발개발 쓰여있었다.

아니, 그려져있다고 봐야하나.

자세히 보니 획순과 필법을 다 틀린 정자체 한자였는데 쓰인 내용은 대충 이랬다.

­ 2051년 2월 14일. 제를 이용해 영혼을 불러오더라도 몸에 강제로 안착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제가 아니라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하는걸까. 회장이 제안한 방법을 받아들이는 수 밖엔 없겠다.

문법이 개판이다.

그보다 제사는 위령을 위한 것인데 그것으로 네크로맨시 비슷한 걸 하겠다는 건가.

불가능한 게 당연하다.

'아니, 그건 다페르헤이드 설정이잖아 어지간히 중증이네'

뭐든지 다페르헤이드의 관점으로 보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번엔 창 밖을 내다봤다.

수천 번을 봐서 이제는 내 집보다 익숙한 극정 아카데미 건물이

"씨발?"

저게 왜 여깄어?

잠깐, 잠깐

나는 다시 공책을 펴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읽었다.

­ 2051년 1월 1일. 극정 아카데미 조기반 입소 날이다. 1인실을 제공한다는 건 좋지만 이 정도 규모로는 제를 치를 수가

­ 2051년 1월 4일.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는다고 선생에게 혼났다. 대충 아무데나 집어넣으라고 했더니 독서와 과학토론심화 반에 처넣어버렸다. 무시험 합격은 글렀다

­ 2051년 2월 7일. 고스트룰즈 회장이 내게 네크로맨시 연구를 도와달라 했다. 그가 흑마법을 파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부모님 혼을 불러올 수 있게

"이 무슨!"

극정 아카데미는 다페르헤이드의 배경이 되는 무대이고, 독서와 과학토론심화 동아리를 비롯한 여러 동아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고스트룰즈는 다페르헤이드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인 사령폭주 사건의 주범이다.

나는 급격한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휴대폰을 들어 여러가지를 검색했다.

그래봤자 이곳이 다페르헤이드가 맞다는 근거만이 후두둑 쏟아져 나올 뿐이였다.

"이게 뭐야 씨발!!"

나는 참지 못하고 고성을 질렀다.

그제서야 내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미성으로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크게 부푼 가슴이 보였다.

어찌나 큰지 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

내 몸을 더듬자 수많은 철야의 증명인 거친 피부는 어디가고 부드러운 살결과 기분 좋은 따뜻함만이 느껴졌다.

다시 거울을 봤더니, 그 속에선 예쁜 보라색 눈이 이 쪽을 당황스러운 빛으로 보고 있었다.

"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페르헤이드 속의 캐릭터에 빙의해버렸다.

그것도 대사 두 마디 있는 엑스트라로.

나는 검은 공책 겉에 적힌 이름을 봤다.

정시현.

청년실업자인 내 이름이자, 이 몸의 주인 주술소녀의 이름이다.

다페르헤이드엔 수많은 히든피스와 이스터에그가 있는데, 이 소녀의 이름은 그 중 하나다.

개발진의 이름을 숨겨놓는 이스터에그를 만들 때 내 이름은 이 소녀에게 들어갔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길줄이야.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좀 많이.

***

웃기게도, 난 게임에서처럼 정보창을 이용할 수 있었다.

­­­

이름: 정시현

진명: 음침한 주술소녀, 스피릿 각성자

특화: 부적술 ­ 위혼(C), 제사(A)

­­­

"으음"

갑자기 내 것이 된 예쁜 비음을 흘리며 제사 비법책에 되는대로 글씨를 써내려간다.

이 몸의 원주인이 봤더라면 대경실색할 일이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

1. 여기는 다페르헤이드고, 주술소녀 정시현에 빙의했다.

2. 다른 사람은 빙의하지 않은 것 같다.

3. 누가 끌고 들어왔는가?

4. 돌아갈 수 있는가?

5. 내가 빙의한 이 세계도 미완성인가?

6. 만일 미완성이라면, 이 세상엔

나는 적어내려가다 말고 펜을 멈췄다.

정말, 내 가정이지만 정말 그렇다면 꽤나 끔찍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내용을 적어내렸다.

6. 만일 미완성이라면, 이 세상엔 배드엔딩 뿐인가?

"."

우선 1번은 대전제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지금 음침한 주술소녀 정시현이고 이곳은 다페르헤이드다.

부정해서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2번은 내가 모이드사에 전화를 하며 알 수 있게 됐다.

이곳의 모이드사는 개발진의 이름을 붙인 캐릭터들이 제일 많은 곳이므로.

하지만 그들은 모두 평범한 캐릭터였다.

3번의 의문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듯 했다.

모이드의 주식이 상장폐지된 것에 앙심을 품은 초능력자, 해피엔딩을 완성하고 싶다는 내 소망을 들어준 신, 그 누구라도 의미가 없다. 궁금하긴 하지만,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따위 없다.

4번의 의문도 마찬가지.

내가 다페르헤이드의 전설로 내려오는 공간 마법을 대성하지 않는 한 아니, 하더라도 내가 있는 곳으론 돌아갈 수 없으리라.

다른 차원에 대한 설정은 마계나 천계 밖에 설정된 게 없었으니까.

아마 나를 이 곳에 집어 처넣은 존재가 날 꺼내줄 순 있겠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개새끼."

5번은 내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논제였다.

이 세계가 미완성이라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지장이 생긴다.

가령 한국 칠성 중 설정이 없는 두 명이 사라져버린다던가, 미개방 구역은 진짜로 갈 수가 없다던가

나를 더 불안하게 하는 건 정보창이 미완이라는 점이었다.

[빈 일반 부적(C)]

­ 부적술을 쓰는데 주로 이용되는 종이다.

아무렇게나 박혀있던 부적 뭉치에 대한 정보다.

정보창이 어느 정도 부실한 건 의도된 점이지만, 테스트 게이머들의 피드백에 따라 아이템에 대한 건 조금 더 상세하게 바꾸기로 결정했었다. '근력 증강(小)' 같은 문구를 붙이는 식으로.

그런데 다른 걸 아무리 둘러봐도 저딴 문구는 일언 반구도 찾을 수 없으니 더욱 더 불안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계가 미완성이라는 증거니까.

그 말인 즉 6번이 성립해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

이곳에서의 배드엔딩은 단순히 주인공이 패한다, 그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세상 모두가 죽는 것, 혹은 노예가 되는 것.

얼마 없는 노멀엔딩도 대충 인류의 98%가 죽지만 생존자들은 지구 재건을 향해 희망찬 발길을 내딛는다, 딱 그 정도 내용이다.

그게 배드엔딩과 다를 게 뭔가.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이래서야 마치 실업으로 끝나버린 내 인생과 다를 게 없다.

이 세계의 창조주들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이 세상은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

내가 꽃다운 청춘을 갈아 넣은 사랑하는 작품이니까.

이 세계의 끝은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한다.

미처 만들지 못한, 모두가 살아남는 트루엔딩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 완성이든 미완성이든 내 알 바 아냐.'

나는 끝없는 불안감 속에서 하나의 결의를 빚어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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