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허리 아픈 주술소녀가 스읏스읏 당함
* * *
섬광이 울고 강철이 달린다.
한 때 태평양을 주름잡던 재앙의 바람이 송곳니 학살자를 밀어붙인다.
손가락은 그저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을 뿐.
팔은 폭풍의 길을 인도할 뿐.
나는 운동에너지의 전달을 마친 천린을 뒤로 빼며 태도의 검신을 온전히 드러냈다.
"!"
뒤늦게 키이잉, 하는 소리가 들린다.
붉은 빛이 도는 은색의 깔끔한 검신이 단단한 근육을 베어가른다.
부드럽고, 날카롭게.
무언가에 걸리는 느낌 하나 없이 한 명의 몸을 동강냈다.
내 몸은 어느새 궤도에 오른 칼날을 따라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다시 하나, 둘, 셋.
허리의 가동 범위로는 부족하다.
이번엔 발을 비튼다.
흙바닥이 전쟁걸음의 회전에 동조한다.
모래알갱이가 투둑대는 감각이 밑창을 뚫고 발가락에 닿는다.
그렇게 하나, 둘.
한 명의 거한이 남았다.
이번엔 다시 상체를 비튼다.
급작스런 기동에 허리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계속 틀어냈다.
산소를 모두 소비한 근육이 젖산으로 에너지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하나.
약 270도를 살짝 넘게 돌았다.
나는 마지막 한 명까지 베어버리고도 남은 관성을 주체하지 못해 조금 더 돌았고, 결과적으로 360도를 돈 다음에야 자비 없는 각운동을 멈출 수 있었다.
물론, 나는 회전 후 피겨선수처럼 우아하게 서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으엑!!"
쿵.
주변의 거한들은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는데, 아까와 달리 몸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 그려져 있었다.
"으음 큼!"
허리에 선이 생긴 눈 앞의 사내가 태연하게 제 허리를 양 손으로 꽉 붙들었다.
그러자 선을 따라 미끄러지려던 상체가 탁 멈추고 깔끔하게 베인 상처가 아물어버렸다.
"세상에, 대단하군.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른 거한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상처를 회복했다.
원래 다페르헤이드에서 있던 이벤트라곤 하지만 눈 앞에서 보니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오해를 했군. 역시 스승님의 안목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
"3번, 네가 제일 크게 반대하지 않았나."
"허, 웃기고 있네. 5번, 시험해보자고 제일 먼저 달려나간 건 자네지 않나."
구릿빛 남정네들이 엉덩방아를 찍은 나를 둘러싸고 실 없는 소리를 나눴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참으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으하하하하하!!! 내가 뭐라고 했느냐!!!!"
카우디가 쿵쿵대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를 본 사내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스승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크흐흐, 알면 됐다. 용광로나 고치러 가자! 30분 안에 못 고치면 오늘은 국물도 없다!!"
힘차게 대답한 제자들이 아직도 쇳물이 부글대는 부서진 용광로로 우르르 달려갔다.
카우디는 넘어진 내게 시선도 안 주고 등을 돌려 제자들을 따라 걸어갔다.
"."
안 아픈 곳이 없다.
무리한 허리는 물론이고, 칼을 휘두른 오른쪽 어깨, 팔목, 심지어는 손바닥 근육까지 찢어질 듯이 아프다.
나는 끙끙대며 일어나 바닥에 널부러진 천린을 줍고 송곳니 학살자를 갈무리 했다.
"아, 으, 뒤질 것 같네."
말 그대로 뒤질 것 같다.
다행히 관절은 안 다친 것 같지만 근육이 너무 무리했다.
이건 근육통 150% 확정이다.
내가 부적술 숙련도가 조금만 더 높았어도 부적으로 파스를 붙였을텐데.
'이러다 수행평가 못 보는 거 아냐?'
젠장.
가는 길에 파스나 사갖고 가야겠다.
***
다음 날 나를 본 이수아는 내 꼴을 보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다, 다쳤어? 괜찮아?"
"어? 응. 좀 무리해서."
"근육통이야? 심해?"
"아니, 아직 아프긴한데 자고 일어나니까 한결 낫네."
단순하게 상처가 났더라면 성?을 등에 붙여서 통증을 가라앉혔겠지만 근육통은 신성력으로 치유해선 안 된다.
그랬다간 근육이 약해지니까.
이수아는 내게서 나는 파스 냄새를 킁킁 맡더니 엄중하게(제딴에는) 말했다.
"이게 무슨 괜찮은 사람의 파스 냄새야! 따라와. 내가 도움 되는 애를 알고 있어."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이수아를 따라갔다.
그녀와 함께 도착한 곳은 다른 조의 훈련 구역이었는데, 그곳에서 한 학생을 찾았다.
"유하야!!"
"어? 수아 안녕?"
유하?
나는 유하라 불린 여학생을 보았다.
싱그러운 녹빛의 단발이 찰랑대며 소녀의 얼굴을 드러낸다.
진녹색의 눈동자는 빨려들어갈듯이 깊으면서도 나와는 달리 분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
플레이어블 캐릭터, 채유하.
모든 종류의 마력에게 사랑 받는 마법사, 그녀였다.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건 이수아가 가져온 명백한 호재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다른 반까지 찾아오곤."
"그게, 얘가 근육통을 심하게 앓는 것 같아서."
이수아는 나를 끌어다 그녀의 눈 앞에 두었다.
"어? 얘 혹시 정시현이야?"
"맞아. 시현이. 우리 조거든."
채유하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이제는 가끔씩 모르는 애들이 아는 척을 해올 정도였으니까.
"안녕. 정시현이라고 해."
"응, 나는 채유하. 근데 근육통이 심하다고?"
나는 허리와 팔 쪽의 통증이 심하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채유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데리고 여자 화장실로
'어? 여자 화장실?'
나 여자 화장실 가본 적 없는데?
늘 기숙사에서 해결을 보다보니 들어갈 일이 없었다.
내가 뒤늦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뻣뻣하게 멈춰서자 이수아가 응? 하고 말을 걸어왔다.
"왜 그래?"
"아, 아니야. 허리가 좀 아파서."
나는 애써 웃으며 다시 발길을 내디뎠다.
살면서 여자 화장실은 표지판도 거들떠 안 봤는데.
말 그대로 인생 최대위기였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표정이 안 좋은데."
"지, 진통제 약발이 다 떨어진 것 같아서."
나는 한 차례 짧게 후우, 하고 숨을 내뱉은 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
채유하는 정십이면체 모양의 마법진을 띄워 양손에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온 걸 보더니 내게 툭 내뱉었다.
"옷 벗어."
"어?"
"치료하려면 옷을 벗어야 되거든."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마법진을 굴렸다.
내가 쭈뼛쭈뼛 망설이며 마이를 벗자 이수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넥타이를 잡고 풀어버렸다.
"어휴, 답답하긴! 여자 밖에 없는데 뭘 망설이니?"
이, 이런.
나름대로 여성의 몸으로 지내오면서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있자 이수아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착착 풀어내곤 가슴께를 팍 열어젖혔다.
"힉?!"
"어? 면티를 안 입는 타입이었구나?"
이수아가 헤헤, 하고는 흰 브래지어에 싸인 가슴을 쿡 찔렀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양팔로 가슴을 가려버리자 그녀는 짐짓 화난 체를 하며 얼굴을 들이댔다.
"어허, 시현 어린이! 옷 안 벗을 거에요?"
"자, 잠깐만."
왜 갑자기 가슴을!
나는 심호흡을 하곤 스스로 와이셔츠를 벗었다.
남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건 생각보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수아는 내 손에서 와이셔츠를 받아 들곤 또 다시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브래지어도!"
"뭐, 뭐?"
"그것도 벗어야지!"
지, 진짜로?
브래지어 정도는 그냥 둬도 되지 않아?
나는 진지한 이수아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말에 따라 손을 부들대며 후크에 손을 가져가다가 푸흐흐, 하고 들려오는 웃음 소리에 눈동자를 굴렸다.
그곳엔 완성된 마법진을 왼손에 던졌다 받았다 하고 있는 채유하가 있었다.
"굳이 그것까지 벗을 필요는 없어. 그나저나 너 되게 귀엽다."
채유하가 볼에 손을 대며 눈웃음 지었다.
아, 내가 인싸들의 유희에 당했구나.
"자, 뒤돌아 서볼래?"
나는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을 푹 수그리곤 뒤돌아 섰다.
내 등을 본 둘은 꽤 놀랐는지 숨을 삼켰다.
내가 왜 그러지, 하고 있을 때 채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리 멍투성이야? 너 등이 이런 건 알고 있었어?"
"으, 응? 그래?"
어쩐지 아프더라니.
습관대로 파스를 거울 안 보고 대충 붙였더니 멍이 든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날 찾아오지 말고 그냥 신관한테 갔어야지. 어휴."
등 뒤에서 채유하가 마법진을 더 만지는 건지 웅웅대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등 뒤로 낯선 감각이 다가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잠자코 있자 그녀의 손길이 맨살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녀의 당부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몇 분간 스읏스읏하더니 그녀가 억눌렸던 숨을 뱉으며 손을 떼었다.
"휴, 힘드네. 좀 어때?"
나는 등허리를 살짝 움직여보며 대답했다.
"어? 괜찮아진 것 같은데?"
하나도 안 아팠다.
살짝 뻐근하긴 했지만 일전의 통증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진 말고. 재생이랑 진통을 걸어 놓긴 했는데 심하게 움직이면 또 다칠테니까. 이제 팔 줘볼래?"
오른팔도 같은 식으로 스읏스읏해서 치료할 수 있었다.
"됐다. 적어도 오늘은 무리하지 마. 그리고."
꾸욱.
"힉?!"
"이건 병원비."
그녀가 갑작스레 가슴을 꾹 찌르곤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이런 성희롱 마법사가.
이수아는 내게 벗어놓았던 옷가지를 건네며 웃었다.
"어때? 꽤 괜찮아졌지? 실력이 굉장한 애니까!"
그렇긴한데.
뭘까, 이 알 수 없는 수치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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