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돌 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 * *
"나이스, 최태양."
"흐, 넌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멀대와 금발이 낄낄 댔다.
그들은 바닥에 엎어진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서로를 치하했다.
저녁 어스름의 골목길.
당연히 사람은 없었고 옅은 가로등 불빛만이 사물들의 어렴풋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시험이 끝난 뒤를 노리길 잘한 것 같아. 만전이었다면 위험했겠어."
"크흐흐, 무녀는 처음 먹어보는데."
낄낄.
그들은 다페르헤이드의 초반부에 나오는 흔한 피라미 악역들이다.
현서진과 천의린의 스토리 시작부에 나와 천의린을 습격해 겁탈하려다 현서진의 도움으로 인연이 시작되는 스토리.
"역시 천의린보단 이 년이 낫겠더라고. 천의린 그 년은 다 괜찮은데 빨통이 너무 작아."
"큭큭, 가슴충 새끼."
하지만 지금 스토리의 흐름이 뒤틀렸다.
강간마 둘은 천의린 대신 정시현을 타겟으로 삼아 미행하며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었다.
멀대가 쓰러진 소녀에게 기분 나쁜 발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니까 계속 그러고 다니지 그랬어, 응? 갑자기 그렇게 따먹어 달라고 유혹하면 우리가 들어줄 수 밖에 없잖아, 응?"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멀대가 소녀를 옮기기 위해 다가가 허리를 숙일 때였다.
"야, 걔 안 자는 거 같은"
"뭐?"
그는 갑작스레 청량한 돌풍이 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키이이이잉—!
소녀가 눈을 번쩍 뜨며 태도를 뽑아들었다.
***
"역시 천의린보단 이 년이 낫겠더라고. 천의린 그 년은 다 좋은데 빨통이 너무 작아."
"큭큭, 가슴충 새끼."
'진짜 지랄하네.'
나는 자연스럽게 모로 누워있었다.
감각을 최대한 집중해 놈들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자연스럽게 숨을 쉬었다.
'다 알고 있는데 내가 당하겠냐.'
놈들의 수법은 훤히 꿰고 있다.
당연히 이 수면가스의 정체도 알고 있었고, 미리 준비하던 부적을 대서 가스의 확산을 막았다.
부적에 새겨진 글자는 바로 흡?이었다.
예기치 못한 습격에 당할 뻔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이렇게 반격을 위해 누워 있다.
오는 순간 하나를 베고 나머지 하나도 제압한다.
아니, 솔직히 죽여버려도 상관은 없을 터였다.
놈들에게 당한 피해자만 다섯을 넘으니.
"그러니까 계속 그러고 다니지 그랬어. 응? 갑자기 그렇게 따먹어 달라고 유혹하면 우리가 들어줄 수 밖에 없잖아. 응?"
병신.
놈의 발걸음이 다가온다.
가련하게 쓰러진 모양을 취한 몸은 땅에서 울리는 진동에 집중했고, 보폭과 속력을 가늠했다.
놈이 내게 완전히 가까이 다가왔다고 확신할 때 즈음, 나는 손을 움직였다.
"야, 걔 안 자는 것 같은"
"뭐?"
일찍도 알아챈다.
나는 눈을 뜨고 허리춤의 검병을 잡았다.
처음부터 천린의 사용을 전제했기에 손목에 력力을 붙여놨다.
솔직히 력力이 다할 때까지 가까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됐지만.
순풍이 천린을 타고 흐른다.
살짝 힘을 줘 칼을 뽑자 순풍이 돌풍으로 변하며 송곳니 학살자를 가속시키기 시작했다.
놈의 얼탄 얼굴이 봐줄만 하다.
키이이이잉—!
폭풍을 안은 섬광이 뒤늦은 쇳소리를 내며 달린다.
베어낸 건 놈의 명치께.
일전처럼 굳이 무리해서 펼칠 이유가 하등 없었기에 칼은 반대편 바닥에서 멈췄다.
"끄으아아아아악!!!!!!"
자벌레 같이 생긴 놈은 베여나간 부위에서 선혈을 화악 뿜으며 쓰러졌다.
내가 놈의 아래에 있던 판국이라 피가 내 얼굴을 덮쳤지만 나는 태연하게 흡?을 하나 더 만들어 피를 닦아내며 일어섰다.
"조민재!!! 젠장!!!"
이름이 최태양이었던가.
금발 놈이 양 팔에서 주홍빛 불꽃을 일으켰다.
아마 강력한 불꽃의 마력을 타고 났다, 이 정도의 설정이었던 것 같다.
"꽤 좋아보이네. 애들한테 약 먹이고 강간하니까 좋았어?"
"이 개년이!!"
꼴에 동료애는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냅다 도망칠 줄 알았는데.
"병신아, 싸우게? 여기가 아무리 사람이 없다지만 소란을 일으키면 누군가 올텐데."
"으아아아아아!!!!"
놈이 위압적인 불꽃을 두르고 달려들었다.
나는 천린을 한 번 더 쓸까 생각했지만 어깨의 통증을 의식하여 그러지는 않았다.
지켜줄게요.
다시금 칠흑여제의 사랑을 두르고 부적을 꺼내 매만졌다.
새겨넣는 것은 수?.
수극화??火의 묘리를 담은 푸른 파도.
나는 왼쪽에서 휘둘러오는 불꽃의 주먹에 수?를 갖다 댔다.
그러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넉넉하게 타오르던 주홍빛이 기세를 잃어버렸다.
이윽고 부적이 주먹에 닿자 수?가 터져나오며 놈의 상반신을 덮쳤다.
"크으윽! 으윽"
수?는 다름 아닌 오행의 일원.
오행의 힘으로 불어넣은 수극화??火의 힘은 일종의 섭리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애초에 놈의 불길이 생긴 것보다 강력하지 않았고.
불길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강렬한 놈의 주먹이 내 손바닥을 때렸다.
이것까지는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손바닥에 멍이 들었지만 나는 태연자약하게 오른손의 송곳니 학살자를 휘둘렀다.
온 몸의 불길과 함께 자신감을 잃어버린 놈은 서둘러 뒤로 물러났지만 놈은 이제 물에 홀딱 젖은 나뭇가지나 다름 없었다.
나는 도망치려는 놈을 쫓아 허벅지에 송곳니 학살자를 박아 넣어 도망 시도를 좌절시켰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멍청이들아."
감히 누구를 범하려고.
***
나는 놈들을 경비대에 넘기고 진술서를 쓴 뒤에 귀가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에 꽤 피로했다.
대충 씻은 나는 침대에 누웠지만 곧바로 잠들지는 않았다.
'난 아직도 약해.'
놈들의 정체를 몰랐다면 쪽도 못 쓰고 당할 뻔 했다.
나는 그 사실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끼며 이불을 끌어 당겼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곤 해도 너무 무력했어."
나는 날아오는 침바늘을 칠흑여제의 사랑이 막아줄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다페르헤이드의 이벤트에서 습격을 받은 천의린은 침바늘을 눈치채고 피해냈다.
또 뒤에서 달려오는 최태양을 맨손으로 두들겨 패기도 했고.
내가 꼴사납게 바닥을 구른 것과는 대조적이다.
"신체 단련을 늘려야되나."
이 빌어먹도록 큰 가슴도 좀 빼버려?
아무리 생각해도 달고 있어 봤자 손해 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습격을 당한 것도 큰 가슴이 일조하지 않았는가.
하~이 웨이 투 헬!
"?"
내 폰에서 나는 소린가?
뭐야, 이 기괴한 알림음은.
휴대폰을 들어 확인해보니 누군가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고스트룰즈 회장: 무슨 일 있니]
[고스트룰즈 회장: 왜 요즘 모임을 안 나와]
[고스트룰즈 회장: 제안에 대한 건 아직도 생각 중이야?]
[고스트룰즈 회장: 빨리 답을 주면 좋겠는데]
아, 맞다.
이 녀석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이 몸의 전 주인이 몸 담고 있던 단체를.
'고스트룰즈, 얘네를 어떻게 해야 하지?'
고스트룰즈가 일으키는 사령폭주 사건은 다페르헤이드 초반부에 벌어지는 대사건 중 하나다.
주인공으로 선택된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이 사건을 해결하며 큰 명성을 얻는다.
이 몸의 원주인이던 주술소녀는 "죽어—!" 와 "꺄아악!"이라는 단 두 마디를 뱉고 퇴장하는 무대이기도 하고.
'으음, 어쩐다.'
나는 아직 고스트룰즈에 몸을 담고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고스트룰즈에서 계속 활동하며 수를 써 계획을 무산시킬 것이냐, 아니면 아예 생까고 말 것이냐.
나는 휴대폰을 툭툭 두들기며 생각을 거듭했다.
애초에 사령폭주 사건은 스피릿 각성자인 내가 흑마법을 연구하는 고스트룰즈의 회장을 도와야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생까도 되겠지만, 이 단체 자체가 평범한 오컬트 모임을 넘어선 단체인지라 가만히 두기에도 뭣하다.
"괜찮겠지."
무엇보다 난 지금 졸리다.
나는 번호를 차단하곤 베개를 꼬옥 끌어안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며칠 뒤 시작할 정규반 개학을 기다리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