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정규반 개학 (2)
* * *
가소희는 최근 들어 알게 된 이름이다.
다페르헤이드엔 아직 한국 칠성 중 두 명의 설정이 없었다.
혹시 칠성이 오성으로 바뀐 건 아닐까 싶어 알아봤더니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다.
설정이 없던 두 칠성이 생겨났으니까.
애시드라 티어즈 김동규와 무검희 가소희.
다만 나는 칠성이 다 채워져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큰 신경을 쏟지 않았다.
당시엔 내 할 일이 너무도 바빴으므로.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정보가 있을 줄이야.
'아니, 혹시 모르지. 그냥 검법이 뛰어나서 비유적으로 검무라 하는 걸지도.'
그렇다면 주술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하지만 현서진의 말은 그런 의미라기보다 진짜 주술로서 존재하는 검무를 뜻하는 듯 했다.
자세한 건 따로 알아봐야 알겠지만, 주술로서의 검무를 전투에 이용한다면
"저기요?"
"어?"
"갑자기 생각이 깊어지신 것 같아서요. 전 이만 무기 선택하러 가볼게요. 제 이름은 현서진이고 주로 검을 다룹니다. 앞으로 잘 지내봐요."
"어, 난 정시현이고 부적술이랑 도를 다뤄?"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대답하다가 뒤에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말 놔도 돼. 우리가 선후배 관계도 아니고."
"그럴까? 하하, 존댓말이 습관이라. 다음에 보자!"
현서진이 몸을 돌려 검 무더기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비로소 찾아온 소소한 정적을 느끼며 마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현이 인싸네~?"
"힉?!"
화수연이 클레이모어 더미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웬 인싸?"
"벌써 남자랑 대화를 하고 다니는구나 싶어서."
"아니거든."
"쟤 여자였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화수연이 내 곁에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 것도 없는 내 빈 손을 보더니 말했다.
"아직도 무기 안 골랐어? 너 태도 쓰는 거 아냐?"
"응, 그런데 찾지를 못해서"
그러자 화수연이 내 손목을 잡고 태도가 쌓여있는 쪽으로 날 인도했다.
"생각보다 길치구나? 감은 좋은줄 알았더니."
"천천히 둘러보던 거야. 못 찾은 게 아니라."
"정말? 응, 뭐, 그래.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우이씨.
나는 태도 더미에서 젠가를 하듯 맨 아래의 것을 뽑아들었다.
아카데미제라 송곳니 학살자보다는 훨씬 안 좋겠지만 그럭저럭 준수한 물품이었다.
[극정 아카데미 표준 무기 – 태도(C)]
질 좋은 철이 들어간 공장제 무기. 교육에 필요한 마법 몇 개가 걸려 있다.
날이 꽤 예리하게 세워져 있지만 조정에 따라 무디게 할 수 있겠지.
실습 때는 이것만 써야하므로 새 무기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나는 어색한 무게중심을 느끼며 태도를 몇 번 휘두르다가 조용히 허리춤에 갈무리했다.
"등록하러 가자! 나도 아직 안 했거든."
수연이가 등허리의 쌍검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와 함께 선생님에게 가 등록을 마쳤다.
개략적인 사용법을 익히고 나서 우리는 대련장을 나섰다.
"시현아."
"왜?"
"뭐 할 거 있어?"
"할 거 있냐고? 음"
할 것도 없고 갈 데도 없다.
다른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찾아봐야 하나?
아니, 걔들이 어딨는 줄 알고 찾는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계획은 없는데? 왜?"
"나도 그렇거든. 나랑 같이 유하 찾으러 가자!"
그녀는 빼지 말라는듯 내 손목을 잡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유하야! 뭐해? 어디야? 놀자!"
체단실 근처에서 뭐 보고 있는데. 놀자고?
화수연과 채유하는 꽤나 친하다.
어린 시절부터 많이 부대꼈다는 설정이 있었으니.
"뭐 보고 있는데? 시현이 알아? 우리가 그리로 갈까?"
빌보드 보고 있었는데. 시현이 알지. 이리로 오게? 그러든지.
스피커폰으로 설정된 채유하의 목소리는 연거푸 던진 질문에 태연하게 하나하나 응답해줬다.
질문은 하나만 하라고 성을 내도 이상하지 않을 대화지만 그녀는 이미 적응한 듯 했다.
"어, 갈게!"
뚝.
붉은 머리 발랄한 소녀가 전화를 끊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체단실이래! 빨리 가보자!"
그러고는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나를 두고.
"어? 야, 같이가!"
손목은 대체 왜 잡고 있던 거야?
제멋대로 흐르는 바람 같은 속성은 여전했다.
뭐, 그게 불편하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중적인 표현으로 중립 혼돈 딱 그 대표격인데.'
그나저나 왜 이렇게 빠른 거야.
나는 학교의 구조를 떠올리며 빠르게 체력단련실로 향했다.
체력단련실 앞엔 꽤 많은 학생들이 운집해있었다.
화수연은 그 바깥에서 고개를 쭉 빼고 채유하를 찾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쿡 찔렀다.
"안녕."
"오, 왔네? 근데 얘네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대? 뭔가 있어?"
학생들은 웅성이며 벽에 붙은 뭔가를 보려 하고 있었다.
아마 빌보드일 것이다.
"빌보드? 그게 뭔데?"
"넌 선생님이 설명할 때 뭐 했니?"
"잤지."
"너답다 정말."
그렇다면 랭크 대전 때 돈 얘기만 듣고 벌떡 일어났다는 뜻이 아닌가.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내가 빌보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자 화수연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와, 그런 것도 있어? 가보자가보자!"
"아니, 사람이 좀 많은데 유하만 찾고 나가는 건 어때?"
"가자아!"
물론 화수연은 그렇게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 손목을 잡고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물론,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밀어내면서.
"아, 뭐야."
"밀지 마요! 개민폐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연히 사과는 나의 몫이었다.
본인은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수연아, 잠깐! 너무 민폐잖아!"
"응? 아, 그러네. 죄송해요!"
에휴.
우리는 어느새 큰 벽보 앞에 다다랐다.
채유하는 그곳에서 열심히 빌보드를 보고 있었다.
"유하야!!"
"왔어? 어쩐지 뒤쪽이 시끄럽더라니."
채유하는 그리 말하며 화수연의 뺨을 꼬집었다.
뺨을 잡힌 말괄량이는 으으 하며 뭐라 했지만 차마 언어를 이루지 못하고 흩어졌다.
나는 미소녀 둘이서 장난치는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벽면을 다 덮은 벽보에서 오른쪽 위에 시선을 돌리자 금색으로 적힌 이름들이 주욱 적혀 있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다.
'1위 현서진, 2위 채유하, 3위 천의린'
유시험과 무시험을 합쳐서 통산한 것 같은데, 꽤나 정확한 순위였다.
이 최우수 학생들은 추후에도 순위가 내려가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으리라.
한창 여덟의 순위를 보고 있을 때 채유하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손가락이 내 뺨을 쿡 찔렀다.
"쿡쿡."
"?"
"귀여워"
나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한 볼을 슥슥 문질렀다.
대체 뭐가 귀엽다는 걸까.
그 때 나랑 비슷하게 볼을 쓰다듬고 있던(색깔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화수연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머야, 아는 사이였어?"
"내가 시현이 얘기를 안 했었나? 그 전에 너도 시현이 얘기 했거든, 이 멍충아."
채유하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자 화수연이 헤헤, 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내 얘기라고?
"내 무슨 얘길 했는데?"
"별 거 아냐. 네 등 치료해줬던 얘기지."
"아, 그거."
나는 괜히 가슴을 찔린 게 기억나 가슴을 감싸안았다.
이 변태 마법사!
"뭐? 옷 벗은 여자애랑 슷슷하고 가슴까지 만졌다는 게 시현이한테 그런 거였어?!"
"응. 걔가 시현인데."
"우와아"
뭐, 뭐?
"아니, 무슨?"
"으우와"
화수연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내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나와 채유하를 상당히 곤란한 눈빛으로 보더니,
"취, 취향은 존중해줄게."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아냐!!"
"푸후후후"
"넌 왜 웃고 있는 거야!"
몸을 슷슷해줬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했다고?
왜 그런 말을
"귀여워, 우리 시현이."
채유하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말해왔다.
화수연은 한층 더 극적인 표정을 지었고 나는 더 열심히 부정할 뿐이었다.
변태 마법사는 그 상황을 한참을 즐기더니 나름대로 해명을 했고, 상황을 일단락 지었다.
"시현아."
"."
"혹시 화났어?"
"아니."
"히히, 미안해."
채유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을텐데.
그녀의 포지션은 상식인이었단 말이다.
'혹시 나 때문에 변한 건가?'
내가 귀여워서?!
는아닐텐데.
"하긴, 시현이가 놀려먹기 좋을 것 같긴 하던데. 그런 장난 정도는 용인해줄게."
"너한테 사과한 거 아니거든."
그냥 놀려먹기 좋아서였다.
인싸들의 노리개가 되다니.
미워!
"그보다 수연아, 저거 봤어?"
"저거? 백보드?"
"빌보드."
채유하가 나를 토닥이며 주제를 바꿨다.
빌보드에 시선을 돌린 화수연이 이내 제 이름을 찾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와! 나 5등이야! 좋은 건가? 이것도 돈 줘?"
"최우수 학생은 장학금이 나오는 걸로 아는데. 300만원?"
"꺅!"
화수연이 기쁜 표정으로 폴짝였다.
주변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지만 늘 그렇듯이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휴, 덤벙대긴, 근데 시현아. 네 등수는 봤어?"
"나? 나는 아직 못 봤는데."
일단은 유시험으로 Z반에 들었으니까 30위 안에는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30위권 이내를 살펴봤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으음, 생각보다 낮은 것 같네."
"와, 그거 신종 기만이야?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 긍지 높은 애구나?"
전체 2등, 무시험 1등인 애가 그런 소릴 하니 그게 더 기만질 같았다.
"기만은 무슨, 내가 몇 등인줄 알고 어딨는 거야? 넌 알아?"
채유하가 무슨 소리냐는듯 손가락을 펴 어딘가를 가리켰다.
"9등이잖아? 최우수. 진짜 몰랐던 거야?"
뭐라.
나는 아래로 향했던 눈동자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금빛으로 빛나는 이름 여덟 아니, 아홉개.
그 끄트머리에 내 이름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