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보라순이랑 알록달록이랑
* * *
시간은 꽤 빠르다.
몇 주가 지나고 나는 친구가 그럭저럭 생겼고, 장송곡도 이제는 어느 정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검술은 죽어라 해도 오르질 않는다.
죽은 척은 이미 숙련도 A를 찍었건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성공적인 아카데미 생활이라 할 수 있겠다.
"샬롯!"
"뭡니까."
"같이 가!"
"싫습니다."
샬롯은 새침하게 머리를 휙 돌리며 총총 걸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따라붙으며 곁에 섰다.
"네가 싫다 해도 같이 갈 건데."
"언제는 안 그랬다는 듯이 말하는군요."
"치."
샬롯과의 관계도 순조롭다.
친구 없이 혼자 다니는 샬롯이지만 내가 끈질기게 달라붙자 어느 정도 마음을 연 것이다.
얼마나 친한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만 보면 뛰쳐나가는 우혜나 선배님 보다는 낫다.
"샬롯."
"그만 부르십시오."
"딸기가 직장을 잃으면?"
"하지 마십시오."
"딸기 시럽."
"풋, 크흠! 하나도 안 웃깁니다."
이런 귀여운 면도 있으니까.
세상에, 도도하고 차가운 서양 미녀가 이런 되도 않는 한국식 유머에 웃다니
딸기시럽 따위보다 샬롯이 더 웃기다.
"아하하!"
"웃은 거 아닙니다. 비웃지 마십시오."
"아냐, 웃겨서 그런 거야. 비웃은 건 아니고."
처음에는 그녀가 가진 주술, 원시의 힘을 목적으로 접근한 거지만 지금은 정말로 샬롯이 좋아졌다.
나를 보는 유하의 심정이 이런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나와 샬롯은 마침내 정령부에 도착했다.
샬롯은 정령부의 문을 열며 나를 한 차례 쏘아봤다.
"들어오지 마십시오."
"나도 정령부인데."
"검술부는 안 가십니까?"
"난 정령부가 좋단 말야."
"당신이 들어오면 민폐인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들 괜찮다고 해줬는데."
샬롯이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닫힌 문을 열고 정령부에 들어갔다.
"오, 샬롯 후배 왔구나? 시현 후배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부실 안은 자연을 떼어놓은 듯한 인공적인 정원이었다.
작은 개울, 작은 언덕, 작은 나무들
에덴 동산을 작게 만든다면 바로 이런 거겠지.
꺄악! 또 왔다!!
무서워어!!
도망치자!!
정원에서 놀고 있던 정령들은 나를 보더니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말았다.
나는 머쓱함을 느끼며 정령부 부장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정령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온 건데."
다른 부원들도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기 사람들은 역시 착한 사람들 밖에 없다.
샬롯은 이마에 혈관을 돋웠지만
"하하, 샬롯 후배도 너무 화내진 말고."
"화 안 났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자, 친구들을 다시 불러봅시다!"
나는 아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령술사다.
스피릿을 사용하기에 정령계약이 불가한 샬롯도 타고난 친화력과 원시의 힘을 사용해 정령을 다룰 수 있으니, 그녀 역시 정령술사라 할 수 있었다.
'반면에 나는'
정령과의 궁합이 최악이다.
아무리 상성이 안 맞아도 심장에서 스피릿을 정류하는 일반인이라면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는 게 가능한데, 나는 그런 것 없이 음습한 스피릿을 풀풀 흘리고 다니니 정령이 부리나케 도망치고야 마는 것이다.
짤랑, 짤랑
샬롯이 방울을 흔들어 원시의 힘을 발동했다.
원시의 힘은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주술이다.
그래도 굳이 정의하자면, 먼 옛날 인간이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던 선사시대의 힘을 빌려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처럼 원소력이나 정령을 불러오는 데 쓸 수도 있고, 이성을 흐리는 대신 내면의 감정을 증폭시켜 본능에서 비롯한 순간적인 힘을 끌어내기도 한다.
화생방실에서 문을 들이 받는 그 힘을 끌어낸다 하면 이해가 될까?
어! 알록달록이다!
안녕, 알록달록!
뒤에 무서운 보라순이는 네 친구야?
알록달록이니, 무서운 보라순이니 하는 것은 스피릿의 색을 이야기 하는 거다.
샬롯의 스피릿은 말 그대로 총천연색이고, 나는 불길한 보라색이니.
정령이 누굴 좋아할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샬롯이 딱딱한 인상을 풀고 살풋 미소지으며 정령들을 어루만졌다.
"친구 아닙니다. 저를 일방적으로 스토킹한답니다."
헉! 나, 나쁜 인간이야?!
알록달록을 지키자!!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제가 더 세거든요."
나는 얼척이 없어서 한 마디 흘리고 말았다.
"뭐라?"
보라순이가 화났다!!
꺅! 살려줘!!
으아아앙 잡아먹지 마아
이 놈의 정령들이 누굴 정령포식자로 보나.
그러고보니 정령들도 결국 영?인 만큼 퇴마가 먹힌다.
그냥 콱 장송곡을 불러버릴까? 아님 미나리?
"흥, 틀렸습니까? 빌보드 순위도 저보다 낮으면서."
"뭐래, 8위랑 9위 차이가 뭐 그리 크다고. 랭킹전도 나 만나니까 튀었잖아."
"당신의 추잡한 싸움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아직 한국어가 서툴구나, 응.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하는 훌륭한 전투를 추잡한 싸움이라고 하다니.
"추잡은 무슨. 늘 이길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쓸 뿐이지."
"도망치면서 괴상한 노래로 심령을 흔들고 바닥에 부적을 도배하는 것 말입니까?"
"."
너무하네. 이겼으면 된 거 아냐?
저 전술로 무려 10전 10승인 것을!
'물론 강한 마법사나 궁수를 만나면 토꼈지만'
아니, 그보다 왜 시비야.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친구들. 이리 오세요."
샬롯이 정령들을 조심히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내게 다가왔다?
꺄악! 안 돼!!
알록달록이 우릴 팔아넘긴다!!
엘퀴네스님 죄송해요 나이아스는 먼저 간답니다
"뭐하는 거야?"
"당신과 정령의 사이를 개선하고 있습니다."
"사이 개선?"
나는 샬롯의 품에 한가득 안긴 정령들을 보았다.
이, 이쪽을 본다!!
숨어!!!
먹지 말아요 저는 흙이라서 맛이 없단 말이에요 으앙
암만 봐도 아닌데
이 쯤되니 정령들에게 미안해져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지 말고 만져보십시오."
"얘들 무서워하는 거 안 보이니?"
"당신의 얼빵한 마음까지 무서워할 수는 없겠죠."
"그거 칭찬이야?"
"아뇨."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샬롯을 쳐다봤다.
그녀는 양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봤다.
잠깐의 신경전 끝에, 나는 조심히 손을 들어 물의 정령을 만져봤다.
쓰담, 쓰담
히, 히이 우음, 음
"역시 접촉교감은 거부하지 않는군요. 마음까지 음습한 사람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야"
이 총천연색 꽃밭 영혼 여자가.
나는 샬롯의 인도에 따라 이런저런 정령들을 쓰다듬어 봤다.
사원소의 정령과 그 사이에 낀 번개의 정령.
번개의 정령은 꽤 희귀한지라 공을 들여 스읏스읏 해줬다.
으응 헤헤.
"번개의 정령은 꽤 희귀하다 들었는데 용케 불러냈네?"
"제가 조금 뛰어나서 말입니다. 공격헬기의 정령까지 불러본 적이 있습니다."
"공격헬기?!"
"농담입니다."
아이, 깜짝이야
샬롯이 정령들을 품에서 풀어주자 정령들이 내게 붙어왔다.
아무래도 나의 얼빵한 마음이 마음에 든 것 같다.
"신기하군요. 이렇게까지 좋아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 마음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거 아니겠어?"
"음습한 스피릿을 줄줄 흘리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도 내게 정령을 데려와선 사이 개선이니 뭐니 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빠, 빨리 친해지고 나가란 뜻이었습니다."
우이씨.
더러워서 간다, 가.
나는 정령들을 떼어놓고 문을 열며 샬롯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네 책상 서랍에 만득이 있는 거 제니스에 소문낸다."
"예? 그, 그건!"
찰칵.
나는 문을 닫고 실없이 쿡쿡 웃었다.
다음에 갈 곳은 검도부.
꽤 오랜만에 가는 곳인지라 눈치가 조금 보이긴 했으나, 안 갈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제적 직전이었으니까.
'짤려도 수연이가 어떻게든 해줄테지만 그래도.'
내가 그렇게 한 걸음 내딛자,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하는 휴대폰 화면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정시현.
"누구세요?"
이젠 내 이름도 잊은 거냐. 뭐, 상관 없다.
뭐라는 거야.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우리는 더 이상 네가 필요 없으니까. 덕분에 더 좋은 조력자를 찾았거든. 곧 우리의 연구가 완성될 거다.
필요? 조력? 연구?
잠깐, 얘들 혹시
"고스트룰즈냐?"
그래, 고스트룰즈의 마정후다. 꼭 자기소개를 시켜야 성이 풀리겠나?
낭패했다.
내가 없으면 비범한 오컬트 단체에 불과한 고스트룰즈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리라 여겼건만, 상황이 반전되어 더 빠른 시일 내에 연구를 완성해버린 듯 했다.
역시 아카데미를 조금 빼먹더라도 고스트룰즈에 출석하는 게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용건이 뭐야."
그냥 옛 정도 있고 하니 알려주고 싶었다. 이번 주 일요일, 아티팩트 박물관에서 우리의 개선이 있을 예정이다. 망혼의 방랑자를 풀어내는 의식 말이지.
망혼의 방랑자는 오래 전에 봉인된 재앙이다.
한국에 침범하는 언데드가 으레 그렇듯 대륙 쪽에서 넘어온 재앙이었는데, 사제들의 길드인 아가페가 전력의 70%를 갈아넣으며 겨우 신성한 관에 봉인한 위험한 놈이었다.
원작의 스토리에서 고스트룰즈는 되도 않는 조잡한 연구로 망혼의 방랑자를 풀어내 조종하려고 하지만, 망혼의 방랑자는 당연히 일개 오컬트 단체가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사령이 아니었기에 그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그 때 우연히 체험학습을 나왔던 주인공이 나타나 망혼의 방랑자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처리한다는 게 사령폭주 사건의 시나리오였다.
"너희들이 재앙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딴 조악한 연구로?"
이미 재앙의 파편을 뜻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해졌다.
"걔가 깨어났을 때랑 안 깨어났을 때랑 같냐, 이 멍청한 새끼야?"
쯧, 믿기 싫으면 믿지 마라. 그 때가 오면 믿기 싫어도 믿게 될 테니.
뚝.
"."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한 줄기 후회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할 수 있을 때 확실히 처리했어야 하는데!
"젠장"
나는 그 자리에서 헌터협회와 박물관에 테러신고를 했지만 당연히 개소리 취급 당하며 묵살 당했다.
결국 내 힘으로 해결을 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
그 날, 나는 성초은에게 연락해 연구계 건물 지하실에 동행을 요청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