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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22화 (22/119)

〈 22화 〉 수상하고 이상한 것들은 늘 땅 밑으로 파고든다 (1)

* * *

나는 그 동안 미뤄놨던 일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가능한 신속하고, 확실하게.

아카데미 생활에 빠져 있던 내게 고스트룰즈가 깨우쳐준 교훈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시현 후배님."

"하루도 안 거르고 메신저로 연락했는데 오랜만은 아니죠."

"실제로 보는 거랑은 다르죠! 랜선 연애도 연애라 하실 건가요?"

"음, 그건 아니지만"

한 달만에 다시 만난 성초은은 꽤 좋아보였다.

흑백결합 논문을 마무리하고 나름대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나.

한가한 시간에 잠은 자지 않는 것인지 눈 밑의 그림자는 오히려 짙어진 듯 했지만.

"요즘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뻐요. 그 정도 실적이면 이번 학기는 하고 싶은 것만 해도 상관 없겠죠?"

"그 정도 실적이면 학기고 자시고 노벨상까지 노려볼 수 있을 걸요"

"그렇긴 하죠. 원래는 당신이 받을 것이긴 하지만."

성초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을 머금었다.

다크써클과 대조되는 생기 있는 눈동자가 꽤 인상적이었다.

성실한 연구자는 그렇게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태블릿을 꺼냈다.

태블릿엔 연구계 건물의 약도가 떠 있었다.

"아무튼, 오늘은 견학은 책임지고 잘 안내드릴게요. 어디부터 가시겠어요?"

"음 선배님이 있는 실험실은 어디에요?"

"409호랍니다."

"가봐도 돼요?"

"물론이죠, 아! 저 엘리베이터 잡아요!"

우리는 올라가려던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고 성초은의 실험실로 향했다.

이질마력분석학과 답게 그녀의 실험실엔 꽤 많은 마력표본과 반응샘플이 곳곳에 도열되어 있었다.

나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수많은 마력표본 중에서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실패한 거에요?"

"아, 네. 실패한 거랍니다. 상반된 색의 마력을 비스마이카 기법으로 합친 뒤에 스피릿의 흔적이 되살아나는지 실험한 건데, 이상하게 적마력과 녹마력만 안 되더라고요. 뭔가 알고 있나요?"

"아뇨, 저거 혹시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저걸요? 많으니까 상관은 없긴한데 어디에 쓰시게요?"

"그냥 색깔이 예쁘잖아요. 기숙사에 놓고 램프로 쓸까 싶어서."

유리 밀폐용기에 칵테일처럼 층층이 쌓인 적마력과 녹마력.

아직 세상에 밝혀진 사실은 아니나, 저건 아주 엄청난 폭탄이다.

스피릿을 일정한 리듬으로 주입하면 시한폭탄이 되는.

나는 성초은에게 기념품의 명목으로 폭탄을 건네받은 뒤 건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심심한 전투계 건물에 비하면 꽤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았는데, 아카데미의 충실한 노예인 그녀가 말하길 저런 것들이 도입되고 나서 연구계 학생의 자살률이 조금 늘었다고 한다.

정말 연구계는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다.

나는 건물을 돌아다니다 마침내 지하층으로 가는 계단에 당도했다.

지하층으로 가는 계단은 다른 건물들이 으레 그렇듯 어둡고 음산했다.

내가 망설임 없이 내려가려 하자, 성초은이 나를 붙잡았다.

"내려가면 안 돼요."

"왜요? 뭐 있어요?"

"저 문짝에 출입금지라 써 있잖아요. 아니, 그 전에 잠금장치로 완전 꽉 잠겨 있는 거 안 보여요?"

그녀의 말대로 계단 밑에 있는 지하층 문은 개미새끼 한 마리 허용 않겠다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히 계단을 내려가 문의 잠금장치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비밀번호야 당연히 내 앞에선 무력했고, 마력지문인식 장치는 전?으로 마비시켜 무력화했다.

찰칵, 끼이이이

"어? 그, 그거 열리는 거였어요?!"

"그냥 열리던데요. 다 장식이었나봐요."

나는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보니 이 상황 뭔가 데자뷰인데.

문자의 기적을 얻으러 갈 때였나?

"안 갈 거에요? 솔직히 궁금하지 않아요? 그쵸?"

"으 궁금하긴 한데 그래도"

성초은은 답지 않게 쭈뼛대다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굳게 닫혀 있던 지하층은 호기심 대장인 그녀에겐 너무 큰 유혹이었나보다.

문 너머의 공간은 칠흑, 그 자체였다.

유령저택에서의 칠흑이 인위적인 것이라면 이 곳의 칠흑은 말 그대로 빛 한 점 없는 자연스런 어둠.

성초은이 조용히 빛의 구를 띄워 어둠을 몰아냈다.

그러자 관리되지 않아 곰팡이와 버섯이 주렁주렁 자라난 복도가 나타났다.

위의 층들과는 달리 좁은 복도 하나만이 쭈욱 이어져 있고 양 옆에 미닫이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였다.

지하의 습하고 눅눅한 공기는 내 교복을 적시는 듯 했고, 단화의 밑창은 이미 짓밟힌 이끼가 흘린 물방울로 한가득 젖어 있었다.

"으 관리를 안 하는 곳일까요? 학생회장으로서 감사가 필요하겠군요!"

"그냥 여기 있는 게 궁금하다고 말해도 되는데."

"궁금하네요."

나는 뜻하지 않은 모험에 두근두근한 표정을 지은 성초은을 돌아보곤 실소를 지었다.

결코 유쾌한 여정은 아닐 텐데.

"선배님은 제 뒤로 좀 물러나 계세요. 혹시 모르니까."

"저도 마법은 쓸 줄 알거든요?"

"아니, 그 뜻이 아니라 감이 안 좋거든요."

"감?"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근처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녀는 내 어깨 너머로 힐끔 방 안을 봤다가 기함해서는 뒤로 펄쩍 물러났다.

"꺄아아아악!!!"

"거봐요. 감이 안 좋다니까"

안에는 좁은 방의 부피를 팔 할 정도 차지한 살덩이가 있었다.

온갖 사람의 얼굴이 하나로 녹아서 합쳐진 살덩이.

사실 그것들을 얼굴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뭐한 게,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귀가 팔랑거리고 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수십 개의 발가락이 꿈틀대는, 그런 괴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껴 뒤로 뒷걸음질 쳤고, 성초은은 내 등 뒤에서 벌벌 떨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살덩이에서는 각각의 얼굴들이 만드는 호흡 소리를 내기만 할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규칙 없이 박힌 눈동자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는 건 진짜 공포스러웠지만

"으, 아, 으"

"괜찮아요?"

"아, 으으 저, 저건 대체?"

"키메라 같은데요. 아마 누군가가 여기서 키메라 실험을 하나봐요."

"아, 아카데미에서 대체 어떤 놈이"

그녀는 큰 충격에 휩싸인 듯 했다.

원체 비위가 좋은 만큼 토악질을 한다던가 완전한 패닉에 빠진다던가 그러진 않았지만, 식은 땀을 마구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건 별 수 없었다.

아마 아까의 상황은 뇌리에 깊게 박혀 트라우마가 되었으리라.

'죄송해요. 정말로'

이 상황은 계획된 것이다.

나는 일부러 가장 끔찍한 키메라가 있는 방을 성초은에게 보여줬고, 그렇게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줬다.

그녀가 키메라 제작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 온건한 방법도 있기야 있겠지만 미적대다 망치는 것보단 한 번 확실하게 하고 가는 게 좋을 터였다.

"으, 아으 저런 게, 왜 지하에"

"미안해요. 이런 걸 보여줘서."

"후우, 흐으, 으 괘, 괜찮아요, 전, 정말로"

그래도.

이렇게 흑람마녀의 가능성은 조금이나마 흐릿해졌을 거다.

나는 게임에서 봤던, 빨판 대신 성초은의 얼굴들이 달린 크라켄의 일러스트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지워나갔다.

약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그녀는 비로소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몸의 떨림을 멈추고 옷깃을 이용해 이마의 땀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올라가시겠어요?"

"아뇨, 전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꼭 봐야겠어요. 후배님 먼저 올라가세요."

"위험할지도 모르는데요."

"됐어요. 전 후배님 생각보다 강하답니다."

그녀는 굳은 몸짓으로 발을 내디뎠다.

과연 아까의 공포심은 순식간에 떨쳐낸 듯 했다.

성초은 선배님은 저런 당당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뒤틀린 괴생명체들의 여왕 따위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따라 붙으며 곁에서 같이 걸었다.

나 또한 볼 일이 끝나지 않았기에.

***

"은퇴한 흑마법 교수가 범인이었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요."

우리는 모든 방문을 열어가며 나아갔고, 마침내 본 연구실을 찾았다.

연구소의 주인은 꽤 급하게 도망쳤는지 컴퓨터는 제대로 부쉈지만 보고서와 샘플은 그대로 서랍에 남겨두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걸로 볼 일은 끝났네요. 크게 위험한 키메라도 없었고."

"노망난 흑마법사는 어떻게 도망친 듯 하지만요. 대체 어디로 도망친 거야? 혹시 니르가 학파를 전공한 마법사는 아니겠죠?"

니르가 학파는 은신계 마법을 쓰는 마법 학파다.

땅으로 꺼지거나 천장을 뚫고 솟아오른 흔적도 없으니 은신을 의심하는 거겠지.

뭐, 은신은 맞지만 은신 마법은 아니었다.

나는 연구실 구석에 한가득 쌓인 실험도구들을 발로 밀어내 바닥에 박힌 맨홀을 드러냈다.

시약을 버리는 하수구로 위장하고 있지만, 이 곳은 사실 하나의 비밀통로였다.

맨홀 뚜껑을 들어낸 나는 우연히 찾은 체 하며 성초은을 불렀다.

"와, 이걸 찾았어요? 역시 전투계는 동물적이라니까."

"그거 뭔가 욕으로 들리는데요?"

"오해에요. 딱히 전투계를 깔본 건 아니니까."

그녀는 빛의 구를 만들어 맨홀 아래로 떨어트렸다.

마법의 빛이 비밀통로의 형태를 드러내며 10m 아래의 바닥에 떨어졌다.

"오, 역시 가봐요, 먼저!"

"언제는 혼자 갈 수 있다더니"

"빨리요! 빨리 가면 따라잡을 수도 있잖아요?"

에휴.

나는 치마를 붙잡고 맨홀 구멍으로 뛰어내려 깔끔하게 착지했다.

잠시 머뭇대던 우리의 성실한 연구계 학생회장님은 내가 받아주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나서야 겨우 눈을 꼭 감고 뛰어내렸다.

"꺅!"

포옥.

나는 그녀를 여유로이 받아냈다.

내 신체능력이 저조하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전투계 기준.

이런 일 정도는 가뿐하게 할 수 있었다.

"우아 이 건방진 수박 가슴이 충돌시간을 늘려서 충격력을 감쇄시켰어요. 이게 I = ft(충격량 = 힘 × 시간)?"

"성희롱하지 마요!"

"농담이에요, 농담."

그녀는 내 품에서 내리며 땅에 떨어진 빛의 구를 다시 띄웠다.

비밀통로는 아까의 복도보다 살짝 더 좁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습도는 아까보다 더 올라갔지만

"자, 가요! 빨리 잡으러 가자구요."

"네."

나는 푸른 이끼 위를 힘껏 내달리는 성초은의 뒷모습을 보며 이 안에 있을 망토를 떠올렸다.

세상 파렴치하고 수치스러운 빨간 망토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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