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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23화 (23/119)

〈 23화 〉 수상하고 이상한 것들은 늘 땅 밑으로 파고든다 (2)

* * *

성초은의 힘찬 행군은 오래 가지 못했다.

비밀통로는 꽤 짧은 외길이었으니까.

막다른 길에 다다른 그녀는 머쓱한 몸짓으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성초은의 뒤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녀의 어깨 너머를 힐끔 봤다.

그 벽엔 현대 마법체계가 아닌 기괴한 마법진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이, 이게 무슨 마법진이죠? 아니, 마법진이 맞긴 한 건가요?"

"문 같은데요. 한 번 볼게요."

나는 그녀를 지나쳐 마법진에 손을 뻗었다.

성초은은 조심성이라곤 추호도 없는 내 행동에 화들짝 놀라선 나를 말리려 했지만, 내 손은 당연히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마법진에 손을 올리자,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가 마법진에서 들려왔다.

­ 서사의 봉인지에 온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네?"

­ 나는 봉인지의 입구를 지키는 수호의 정령이오.

마법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어둠을 등진 악마, 카우디의 목소리였다.

용광로를 뽑아 던져버리고 그 안에서 송곳니 학살자와 천린을 꺼내 던져준 거인 대장장이 말이다.

그의 어조는 참으로 어색했는데, 성질에 맞지 않는 수호의 정령 코스프레를 하느라 꽤 진땀을 빼는 기색이었다.

"이게 뭐에요, 후배님?"

­ 이곳은 영웅의 증표가 잠든 신성한 곳이오. 지나가려면 내 동의가 필요하지.

"녹음된 목소리네요."

"그건 저도 알거든요?"

­ 그대는 결코 우연히 이곳에 온 게 아니오. 그대를 선택한 티라엘께서 그대를 잉 크흠, 인도한 것이지.

카우디가 어둠을 등졌다곤 해도 본래 악마 출신인지라, 대천사 핑계를 대는 부분에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성초은의 표정은 당황을 넘어 어이 없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하지만 그대가 대천사님의 인도를 받는 자라고 해서 나까지 그대를 영웅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라오. 무릇 영웅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길을 찾아내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법! 내 그대에게 시련을 내리리다. 준비하시오! 정말 지혜롭지 못한 자라면 지금이라도 옆에 뜬 샵(#)자를 누르고 그만두길 바라오. 계속하겠다면 별표(*)를 누르시오.

"."

나는 자유로운 왼손을 움직여 성의 없는 모습으로 떠 있는 별표를 눌렀다.

­ 훌륭하오! 그렇다면 시련을 내리겠소. 내 문제에 알맞은 대답을 하면 된다오.

"후배님, 이거 괜찮은 거 맞죠? 틀리면 다친다거나 그런 건"

"설마요. 대천사고 영웅이고 하는데 틀렸다고 죽이진 않겠죠."

이 비밀통로는 카우디가 아카데미 증축에 참여했을 때 몰래 만든 구조물이었다.

몰래 아카데미에 비밀통로를 끼워넣은 이유가 참으로 묘했는데, 그 이유란 바로 '딸의 숙원을 이뤄주기 위해서'이다.

새로 탄생하는 영웅의 서사와 함께하고 싶다는 딸의 숙원을!

'문제는 여기가 연구계 지하라는 거지만'

전투계 건물이 아니라 연구계 건물 밑에 이런 걸 만들어 놓은 건 그의 작은 실책이었다.

기껏해봐야 연구용 마법만 겨우 익힌 연구계 학생들이 그 망토를 쥐고 영웅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었을 뿐더러, 결국 미친 키메라 제작자가 지하를 봉쇄하며 완전히 잊혀졌으니까.

카우디가 이윽고 시련 아니, 문제를 냈다.

­ 한 남자가 있소. 그가 그의 집에서 남쪽으로 1km, 동쪽으로 1km, 북쪽으로 1km 갔더니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오. 그 남자의 집은 어디에 있겠소?

이건 꽤 유명한 문제였다.

원작에선 제작진이 마구잡이로 입력해 넣은 수많은 문제 중 하나를 뽑아서 내는데, 지금은 다행히도 내가 아는 문제가 나왔다.

답은 북극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용한 문제였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답을 외쳤다.

"북극점!"

­ 틀렸노라아아아!!!!!!!

내가 손대고 있던 마법진이 하얗게 빛났다.

칠흑여제의 사랑이 제때 반응하며 내게 갑옷을 씌웠다.

펑!!

"으아아!!"

"후, 후배님!!"

나는 약 10m를 튕겨져 나가며 땅을 굴렀다.

충격파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나는 이끼와 곰팡이 위를 데굴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야!!!! 이게 왜 틀려!!!!"

"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요. 어휴, 정말!"

허겁지겁 달려온 성초은이 내 등을 퍽 쳤다.

칠흑여제의 사랑 덕분에 충격이 전혀 안 왔지만.

나는 세상 억울해서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저거 답 북극점 아니에요? 북극점에서 남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면 결국 북극점이잖아요!!!"

"그, 그걸 왜 저한테 따져요? 그보다 그거 답 두 개인 것 같은데요?"

답이 두 개라고?

대체 무슨 소리지?

"듣고 나서 생각해봤는데요, 북극점도 분명히 답이지만 남극점을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1 + 1/2π km인 동심원 위의 점도 답이 될 수 있어요."

"네?"

무슨 소리지?

반지름이 뭐?

"그러니까, 남극점을 중심으로 하는 둘레가 1km인 원을 생각해봐요."

"그게 무슨 아."

둘레가 1km인 원 위에서 동쪽으로 한 바퀴를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말인 즉, 남자가 남쪽으로 1km 내려왔을 때 둘레가 1km인 원 위에 서게 된다면 동쪽으로 1km 걸었을 때 제자리로 오게 된다는 말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아아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그 원 위에서 1km 위에 있는 모든 지점이 남자의 집이 될 수 있다, 그거군요?"

"그렇죠. 역시 이해가 빠르다니까."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북극점은 왜 틀린 건데요?!"

"그건 저도 모르죠?"

아니, 이거 어떤 놈이 넣은 문제야?

이딴 더러운 짓을 하다니!

나는 다시 벽에 다가가 마법진에 손을 얹고 새로운 답을 외쳤다.

그러자 정답이라고 크게 외치는 말과 함께 벽이 흐릿해지며 길이 열렸다.

성초은이 그 광경을 보며 내게 우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괜히 볼을 부풀리며 욕지거리를 했다.

"시발!"

"나쁜 말 하지 마세요."

"우이씨. 화 안 나게 생겼어요? 문제 오류 때문에 저 더러운 땅을 굴렀는데!"

"저는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답니다."

"거짓말! 전에 제 엉덩이도 막 때렸으면서!"

"그건 훈계의 의미였거든요."

나는 불퉁한 표정으로 성초은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도도하게 벽 너머로 걸어갔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흐릿해진 벽 너머에는 큰 원형의 방이 있었다.

웬 전신갑옷들이 중앙에 있는 제단에 예를 표하는 자세로 둥글게 서 있었고, 중앙의 아름다운 정사각형 제단엔 빨간 천조각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원형의 벽에서 횃불이 순서대로 켜졌는데, 이건 꽤나 장관이었다.

성초은은 주변에 다른 통로가 없는지 살피며 기웃대다 곧 갑주들 사이를 누비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누군가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비참한 표정으로 벌벌 떠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성초은이 그의 얼굴을 보더니 이빨을 까드득 갈았다.

"교수님."

"서, 성초은 양?"

"은퇴하신다더니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아, 아니, 그게"

"내가 1학년 때 당신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아? 은퇴한다고 막 떠벌리면서 괴상한 과제나 막 내고, 벌점도 제 내키는대로 막 뿌리고! 내가 학생들 대표로 한 마디 하니까 나한테 벌점을 45점이나 먹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걸? 내가 그걸 복구하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그랬던 양반이 뭐가 잘나서 이 지하에서 괴상한 키메라들이나 만들고 있었을까? 너 때문에 오늘 잠도 못 자게 생겼잖아, 이 씨발새끼야!!"

"미안! 미안하니까 자네 손에서 마법은 내려 놓고 말하면!"

성초은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마법진을 띄웠다.

아마 저 인간이 1학년 때 그녀를 많이 괴롭혔던 모양이다.

"카에다!"

"자, 잠깐!"

"패리데!"

"오, 오해일세!!"

"외르스테드!!"

번쩍!

"끄으어어어"

털썩.

성초은의 손을 떠난 번개가 노인을 기절시켰다.

그녀는 엎어진 교수에게 다가가 몸을 몇 번 콱콱 밟았다.

그렇게나 한이 컸을까.

"어휴, 이걸 또 어떻게 끌고 간대. 후배님이 들어주실 거죠?"

"선배님."

"네?"

"나쁜 말 하지 마세요."

"."

성초은은 몇번 헛기침을 하더니 교수의 어깨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제단으로 다가가 빨간 보자기를 손 끝으로 두드렸다.

툭툭.

­ 으음

툭툭.

­ 아이씨,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쁜 악당 놈아?

보자기는 약하게 꿈틀대다 나를 인식했는지 몸을 딱 굳히고 말았다.

그것은 고운 직물로 된 빨간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 다, 다, 다, 다

"다메데스까?"

­ 당신 뭐야!!!!!!

빨간 보자기가 펄쩍 뛰었다.

제단에 수직으로 선 그것은 건방지게도 천 귀퉁이를 움직여 내게 삿대질을 했다.

"정시현인데."

­ 깜짝 놀랐잖아요!! 초면에 자고 있는 걸 깨우는 건 어디 예의에요?! 유비도 제갈량이 자고 있을 땐 안 깨우고 기다렸다는데!!

"."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공동에 울린다.

이 건방진 천쪼가리의 이름은 퍼베이시브 에픽.

영웅담을 동경하던 카우디의 딸, 셀레스티가 깃든 망토였다.

[퍼베이시브 에픽(S)]

­ 듣거라!! 세상에 울려퍼지는 영웅담을!!

이 녀석은 성능은 좋지만 꽤 시끄럽고 부끄러운 장비다.

세상에, 영웅강림 포즈와 함께 멋있는 대사를 시키는 장비라니!

그렇게 얻을 수 있는 버프는 굉장한 수준이지만

나는 천을 잡아들며 부탁했다.

"휴우, 나랑 같이 가자."

­ 뭐요?! 대뜸 깨워서는 같이 가자니! 그리고 저는 멋진 영웅이 될 미소년이 아니면 따라가지 않을 거에요!

"멋진 영웅이 될 미소녀는 안 된단 말이야? 성차별주의자구나?"

­ 아니거든요! 당신에겐 영웅의 자격 따위 느껴지지 않아서 그렇거든요? 멋진 미소년을 데려오세요! 이 가슴 큰 히로인1 주제에!

이 녀석은 지구의 영웅담(판타지 소설)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아버지를 따라 어둠을 등진 뒤 육체를 버리고 퍼베이시브 에픽에 깃든 소설 중독자다.

그런 소설들의 주인공은 대개 남자인지라 이 망토는 여성 캐릭터가 오면 이렇게 강짜를 부리기도 한다.

다만, 나는 이 녀석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임의 선택지를 따라 읽었다.

"너 '무정혈후는 두번째 길을 걷는다' 읽어본 적 없니?"

­ 그거요? 당연히 있죠! 아아,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은 영웅이라니

"그 소설 아니, 영웅담의 주인공은 여자인데?"

­ 그, 그건 그렇죠! 누가 아니래요?

"그런데 왜 남자만 고집하는 거야? 혹시 그냥 남자가 좋아서 그런 거야, 이 변태 망토야?"

­ 아니에요! 그냥 남자가 영웅담에 더 많이 나오니까 그런 거죠!

나는 그 말에 과장되게 이마를 탁 짚으며 비참하게 읊조렸다.

"아아, 역시 세상은 내게 열려 있지 않구나! 이 천하에 나를 환영할 곳은 진정 창관 뿐이란 말인가?"

­ !!

이 대사는 소설 '무정혈후는 두번째 길을 걷는다'의 주인공, 유서린의 대사였다.

수많은 명성을 쌓았음에도 적에게 팔이 잘리는 등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자 그녀의 현상금을 노린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치료하는 척 하면서 식칼로 찔러죽이는데, 그 장면에서 나오는 비극적인 대사였다.

물론 그 후 회귀해 '나를 위해 살겠다'를 선언하지만.

­ 아, 알겠어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같이 가요, 그럼!

망토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더니 내 팔을 타고 감겨들어왔다.

퍼베이시브 에픽은 귀속된 이상 몸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장비.

빨간 천이 스르르 움직여 내 등에 착 매였다.

나는 졸지에 교복을 입고 펄럭이는 빨간 망토를 등에 맨 이상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등에 있지 말고 이리 와."

­ 앗! 안 돼요!

나는 망토를 잡아당겨 팔에 매었다.

밖에서 어떻게 그런 꼴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부끄럽게!

이 녀석은 전혀 안 부끄러운 듯 했지만.

귀찮은 망토를 쟁취해낸 내가 한숨 돌리고 있자, 성초은이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정말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몸짓으로.

"저기 그 보자기랑 뭐하는 거에요? 그게 말한 거 맞죠?"

­ 보자기?? 말 다했어요? 이 다크서클 히로인2 주제에!

"와, 오늘 별걸 다 보네. 세상 오만가지 키메라부터 말하는 보자기까지"

­ 뭐, 뭐요?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망할 보자기는 내게만 들리게 말한다던지, 그딴 기능이 없었다.

모니터 밖에서야 별 의미 없는 설정이었다지만 몸에 이걸 끼고 살아가게 된다니 정말 비극적이고 비참한 심정이었다.

무정혈후 뭐시기의 주인공보다 불쌍한 내가 아닐까.

­ 뭐라고 좀 해봐요! 얘가 막 저한테 보자기라고 하잖아요! 영웅님!!

팔에 감긴 망토가 꿈틀대며 모서리로 내 몸을 퍽퍽 쳤다.

그 때 칠흑여제의 사랑이 멋대로 발동했다.

­ 이런 건 대체 왜 주워오신 건가요.

스르르 철컥.

­ 뭐? 야, 야! 이 망할 자수정이! 문 열어!

콩콩.

­ .

칠흑여제의 사랑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만난 지 10분만에 그 과묵한 칠흑여제를 움직이다니, 정말 죽여주게 시끄러운 망토였다.

성능만 아니었어도 당장 찢어서 버렸을텐테

"미안, 칠흑여제."

"네? 칠흑여제요? 재앙?"

"아니에요. 일단 나가고 보죠. 지하는 이제 넌덜머리 나요."

"네 그러네요."

하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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