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수상하고 이상한 것들은 늘 땅 밑으로 파고든다 (2)
* * *
성초은의 힘찬 행군은 오래 가지 못했다.
비밀통로는 꽤 짧은 외길이었으니까.
막다른 길에 다다른 그녀는 머쓱한 몸짓으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성초은의 뒤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녀의 어깨 너머를 힐끔 봤다.
그 벽엔 현대 마법체계가 아닌 기괴한 마법진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이, 이게 무슨 마법진이죠? 아니, 마법진이 맞긴 한 건가요?"
"문 같은데요. 한 번 볼게요."
나는 그녀를 지나쳐 마법진에 손을 뻗었다.
성초은은 조심성이라곤 추호도 없는 내 행동에 화들짝 놀라선 나를 말리려 했지만, 내 손은 당연히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마법진에 손을 올리자,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가 마법진에서 들려왔다.
서사의 봉인지에 온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네?"
나는 봉인지의 입구를 지키는 수호의 정령이오.
마법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어둠을 등진 악마, 카우디의 목소리였다.
용광로를 뽑아 던져버리고 그 안에서 송곳니 학살자와 천린을 꺼내 던져준 거인 대장장이 말이다.
그의 어조는 참으로 어색했는데, 성질에 맞지 않는 수호의 정령 코스프레를 하느라 꽤 진땀을 빼는 기색이었다.
"이게 뭐에요, 후배님?"
이곳은 영웅의 증표가 잠든 신성한 곳이오. 지나가려면 내 동의가 필요하지.
"녹음된 목소리네요."
"그건 저도 알거든요?"
그대는 결코 우연히 이곳에 온 게 아니오. 그대를 선택한 티라엘께서 그대를 잉 크흠, 인도한 것이지.
카우디가 어둠을 등졌다곤 해도 본래 악마 출신인지라, 대천사 핑계를 대는 부분에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성초은의 표정은 당황을 넘어 어이 없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가 대천사님의 인도를 받는 자라고 해서 나까지 그대를 영웅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라오. 무릇 영웅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길을 찾아내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법! 내 그대에게 시련을 내리리다. 준비하시오! 정말 지혜롭지 못한 자라면 지금이라도 옆에 뜬 샵(#)자를 누르고 그만두길 바라오. 계속하겠다면 별표(*)를 누르시오.
"."
나는 자유로운 왼손을 움직여 성의 없는 모습으로 떠 있는 별표를 눌렀다.
훌륭하오! 그렇다면 시련을 내리겠소. 내 문제에 알맞은 대답을 하면 된다오.
"후배님, 이거 괜찮은 거 맞죠? 틀리면 다친다거나 그런 건"
"설마요. 대천사고 영웅이고 하는데 틀렸다고 죽이진 않겠죠."
이 비밀통로는 카우디가 아카데미 증축에 참여했을 때 몰래 만든 구조물이었다.
몰래 아카데미에 비밀통로를 끼워넣은 이유가 참으로 묘했는데, 그 이유란 바로 '딸의 숙원을 이뤄주기 위해서'이다.
새로 탄생하는 영웅의 서사와 함께하고 싶다는 딸의 숙원을!
'문제는 여기가 연구계 지하라는 거지만'
전투계 건물이 아니라 연구계 건물 밑에 이런 걸 만들어 놓은 건 그의 작은 실책이었다.
기껏해봐야 연구용 마법만 겨우 익힌 연구계 학생들이 그 망토를 쥐고 영웅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었을 뿐더러, 결국 미친 키메라 제작자가 지하를 봉쇄하며 완전히 잊혀졌으니까.
카우디가 이윽고 시련 아니, 문제를 냈다.
한 남자가 있소. 그가 그의 집에서 남쪽으로 1km, 동쪽으로 1km, 북쪽으로 1km 갔더니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오. 그 남자의 집은 어디에 있겠소?
이건 꽤 유명한 문제였다.
원작에선 제작진이 마구잡이로 입력해 넣은 수많은 문제 중 하나를 뽑아서 내는데, 지금은 다행히도 내가 아는 문제가 나왔다.
답은 북극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용한 문제였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답을 외쳤다.
"북극점!"
틀렸노라아아아!!!!!!!
내가 손대고 있던 마법진이 하얗게 빛났다.
칠흑여제의 사랑이 제때 반응하며 내게 갑옷을 씌웠다.
펑!!
"으아아!!"
"후, 후배님!!"
나는 약 10m를 튕겨져 나가며 땅을 굴렀다.
충격파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나는 이끼와 곰팡이 위를 데굴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야!!!! 이게 왜 틀려!!!!"
"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요. 어휴, 정말!"
허겁지겁 달려온 성초은이 내 등을 퍽 쳤다.
칠흑여제의 사랑 덕분에 충격이 전혀 안 왔지만.
나는 세상 억울해서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저거 답 북극점 아니에요? 북극점에서 남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면 결국 북극점이잖아요!!!"
"그, 그걸 왜 저한테 따져요? 그보다 그거 답 두 개인 것 같은데요?"
답이 두 개라고?
대체 무슨 소리지?
"듣고 나서 생각해봤는데요, 북극점도 분명히 답이지만 남극점을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1 + 1/2π km인 동심원 위의 점도 답이 될 수 있어요."
"네?"
무슨 소리지?
반지름이 뭐?
"그러니까, 남극점을 중심으로 하는 둘레가 1km인 원을 생각해봐요."
"그게 무슨 아."
둘레가 1km인 원 위에서 동쪽으로 한 바퀴를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말인 즉, 남자가 남쪽으로 1km 내려왔을 때 둘레가 1km인 원 위에 서게 된다면 동쪽으로 1km 걸었을 때 제자리로 오게 된다는 말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아아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그 원 위에서 1km 위에 있는 모든 지점이 남자의 집이 될 수 있다, 그거군요?"
"그렇죠. 역시 이해가 빠르다니까."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북극점은 왜 틀린 건데요?!"
"그건 저도 모르죠?"
아니, 이거 어떤 놈이 넣은 문제야?
이딴 더러운 짓을 하다니!
나는 다시 벽에 다가가 마법진에 손을 얹고 새로운 답을 외쳤다.
그러자 정답이라고 크게 외치는 말과 함께 벽이 흐릿해지며 길이 열렸다.
성초은이 그 광경을 보며 내게 우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괜히 볼을 부풀리며 욕지거리를 했다.
"시발!"
"나쁜 말 하지 마세요."
"우이씨. 화 안 나게 생겼어요? 문제 오류 때문에 저 더러운 땅을 굴렀는데!"
"저는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답니다."
"거짓말! 전에 제 엉덩이도 막 때렸으면서!"
"그건 훈계의 의미였거든요."
나는 불퉁한 표정으로 성초은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도도하게 벽 너머로 걸어갔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흐릿해진 벽 너머에는 큰 원형의 방이 있었다.
웬 전신갑옷들이 중앙에 있는 제단에 예를 표하는 자세로 둥글게 서 있었고, 중앙의 아름다운 정사각형 제단엔 빨간 천조각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원형의 벽에서 횃불이 순서대로 켜졌는데, 이건 꽤나 장관이었다.
성초은은 주변에 다른 통로가 없는지 살피며 기웃대다 곧 갑주들 사이를 누비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누군가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비참한 표정으로 벌벌 떠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성초은이 그의 얼굴을 보더니 이빨을 까드득 갈았다.
"교수님."
"서, 성초은 양?"
"은퇴하신다더니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아, 아니, 그게"
"내가 1학년 때 당신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아? 은퇴한다고 막 떠벌리면서 괴상한 과제나 막 내고, 벌점도 제 내키는대로 막 뿌리고! 내가 학생들 대표로 한 마디 하니까 나한테 벌점을 45점이나 먹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걸? 내가 그걸 복구하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그랬던 양반이 뭐가 잘나서 이 지하에서 괴상한 키메라들이나 만들고 있었을까? 너 때문에 오늘 잠도 못 자게 생겼잖아, 이 씨발새끼야!!"
"미안! 미안하니까 자네 손에서 마법은 내려 놓고 말하면!"
성초은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마법진을 띄웠다.
아마 저 인간이 1학년 때 그녀를 많이 괴롭혔던 모양이다.
"카에다!"
"자, 잠깐!"
"패리데!"
"오, 오해일세!!"
"외르스테드!!"
번쩍!
"끄으어어어"
털썩.
성초은의 손을 떠난 번개가 노인을 기절시켰다.
그녀는 엎어진 교수에게 다가가 몸을 몇 번 콱콱 밟았다.
그렇게나 한이 컸을까.
"어휴, 이걸 또 어떻게 끌고 간대. 후배님이 들어주실 거죠?"
"선배님."
"네?"
"나쁜 말 하지 마세요."
"."
성초은은 몇번 헛기침을 하더니 교수의 어깨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제단으로 다가가 빨간 보자기를 손 끝으로 두드렸다.
툭툭.
으음
툭툭.
아이씨,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쁜 악당 놈아?
보자기는 약하게 꿈틀대다 나를 인식했는지 몸을 딱 굳히고 말았다.
그것은 고운 직물로 된 빨간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다, 다, 다, 다
"다메데스까?"
당신 뭐야!!!!!!
빨간 보자기가 펄쩍 뛰었다.
제단에 수직으로 선 그것은 건방지게도 천 귀퉁이를 움직여 내게 삿대질을 했다.
"정시현인데."
깜짝 놀랐잖아요!! 초면에 자고 있는 걸 깨우는 건 어디 예의에요?! 유비도 제갈량이 자고 있을 땐 안 깨우고 기다렸다는데!!
"."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공동에 울린다.
이 건방진 천쪼가리의 이름은 퍼베이시브 에픽.
영웅담을 동경하던 카우디의 딸, 셀레스티가 깃든 망토였다.
[퍼베이시브 에픽(S)]
듣거라!! 세상에 울려퍼지는 영웅담을!!
이 녀석은 성능은 좋지만 꽤 시끄럽고 부끄러운 장비다.
세상에, 영웅강림 포즈와 함께 멋있는 대사를 시키는 장비라니!
그렇게 얻을 수 있는 버프는 굉장한 수준이지만
나는 천을 잡아들며 부탁했다.
"휴우, 나랑 같이 가자."
뭐요?! 대뜸 깨워서는 같이 가자니! 그리고 저는 멋진 영웅이 될 미소년이 아니면 따라가지 않을 거에요!
"멋진 영웅이 될 미소녀는 안 된단 말이야? 성차별주의자구나?"
아니거든요! 당신에겐 영웅의 자격 따위 느껴지지 않아서 그렇거든요? 멋진 미소년을 데려오세요! 이 가슴 큰 히로인1 주제에!
이 녀석은 지구의 영웅담(판타지 소설)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아버지를 따라 어둠을 등진 뒤 육체를 버리고 퍼베이시브 에픽에 깃든 소설 중독자다.
그런 소설들의 주인공은 대개 남자인지라 이 망토는 여성 캐릭터가 오면 이렇게 강짜를 부리기도 한다.
다만, 나는 이 녀석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임의 선택지를 따라 읽었다.
"너 '무정혈후는 두번째 길을 걷는다' 읽어본 적 없니?"
그거요? 당연히 있죠! 아아,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은 영웅이라니
"그 소설 아니, 영웅담의 주인공은 여자인데?"
그, 그건 그렇죠! 누가 아니래요?
"그런데 왜 남자만 고집하는 거야? 혹시 그냥 남자가 좋아서 그런 거야, 이 변태 망토야?"
아니에요! 그냥 남자가 영웅담에 더 많이 나오니까 그런 거죠!
나는 그 말에 과장되게 이마를 탁 짚으며 비참하게 읊조렸다.
"아아, 역시 세상은 내게 열려 있지 않구나! 이 천하에 나를 환영할 곳은 진정 창관 뿐이란 말인가?"
!!
이 대사는 소설 '무정혈후는 두번째 길을 걷는다'의 주인공, 유서린의 대사였다.
수많은 명성을 쌓았음에도 적에게 팔이 잘리는 등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자 그녀의 현상금을 노린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치료하는 척 하면서 식칼로 찔러죽이는데, 그 장면에서 나오는 비극적인 대사였다.
물론 그 후 회귀해 '나를 위해 살겠다'를 선언하지만.
아, 알겠어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같이 가요, 그럼!
망토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더니 내 팔을 타고 감겨들어왔다.
퍼베이시브 에픽은 귀속된 이상 몸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장비.
빨간 천이 스르르 움직여 내 등에 착 매였다.
나는 졸지에 교복을 입고 펄럭이는 빨간 망토를 등에 맨 이상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등에 있지 말고 이리 와."
앗! 안 돼요!
나는 망토를 잡아당겨 팔에 매었다.
밖에서 어떻게 그런 꼴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부끄럽게!
이 녀석은 전혀 안 부끄러운 듯 했지만.
귀찮은 망토를 쟁취해낸 내가 한숨 돌리고 있자, 성초은이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정말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몸짓으로.
"저기 그 보자기랑 뭐하는 거에요? 그게 말한 거 맞죠?"
보자기?? 말 다했어요? 이 다크서클 히로인2 주제에!
"와, 오늘 별걸 다 보네. 세상 오만가지 키메라부터 말하는 보자기까지"
뭐, 뭐요?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망할 보자기는 내게만 들리게 말한다던지, 그딴 기능이 없었다.
모니터 밖에서야 별 의미 없는 설정이었다지만 몸에 이걸 끼고 살아가게 된다니 정말 비극적이고 비참한 심정이었다.
무정혈후 뭐시기의 주인공보다 불쌍한 내가 아닐까.
뭐라고 좀 해봐요! 얘가 막 저한테 보자기라고 하잖아요! 영웅님!!
팔에 감긴 망토가 꿈틀대며 모서리로 내 몸을 퍽퍽 쳤다.
그 때 칠흑여제의 사랑이 멋대로 발동했다.
이런 건 대체 왜 주워오신 건가요.
스르르 철컥.
뭐? 야, 야! 이 망할 자수정이! 문 열어!
콩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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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여제의 사랑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만난 지 10분만에 그 과묵한 칠흑여제를 움직이다니, 정말 죽여주게 시끄러운 망토였다.
성능만 아니었어도 당장 찢어서 버렸을텐테
"미안, 칠흑여제."
"네? 칠흑여제요? 재앙?"
"아니에요. 일단 나가고 보죠. 지하는 이제 넌덜머리 나요."
"네 그러네요."
하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