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어둠과 환상 (1)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단화를 신으며 망토에 깃든 셀레스티에게 신신당부했다.
"제발 밖에 나가선 조용히 해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신호 주고 귓속말 해주고. 응?"
안 그러면 어떻게 돼요?
"곤란해져. 좀 많이."
흐응, 흥. 알겠어요. 노력은 해볼게요.
"."
노력은 해보겠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믿는 것 외엔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퍼베이시브 에픽을 왼팔에 질끈 동여매고 기숙사를 나섰다.
완연한 봄의 따뜻한 바람이 기분좋게 살랑이는 등굣길.
셀레스티는 기분이 좋은지 봄바람에 몸을 맡기고 천 끝을 흔들거렸다.
나는 생각 외로 얌전한 망토를 쓰다듬으며 Z반으로 들어섰다.
쾅!
"이 씨발 좆같은 새끼야! 다시 말해 봐!!"
"존나 애비빨로 올라온 새끼들이 나대는 거 보기 싫다고."
"이 개새끼가 우리에 대해서 뭘 안다고!"
"원아, 좀 참아! 하루이틀도 아니고 참"
'이게 무슨 일이래.'
반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진심을 다해 내리친 건지 완전히 작살난 책상, 그 옆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두 남학생.
그리고 둘을 뜯어 말리는 남학생이 하나.
모두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뜯어 말리는 애는 현서진이고, 개빡친 놈은 이원, 그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놈은 박지혁 아하, 대충 알겠네.'
박지혁은 겉보기엔 불량해도 꽤나 노력파의 성실한 인물이다.
수연이와 비슷하게 밑바닥에서부터 아득바득 올라온 녀석인지라 소위 '금수저'라 불리는 족속들을 싫어한다.
현서진과 이원은 각각 검성과 패창의 아들이니, 그 둘을 싫어하는 건 당연했다.
'나 참, 우리 수연이는 안 그런데'
하긴, 수연이는 유하가 있었으니까.
둘은 정말 극적인 계기로 만난지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너는 씨발아, 화도 안 나냐? 하루이틀도 아니고 줄창 되도 않는 시비나 존나게 털어대는데!!"
"으, 원아. 너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좆같으면 씨발아, 쳐 보든가. 낙하산 타고 내려 온 새끼는 구라 안 치고 5초 안에 개털어버릴 자신 있으니까."
"이 개새끼가!"
분기탱천해서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를 풍기는 이원과 달리 현서진은 분노는 커녕 박지혁에게 옅은 미안함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세상에, 저건 생불이다, 생불.
퍼베이시브 에픽은 미소년들의 싸움에 꽤 흥분했는지 천을 들썩거렸다.
이딴 걸 영웅의 증표라고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관전하고 있는 유하와 수연이에게 다가갔다.
극정 아카데미는 학생간의 싸움을 오히려 권장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현서진을 제외한 그 누구도 말리려 들지 않았다.
나는 그 둘에게 슬쩍 합류했다.
"오, 시현이 안녕. 오늘은 일찍 왔네."
"그러게.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박지혁이 자기 친구들이랑 다 들리게 쟤네 욕을 했나봐. 이원이 그걸 들어서 화난 것 같던데."
"그나저나 쟤는 대체 왜 참고 있는 거야? 선빵 필승도 모르냐, 이원 머저리야!"
수연이가 대책 없이 크게 외쳤다.
이원의 이글대는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가 다시 박지혁을 향했다.
이대로는 여기서 의미 없는 주먹다짐이 일어날 것 같아 앞으로 나섰다.
현서진이 구원자를 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지만, 나는 딱히 둘의 싸움을 말릴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그러지 말고 내려가서 대련해, 멍청이들아!"
"어, 어? 말려야"
"그렇네. 대련장이 있었지. 따라와!"
"그래, 이 씨발놈아. 얘들아, 가자!"
둘은 내 말을 듣더니 각자 학생들을 끌고 대련장으로 내려가버렸다.
아직 신입생이라 이런 방식의 분쟁 해결법을 몰랐던 것 같았다.
현서진은 답지 않게 우왕좌왕하다가 이원을 따라 대련장으로 따라갔다.
"와! 쟤네 싸우는 거야? 재밌겠다! 보러가자!"
"아니, 1교시가 10분 남았는데 무슨 구경이야. 쟤네 다시 올라오면 무조건 혼나겠는데."
"난 혼나도 상관 없는데"
"너 그러다가 빌보드에서 떨어져, 이 불량아야."
유하가 수연이의 볼을 꼬집었다.
수연이는 아프다는 듯 으으 거리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어차피 대련장에서의 대련은 자동으로 기록될 테니 직관을 못해도 큰 상관은 없다.
수연이의 표정은 우울해보였지만.
1교시는 인문학이었다.
내려갔던 학생들이 뒤늦게 들어왔던 것만 빼면 큰 일이 있진 않았다.
소곤소곤 들려오는 대화에 의하면 대련은 타임아웃으로 무승부가 난 듯 했다.
'흠 뭐, 그럴만 하지. 둘은 딱히 누가 위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드니까.'
그 둘은 아직도 서로를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창 때의 남자 애들다운 모습이다.
뒤이어 시작한 2교시는 마력학.
여기서 가르치는 마력학은 죄다 아는 내용인지라 나는 늘 이 시간에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곤 했다.
나는 평소대로 책 위에 팔을 놓고 엎드렸다.
꽈아악.
"?"
내가 드러눕자마자 망토가 내 손을 꽉 조였다.
왼손을 귀에 갖다대자, 셀레스티가 내게 나직히 말해왔다.
자지 마요!
나는 눈을 깜빡이다 망토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서 답했다.
잘 건데.
자지 말라니까요! 수업시간에 퍼질러 자는 영웅이 어딨어요?
난 다크히어로니까 괜찮아.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요! 수업 안 들으면 소리 지를 거에요!
"하아."
아까 이원이랑 박지혁이 싸우는 건 말릴 생각 없이 싱글벙글하며 봐놓고, 이제 와서 내게 모범생 코스프레를 시키다니.
정말 이중적인 망토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키고 앞을 봤다.
재미 없게 생긴 여선생님은 다 아는 내용을 칠판에 적으며 열심히 수업을 하고 계셨다.
흥미를 잃은 나는 다시 눈을 반 쯤 감고 죽은 척을 운용했다.
인간은 고뇌하는 시체라
으아아아악!!!!
"읏?!"
그 때 망토가 선언대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반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건 물론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변명에 나섰다.
"아, 아니, 그게, 깜빡 졸다가 악몽을 꿔서"
"정시현 학생? 이거 다 아는 건가요?"
"네? 네."
선생님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 사실 몰라요!"
"그렇게 잘 알면 앞으로 나와서 문제 하나 푸시죠. 심화 문제 7번입니다."
"아니, 정말로"
"어서요."
젠장.
이 빌어먹을 빨간 보자기가.
책을 갖고 앞으로 나온 나는 분필을 들고 종이를 뒤적대다 눈동자를 힐끔 움직여 유하를 보았다.
유하는 눈치 빠르게도 손가락을 펴 페이지 수를 알려줬다.
역시 넌 나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야!
그렇게 마주한 심화문제는 당연하게도 내 앞에선 기초문제에 불과했다.
정석 풀이는 계속적으로 양변의 수식을 미분해서 식들을 얻고, 그것들을 이용해 축차대입법 써서 원하는 값을 도출하는 것.
하지만 실상은 식을 적절히 변형한 뒤에 적분 한 번 때리면 끝나는 문제였다.
스윽, 스윽 탁.
"됐어요 271이네요."
"어떻게 푼 거죠?"
"정리하고 적분했는데요."
나는 칠판에 적은 세 줄짜리 풀이를 가리켰다.
칠판을 가득 메운 선생님의 정석 풀이와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학생들에겐 꽤 신박한 풀이였는지 단체로 감탄을 흘렸다.
"좋아요. 앞으론 졸지 마세요."
"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책상 밑으로 손을 보낸 나는 망토를 마구 쥐어 뜯었다.
망토가 항의하듯 마구 꿈틀댔다.
자기는 선언을 이행했을 뿐이라는 당당한 태도로!
나는 연거푸 망토를 괴롭히다가 한숨을 포옥 쉬었다.
어쩌겠는가. 수업을 안 들으면 소리 지르겠다고 한 걸 무시한 건 난데.
'죽은 척을 S까지 올려야하나. 그럼 자도 안 들킬 수 있을텐데.'
그 날, 나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
원작의 시나리오에서 주인공이 고스트룰즈를 막을 때, 그곳엔 인솔교사로 참여한 하르미아가 같이 있었다.
그녀는 불완전한 망혼의 방랑자를 찍어누르며 주인공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도록 도왔고, 그 덕에 주인공은 재앙을 막은 학생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해서, 나는 하르미아를 만나기 위해 유하를 데리고 교무실로 찾아갔다.
'박물관에 개인 현장체험학습을 갈 건데, 혹시 동행교사로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흥미 본위로 움직이는 그녀의 성격 상 의외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부탁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한국 칠성이 그리 쉽게 움직일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안 들어주면 어쩌지. 현서진이나 이원한테 부탁해서 검성이나 패창을 데려오는 수 밖에 없나? 아니, 내 생각엔 그게 더 성공률이 낮은 것 같은데'
일단 가보고 생각해보자.
하르미아는 본래 명예교수인지라 교무실에 자리가 없어야 했지만, 그녀는 한국 칠성의 위치를 이용해 교무실에 자신의 책상을 하나 놓은 뒤 거기에 눌러앉고 말았다.
물론 그 자리는 환상으로 덮여있는지라 학생들은 하르미아가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지만.
유하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교무실 구석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으음 아, 찾았다! 진짜 하르미아님이잖아?"
"찾았어? 어디있는데?"
"저어기 구석 쪽인데?"
유하가 교무실 구석으로 총총 달려갔다.
모든 사랑에게 사랑 받는 그녀에게 공간의 이질성을 꿰뚫어보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저기요, 하르미아님? 혹시 계세요?"
똑똑.
유하가 마력을 담은 손으로 허공을 두들겼다.
그러자 허공이 살짝 갈라지더니, 단숨에 우리를 집어삼켜 버렸다.
"꺅!"
"으앗?!"
깜짝 놀라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떠보니 풍경이 변해 있었다.
아카데미 교무실이 아니라 호화스런 침실로.
방 중앙에는 침실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칙칙한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회색 의자 위엔 눈을 감은 몽환적인 인상의 여성이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바로 한국 칠성, 환상파수꾼 하르미아였다.
하르미아가 눈을 뜨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환상이 아카데미 학생에게 간파 당한 게 조금 불만인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느릿하게 굴리다가 나를 보곤 놀란 표정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나한테 뭐 묻었나?
"조카님?"
"네?"
"아니, 거기 마법사 말고 주수리! 조카님이잖아?"
"저, 저요?"
조카? 무슨 조카?
내가? 하르미아의?
혹시 나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있는 건가?
"조만간 내가 찾아가려고 했는데 설마 스스로 찾아올 줄이야. 어서 앉으렴! 아, 거기 마법사도!"
"네? 이게 무슨 일 그보다 시현아! 너 하르미아님의 조카였어?!"
"아, 아니,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르미아는 방긋 웃으며 손짓으로 침대를 옮겨 우리 근처에 가져다 놨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르미아는 다시 사무용 의자에 앉은 뒤 땅을 박차며 바퀴를 굴려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은 마치 천진한 아이가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자! 얼그레이랑 디그레이맨 중에 뭐 마실래? 아, 김칫국물은 어때?"
"저어 죄송한데 제가 왜 하르미아님의 조카죠?"
내 말에 하르미아의 몸이 딱 굳었다.
우리가 그 모습에 흠칫하자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역시, 언니는 네게 어두운 과거를 말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하긴, 나였어도 딸에게 그런 건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 거야. 불쌍해라"
"?"
대체 뭐라는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