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어둠과 환상 (2)
* * *
한국 칠성은 당연하겠지만 일곱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S랭크의 등급을 받은 헌터들로, 대한민국 모두의 우러름과 존경을 받고 있는 영웅들이다.
실제로 이들 일곱 중 하나라도 없으면 국경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 일곱의 프로필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환상파수꾼, 하르미아. (소속 없음, 극정 아카데미 명예교수)
검성, 현우석. (소속 없음, 현서진의 아버지)
패창, 이준욱. (엑셀시어 부길드장, 이원의 아버지)
퓨어하트, 주하연. (마법소녀 단결회 회장)
성자, 박하민. (아가페 길드장, 악마숭배자)
애시드라 티어즈, 김동규. (산성비 길드장, 새로 등장한 칠성)
무검희, 가소희. (헌터협회 별동대원, 새로 등장한 칠성)
위의 나열 순서는 칠성의 무력 순위와도 일맥상통한다.
사실 김동규와 가소희는 설정의 공백에서 등장한 존재라 무력은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 다섯의 순위는 설정으로 정해진 순위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상성에 따라 서로 엎치락뒤치락하기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여튼 하르미아는 평소 컨디션이라면 현우석과 주하연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그녀는 다른 칠성들과 달리 순수한 인간의 핏줄을 타고 난게 아니니까 말이다.
무슨 말이냐면
"난 서큐버스 퀸의 딸이란다."
"네에?!"
"로엠의 대악마 말이야. 가네이아라고 하는 창년."
그녀는 사실 대악마와 인간의 혼혈이니까 말이다.
채유하가 눈을 크게 뜨고 항의하듯 물었다.
"하, 하르미아님이 무슨 악마에요! 마기가 없는데!"
"악마는 아니야. 인간의 혼혈이니까. 운 좋게도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마력을 타고 났지."
"악마랑 인간은 종 자체가 다른데 그런 게 가능할리가요!"
유하의 말대로, 악마와 인간은 종 자체가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사와 악마는 혼혈이 가능한 아종 관계지만 인간은 애초에 다른 차원의 출신이니까.
지구가 있는 차원의 공식적인 이름은 게임의 이름과 같은 '다페르헤이드'.
천사와 악마가 있는 천계와 마계의 공식적인 이름은 각각 '아인델로제'와 '로엠'. 합쳐서 '아인델로제 로엠'이라 부르는, 둘이서 하나인 차원이다.
어느 날 평화롭게 차원 공간을 노닐던 다페르헤이드는 재수 없게도 아인델로제와 로엠 사이에 부딪혀 박히게 되고, 그로 인해 차원이 부서지며 그 밖의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인간은 마력을 다루게 되었고, 괴물이 인간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르미아는 옆머리를 슥 빗어 넘기며 살풋 웃었다.
"그게 내 어미의 권능이야. 그 무엇과도 교접이 가능하고, 그 무엇의 아이라도 가질 수 있는 병신같은 능력."
"그런 게 서큐버스 퀸의 권능이란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요?"
"당연하지. 누가 로엠에서 서큐버스 퀸이 교접하고 애 낳는 걸 보고도 살아서 돌아오니?"
하르미아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손 끝에 분홍빛 마력구를 틔워 올렸다.
그 속에는 수많은 환상세계가 몽환적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가네이아는 괴상한 취미가 있거든. 처음 보는 것을 보면 문답무용으로 덮쳐서 아이를 배는 취미가. 나는 가네이아가 인간을 덮쳤을 때 탄생한 그 무언가야. 그리고 그건"
그녀의 검지가 나를 향했다.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제 어머니요?"
"그래, 너는 몰랐던 사실이겠지만 네 어머니는 사실 내 언니인 칠흑여제거든."
"."
아닌데.
설정상 음침한 주술소녀 정시현의 어머니는 평범한 민간인으로, 남편과 함께 사고사했다.
그로 인해 정시현은 부모님을 다시 살리기 위해 제사와 오컬트에 심취하게 됐고.
서큐버스 퀸이나 칠흑여제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것이다.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하르미아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제멋대로 끄덕이는 거야, 이 환상파수꾼아.
아무래도 그녀는 내 몸을 감싸던 칠흑여제의 갑주를 보고 오해한 것 같았다.
'잠깐, 그런데 칠흑여제가 하르미아의 자매란 설정이 있었나? 그런 건 없었는데.'
칠흑여제는 어디까지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의 재앙이었으므로 많은 설정이 있진 않았다.
재앙에 준하는 힘을 갖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을 가졌기에 힘을 숨기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존재.
북쪽의 방어선이 뚫렸을 때 도시를 지키려 힘을 개방했다가 재앙으로 지정되어, 헌터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감정을 떼어내고 말 그대로 살육기계가 된 비극적인 여성.
딱 그 정도 설정이었다.
'그러고보니 한국 칠성 뿐만 아니라 이것도 설정의 공백이네. 칠흑여제의 설정을 생각하면 서큐버스 퀸의 딸이라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어.'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했다.
세상을 칠흑으로 뒤덮는 그 힘은 역시 서큐버스 퀸의 혈통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다.
감정을 떼어낸 것도,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떼어낼 수 있는 악마의 특성과 일맥상통한다.
그랬기에 개연성을 위해 본래 없던 설정이 생겨난 것이다.
"칠흑여제 라이나는 내 언니였어. 같은 배에서, 같은 씨앗으로 태어난. 언니는 어둠을, 나는 환상을 물려받았지. 다른 자매들과 달리 언니와 나는 인간의 마음을 타고 났거든. 그래서 힘을 합쳐 지구로 도망쳐 나왔고. 결국 우리는 길이 갈라져서 나는 살아남았고 언니는 죽었지만"
분홍빛 마력구가 칠흑여제의 최후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꽤 젊었던 검성의 태양검이 어둠을 걷어내고 칠흑여제를 가른다.
그녀는 땅으로 떨어지며 눈물 한 방울을 남기고 먼지로 화해 스러졌고, 결국 땅에 닿은 건 슬프게 빛나는 물방울 모양의 보석 밖에 없었다.
칠흑여제의 마지막 표정은 죄책감과 슬픔을 품고 있었다.
"."
나는 왠지 모를 애상감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공교롭게도, 저 연출을 만든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그 때는 젊은 검성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서 그의 검에 쓰러지는 칠흑여제를 만든 건데, 지금 이렇게 다시 보니 칠흑여제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하는 침묵하는 나를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보다가 등을 토닥였다.
얘는 내가 뭔 생각을 하는 줄 알고 위로를 하는 건지, 원.
하르미아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짐짓 밝게 말했다.
"여튼! 내가 조만간 조카님을 찾아가려 했던 건 이것 때문이었어."
그녀가 땅을 박차 책상으로 의자를 굴렸다.
바퀴를 드르륵대며 칙칙한 책상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 하르미아가 다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반짝이는 마름모 모양의 분홍빛 수정이 있었다.
"이건?"
"하르미아 시스템이야."
"하, 하르미아 시스템이요?!"
"어머, 뭔가 알고 있니?"
나는 생각지 못한 데서 찾아온 행운에 놀라 자빠질 뻔 했다.
저건 칠흑여제의 사랑 다음가는 수준의 장비였으니까.
앞서 말했듯 악마는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떼어내어 결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칠흑여제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저렇게 보석으로 존재하는 하르미아 시스템은 하르미아가 직접 자신의 권능인 '환상'을 쪼개서 구축한 전투보조 시스템이다.
원작에선 하르미아를 직접 죽여야만 극히 희귀한 확률로 드랍되는 아이템인데, 지금 나는 그걸 공짜로 얻게 된 상황인 것이다.
"일단 받아보렴. 잠깐 옷 좀 벗어볼래?"
"옷이요?"
"심장에 박아야 되거든."
칠흑여제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르미아 시스템도 심장에 박아서 사용한다.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내 몸에 붙은 게 점점 많아지는 것만 같다.
나는 어제 얻은 망토를 힐끔 내려다 봤다.
꽈아악.
"."
뭘 보냐는 듯한 항의의 표시.
나는 가만히 단추를 열고 교복을 벗었다.
"후후, 시현이 옷 벗는 건 두 번째로 보네."
"조용히 해, 이 변태야!"
유하는 혀를 쏙 빼물곤 나를 놀렸다.
내 흉부를 감상하는 눈길이 참으로 불경했다.
나는 필요한 일이라고 자기세뇌하며 와이셔츠를 벗었다.
"브라도 벗어."
"왜요?"
"응? 직접 살갗에 박아야 하는 거니까."
"지, 진짜요?"
"당연하지. 이게 옷을 어떻게 투과하겠니?"
"."
전과 다르게 이번엔 브래지어까지 벗어야 했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눈동자를 떨다가 검은 브래지어를 벗어 내렸다.
그러자 유하가 내 가슴을 보곤 얼굴을 붉혔다.
"꺄아아아아! 예쁘다!"
"하, 하지마!!"
"피, 핑크"
"야아아!!!"
"아하하, 이런 건 참 자기 어머니를 닮았다니까."
"아니거든요!"
세상에, 이런 격렬한 반응이라니.
나는 다시금 하루빨리 가슴의 지방덩어리를 빼버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째 가슴은 결코 빠지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나는 가슴을 손에 감긴 망토로 가려버렸다.
셀레스티가 당황해서 꿈틀댔지만 나는 망토로 몸을 있는대로 감싸며 둘을 쏘아봤다.
"빠, 빨리 박아줘요! 어서!"
"그런 말은 많이 위험하지 않니?"
"아, 아, 아니이이!!! 장난치지 말고요!!!"
하르미아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수정 조각을 내밀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망토를 열어 하르미아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어? 잠깐."
"네, 네?"
"이거 뭐야, 이게? 이게 뭐지?"
그 때, 수정 조각을 쥐고 있던 하르미아의 손이 굳었다.
그녀는 수정을 치우고 내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다.
"꺄아악!! 뭐하시는 거에요!!"
"잠깐, 미안해, 확인할 게 있어서."
하르미아는 방금과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내 심장에 분홍빛 마력을 투사했다.
그녀는 심장 곁에 박힌 칠흑여제의 사랑을 느낀 듯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이건 언니의 감정 이네?"
"네? 아, 음, 그래요?"
"아 역시 그 갑주도 여기서 나오는 거였구나? 설마 그냥 안배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떼어내서 물려준 것이었을 줄은 언니는 마지막 전투로 나가면서 무슨 마음으로 이걸 떼어내주고 갔을지"
칠흑여제의 사랑은 칠흑여제가 마지막 전투에 나서기 전에 떼어낸 감정이다.
그녀가 최후에 흘린 눈물은 전에 미처 떼어내지 못한 감정의 흔적이고.
하르미아가 놀란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조카님."
"네?"
"이건, 못 주겠어."
"네에?! 왜요?"
하르미아는 손을 거두며 수정을 뒤로 집어 던졌다.
마치 필요 없는 쓰레기를 취급하는 것마냥.
"우리 언니의 감정 옆에 저딴 조잡한 걸 박을 수는 없겠어. 아무래도 내 심장에 있는 거랑 비슷한 수준으로 준비해줘야겠네."
"그 말은?"
"이틀 뒤에 찾아와, 조카님. 하르미아 시스템은 네 전용으로 새롭게 만들어줄게."
뭐라?
하르미아 시스템을 새로 만들겠다고?
자기 심장에 박혀 있는 시스템의 수준으로?
나를 위해서?
"그, 그런"
"사양하지 마. 생각해보니 조카에게 저런 쓰레기를 주려고 했다는 게 너무 화나서 그런 거니까. 응. 아, 그럼 이틀 뒤에 오렴!"
하르미아가 열의를 띤 표정으로 허공에서 웬 문서들을 만들어내며 작업에 돌입했다.
그녀는 설계도를 보며 손가락을 딱 튕겼고, 나와 유하는 순식간에 환상공간 밖으로 쫒겨났다.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우린데 정작 제대로 된 부탁은 하지도 못하고 쫒겨났다.
"잠깐, 너 저기에 옷 두고 오지 않았어?"
"아? 꺄아아아아아악!!!!!!!"
이, 이, 빌어먹을 이모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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