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나들이, 조금은 위험한 (1)
* * *
다행히도, 하르미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곧 문을 열고 우리를 다시 들여보냈다.
이미 교무실은 혼돈의 도가니에 휩싸인 후였지만.
"미워요! 미워!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요?!"
"아하하 미안, 늙어서 가끔 이래. 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거든."
"그래도 시현이가 비명 지르는 건 귀여웠는데."
"너 싫어! 저리 가!"
나는 망토 하나만으로 가슴을 가린 모습을 교무실의 모두에게 보이고 말았다.
내 비명소리에 무슨 일이냐며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유하가 눈치 있게 제 때 몸으로 가려줬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아휴, 정말. 칠칠치 못하다니까."
"내 탓이 아니잖아 우리 칠칠맞은 이모님 탓이지."
"얘도 참, 미안하다니까. 아무튼,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하르미아가 경청하겠다는 듯 빨간 고깔을 만들어 귀에 갖다 댔다.
솔직히 몽환적인 미녀의 모습으로 저런 행동을 하니까 상당히 귀여웠다.
내가 저런 사람을 언니도 아니고 이모라고 불러야하다니, 솔직히 좀 그랬다.
물론 그녀의 실제 나이는 미상인 만큼, 이모라고 부를 만한 나이가 맞을지도 몰랐다.
'나이 관련해서는 묻지 말자. 한 대 맞을 지도 모르겠어.'
나는 빨리 말해보라는 듯 귀에 댄 고깔을 흔들대는 그녀에게 말했다.
"음, 이번 주 일요일에 현장체험학습으로 아티팩트 박물관에 가려는데요, 혹시 동행교사로 참가해주실 수 있을까 싶어서요"
"아티팩트 박물관? 뭘 보러 가는 건데?"
"그냥, 이것저것 볼 것도 있고 해야하는 일도 있어서요."
하르미아는 으음, 하다가 고깔을 치웠다.
역시 한국 칠성을 인솔교사 따위로 쓰는 건 너무 선 넘은 부탁인가?
"으음 일요일이 이틀 뒤인가? 나는 늘 한가하니까 상관 없긴 한데 아, 혹시 언니의 눈물을 보러 가는 거니?"
"네? 그건"
"볼 계획이 없었더라도 이제 한 번은 봐야하지 않겠니. 그럼 나도 조카님이랑 오붓하게 데이트나 하러 가봐야겠네. 오랜만에 언니도 좀 보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유하야, 여기 어떻게 돼먹은 공간이길래 전화가 터지는 거야?"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듣고보니 궁금하잖아?"
유하는 손에서 마법진을 몇 번 굴려 돋보기를 만들어냈다.
그 돋보기를 여기저기에 대며 오오, 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참 볼만 했다.
나는 저런 마법이 있다는 게 여기가 통신구역이라는 사실보다 더 놀라웠지만.
하르미아는 곧 누군가랑 통화를 시작했다.
"아! 나야, 교장님. 나 이번주 일요일에 동행교사 하려고!"
예에? 갑자기요?
"1학년 정시현이라는 애랑 같이 갈 거거든! 알아서 해줘!"
자, 잠시만
뚝.
"자, 됐어. 이제 문제 없네."
"."
이게 바로 설정에서만 보던 권력 남용인가.
조금은 학교장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탁은 이게 다니?"
"아뇨 실은 유하도 부탁이 있어서 데려온 건데요."
"응? 저 초록 마법사?"
유하는 열심히 돋보기를 보다가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곧 쪼르르 달려와선 하르미아에게 부탁했다.
"여기 공간 구조가 진짜 신기하네요? 혹시 하르미아님도 환상인가요?"
"응? 아냐, 여기 있는 난 실체인걸."
"와아, 이런 게 가능하다니 혹시 하르미아님을 관찰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날 해부하겠다는 것만 아니면 괜찮아."
"너 싸인 받겠다고 온 거 아니었어?"
"여길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거든! 가만히 있어, 시현이는!"
곧 마법의 돋보기를 들어 하르미아를 관찰하기 시작한 유하.
나는 그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땅에 떨어진 수정 조각을 주웠다.
[하르미아 시스템 ver. GRAND ROOT(S)]
하르미아 메인 시스템의 구버전. 하르미아는 개인적으로 이걸 거근이라 부른다고 한다.
"."
하르미아는 설정상 연애 한 번 안 해본 처녀다.
그런데 자기 시스템에 저런 파렴치한 별명을 붙이다니
돋보기로 샅샅이 관찰 당하던 하르미아는 수정조각을 주워든 나를 보더니 말해왔다.
"그거 가져가려고? 어차피 쓸 데도 없는데 조카님 가질래? 네가 쓰진 말고 다른 애 줘. 고백할 때 쓰던가!"
"네? 딱히 가져갈 의도는 없었는데 그보다 고백이라뇨! 하르미아님은 연애 해봤어요?"
"으, 응? 갑자기? 그런 적은 없는데."
"우아, 어쩐지 마력이 정순하더라니!"
"이제 그만 보는 게 좋겠네, 변태 마법사님."
"아앗! 잠시만요!"
하르미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유하를 떨어트렸다.
날 벗기고 쫒아낸 복수다, 이 환상파수꾼아.
"그, 그럼 이제 더 볼 일은 없는 거지?"
"음 네. 없어요."
"휴우, 그럼 잘 가. 일요일에 봐."
예쁜 얼굴을 한껏 물들인 하르미아가 새침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교무실로 돌아왔다.
"아, 자주 놀러와야겠어. 하르미아님도 귀여우신 면이 있구나."
"너도 혼 좀 나야 하는데."
"내가? 농담도 참. 나만큼 모범생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에휴.
***
일요일 아침.
나와 수연이는 아카데미 정문에서 하르미아와 유하를 기다리며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그것은 옛날에 쓰여진 글이었는데, 바로 이첨의 원수??라는 글이었다.
이곳에 나온 글귀는 화수연의 스토리 중후반부에 나오는 심득으로서, 혹시 그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읽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대개, 물의 성질은 아래로 스며 내려가는 것이다. 물이 땅 밑에 있을 때는 비록 잠기어 고여 있으나, 땅 위에 나오게 되면 흐르고 움직이고 가득 차기도 해서, 그 이치에 따라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이 물을 안다는 것은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고, 그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둡다. 그러므로 성인은 땅 밑에 물이 있는 현상을 보고 이미 사괘를 만든 후에 비괘를 다음에 이었으니, 사람들에게 근원을 미루어 흐르는 데 까지를 보인 것이다."
"뭐라고? 사괘랑 비괘는 또 뭔데?"
수연이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다.
이건 게임 중후반부 때나 나오는 각성 이벤트에 나오는 글인지라, 그녀는 거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다행히도 흥미는 있는 것 같지만.
"지수사???, 수지비???. 육십사괘의 일부인데, 각각 땅 아래에 물이 있는 형상과 땅 위에 물이 있는 형상을 나타낸 거야."
"으응, 결국 흐름의 근원은 땅 밑에 고인 물에서 나온다는 거구나."
"그렇지. 하늘에서 시작하는 물줄기는 없으니까."
역시 이해가 빠르다니까.
수연이는 결코 멍청하지도, 재능이 없지도 않다.
하는 행동이 좀 제멋대로여서 그렇지.
우리는 계속 글을 읽어 내려갔다.
"세상 사람들은 과연 물의 근원을 아는가. 축축하게 젖는 것은 물의 남은 기운이다. 그 흐르는 것이 방울방울 끊어지지 않아 잇닿다가 장강에 통하고, 큰 바다에 달하여는 호호??하고 패연히 넓고 넓어 왈칵 닥치어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뭐라는 거야아!"
수연이가 돌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등허리에서 쌍검을 뽑아들더니,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역시 이 정도 심득은 지금 시점에서 무리였던 걸까?
"야, 그거 누가 찍어서 신고하면 범칙금 나오는 거 알지?"
"잠깐만! 뭔가 알 것 같아서 그래!"
그녀는 연거푸 무기를 붕붕 휘둘렀다.
헌터나 아카데미 학생은 평상시에도 무기를 패용하고 다닐 수 있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꺼내드는 것은 불법이다.
늘 재정이 쪼달리는 한국답게 범칙금도 어마어마하게 세고.
나는 슬슬 그녀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검술이 나타내는 형?을 보고 멍하니 손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진짜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흐름의 근원은 정적의 기저에서, 결집된 흐름이 패도적인 힘으로"
그녀의 검로가 흩어진다.
그러다가, 돌연 제각각이던 검로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하나가 되어 묵직하고도 강력한 일격으로 화했다.
그 검격은 분명한 집류??의 묘를 담고 있었다.
"와, 나, 재능 개사기네."
"와아, 이거! 고마워! 시현아!"
검을 갈무리한 수연이가 달려들어 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는 내게 볼 부비부비를 시전하며 나를 크게 당황시켰다.
"뭐, 뭐하는 거야!!"
"고마워, 고마워! 시현이 너무 좋아아!"
빨간 머리카락이 연신 흔들리며 내 눈을 찔렀다.
나는 고맙다고 달려드는 친구를 떼어낼 수 있을 만큼 모진 성격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잠자코 그녀를 받아주었다.
수연이는 비로소 하르미아와 유하가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내게서 떨어졌다.
나와 수연이가 붙어 있던 광경을 본 하르미아는 걱정스럽게 내게 물어왔다.
"조카님, 혹시 레즈비언이라던가"
"아니거든요!"
"그 쪽 검사는?"
"전 시현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야아!!"
나를 제외한 세 미녀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셋은 내가 토라진 체를 하고 혼자 가려고 하니까 그제서야 행동을 멈추고 날 붙잡았다.
"아아~ 시현아아~ 미안해~"
"흥."
"네가 너무 귀여운 탓이야. 받아들여."
"조용히 해"
하르미아는 쪼꼬맹이들 셋이 노는 게 귀여운지 빙그레 웃고 있다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자."
"어! 이건"
"하르미아 시스템이야. 약속했던 거."
그것은 영롱하고, 신비하게 빛나는 마름모 꼴의 예쁜 분홍빛 수정이었다.
일전에 봤던 수정보다 훨씬 알이 굵고 깨끗한 것이었다.
[하르미아 시스템 ver. ULTIMATE ROOT dear my love(S)]
사랑하는 언니와 친애하는 조카님을 위해.
지금 내 주머니에 있는 그랜드 루트 버전과 랭크는 같았지만, 이 게임은 아이템이 같은 등급이라도 성능은 천차만별이다.
더 정교하게 환산하면 그랜드 루트는 딱 S급, 얼티밋 루트는 잘은 모르지만 S++정도일까.
"내가 이걸 만들려고 권능을 얼마나 많이 쪼갰는지 몰라. 얼마나 쪼갰게?"
"어, 얼마나 쪼갰는데요?"
"내 권능을 전 세계의 바다에 비유하면 그래, 동해를 통째로 들어낸 수준이라고 할까."
그 정도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궁금증을 물어봤다.
"그럼 이모님의 시스템은요?"
"내 시스템? 으음 네 건 연산력이 크게 필요 없으니까 빼고 감각 쪽에 치중해서 내 메인시스템보단 조금 작아. 내 건 지중해 정도 될까. 자잘한 시스템까지 합치면 북극해 정도 크기는 될 거야."
정말 많이도 쪼갰다.
하긴, 그녀의 힘은 작은 하르미아 시스템의 연쇄에서 나오니까.
하나하나가 작은 컴퓨터 역할을 하는 만큼 굉장한 연산력을 보인다.
설정상 마흔다섯 자리 숫자의 곱셈을 0.12초만에 암산하는 게 가능할 정도다.
물론 연산력이 직관적인 지능과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뭐, 그래.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일단은 가면서 얘기하자. 어서 타!"
하르미아가 몰고 온 차를 가리켰다.
세상이 다섯 나라 빼고 대충 싹 다 망한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싼 외제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와! 이건 처음 보는 찬데 엄청 멋지네요?"
"수연아. 환상을 깨서 미안한데, 이거 환상으로 덮어 씌운 거야."
"으,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멋진 척을 하려 해봐도 꼭 초를 친단 말이지."
"에헤헤."
하르미아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사실 그녀의 차는 외제차만 아니다 뿐이지, 현재 생산되는 자동차 중에선 꽤 비싼 축에 속하는 자동차였다.
우리가 뒷좌석에 옹기종기 들어 앉자 그녀는 당당하게 조수석에 앉고는 환상으로 운전기사를 만들어 앉혔다.
역시 외제차 따위보단 저런 게 더 멋있는 것 같다.
"자, 그럼 조카님이랑 즐거운 소풍을 떠나볼까!"
"와아~"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그렇게 아티팩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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