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나들이, 조금은 위험한 (2)
* * *
나는 가면서 하르미아 시스템을 가슴에 박았다.
망토로 몸을 다 가리고 혼자서 했기 때문에 이전처럼 큰 일이 있지는 않았다.
[하르미아 시스템 ver. ULTIMATE ROOT dear my love, 최초 실행 중]
[동기화 중 38% 완료.]
[외부 디바이스 확인 됨, 연동 시작.]
[권능 '어둠'과 연동 성공, 권능 '영웅담'과 연동 실패(연결 어려움)]
[동기화 완료, 하르미아 시스템 시작.]
[Hello, world!]
하르미아 시스템은 하르미아가 고안한 '환상'의 새로운 사용법이다.
필요한 연산을 시스템에 일임하여 더욱 정교하고 현실적인 환상을 만들거나, 환상으로 감각을 보정해 전투능력의 향상을 가져오거나
게임 상에선 정말 사기적인 장비인지라 하르미아를 직접 살해해야만 극히 낮은 확률로 떨어지게 해 놓은 아이템이지만, 지금 나는 그것보다도 더 강한 장비를 현 시점에서 얻고야 말았다.
'앞으로 내 전투력은 이걸 얼마나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느냐에 따라 갈리겠어.'
나는 한순간에 넓어진 세상을 느끼며 그리 생각했다.
말 그대로 신안??을 가진 기분.
하르미아는 늘상 이런 감각의 홍수 속에서 사는걸까.
두뇌가 익숙하지 않은 정보처리량에 지끈거린다.
"어때? 세상이 확 트인 기분이지?"
"그건 그런데 이거 정보량이 장난 아닌데요"
"하르미아 시스템의 보정률을 조금 낮추면 될 거야. 서서히 익숙해지면서 올리면 되겠지."
나는 하르미아 시스템을 움직여 현재 보정률을 확인했다.
[현재 보정률: 21%]
겨우 2할 정도만 끌어냈는데도 이 정도인가.
만일 한번에 100%로 끌어올린다면 뇌가 바싹 구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보정률을 내려 5%로 맞췄다.
지끈대는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는 내게 유하가 물어왔다.
"그나저나 너 남는 시스템 있지 않았어? 그거 누구 줄 거야?"
"그건 아직 미정이야. 너는 심장의 균형이 깨진다고 거절했고, 수연이도 싫다 했거든. 전투는 오롯하게 자기자신이 하는 거라나."
그런 멋진 말을 했던 수연이는 옆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돈 줍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기분이 좋아보인다.
"그래? 그럼 고백할 때나 써야겠네."
"아니거든."
우리가 또 티격대자 하르미아가 우리에게 도착 소식을 알려왔다.
"그만 싸워, 이 쪼꼬맹이들아. 다 왔으니까 이제 내릴 준비 하자."
"네? 생각보다 가깝네요?"
"그렇지. 그래봤자 다 서울 안에 있는 건데."
곧 깔끔한 주차장에 차가 서자, 나는 수연이를 흔들어 깨우곤 차에서 내렸다.
***
아티팩트 박물관은 이름이 좋아 박물관이지, 실상은 갖가지 비싼 물건들이 오고 가는 거래장에 가까웠다.
칠흑여제의 눈물 등의 극소수 전시품을 제외한 모든 전시품은 돈만 있으면 현장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물품을 박물관 측에 팔아 넘길 수도 있다.
세금을 떼어먹기 위해 무구나 아티팩트의 개인적 거래를 금지한 한국의 특성상, 수수료를 받고 개인 거래를 주선해주는 곳이기도 했고.
아티팩트 박물관의 내부 구조는 유동 금액량이 끝내주는 장소답게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박물관보다는 차라리 초호화 백화점이 어울리는 설계.
드넓은 대리석 바닥, 금빛 유리로 장식된 에스컬레이터, 공중에 둥둥 뜬 보석 샹들리에
"사치가 천박한 농담이 되어버린 시대에 이런 화려한 건물이라니"
"우리나라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거든?"
나는 유하의 등을 툭 치고는 봉쇄된 재앙전시관의 입구를 바라봤다.
이곳은 한국을 위협했던 재앙의 흔적이나 그를 쓰러트린 무구 등이 전시된 곳으로, 유일하게 불매품만이 가득 전시된 전시관이었다.
망혼의 방랑자가 갇힌 관과 칠흑여제의 눈물도 저 곳에 전시되어 있는데, 원작대로 고스트룰즈가 손을 쓴 것인지 증축을 핑계로 입구가 막혀 있었다.
'어차피 억지를 써서 들어간다 해도 봉인이 깨지는 건 막을 수 없을 거야. 지금은 오히려 놔두는 게 나아.'
원작은 자유도가 높은 게임답게 봉쇄된 재앙전시관의 입구를 뚫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런 짓을 했다간 고스트룰즈가 가뜩이나 불안정해진 봉인을 급하게 깨트리면서 평소보다 더 강력한 망혼의 방랑자가 등장하고 만다.
회차 플레이를 하는 플레이어를 엿먹이기 위한 이벤트였다.
나는 미련 없이 재앙전시관에서 눈을 떼고는 하르미아를 바라봤다.
곤란한 일을 피하기 위해 환상으로 살짝 변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몽환적인 미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칠흑여제의 눈물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시무룩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내가 협박이라도 좀 하면 어떨까?"
"관둬요. 기껏 얼굴도 바꿔 놓으셨는데."
"하아 다음에 다시 와야 하는 걸까."
"그래도 이왕 온 거 여기저기 둘러보죠. 눈물은 다음에 보면 되잖아요."
"그렇기야 한데 미안, 조카님."
"아니에요. 이모님이 사과하실 건은 아니죠."
당초 예정했던 재앙전시관 관람을 못하게 된 우리는 대신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오래된 유물이 가득한 곳이니 주술에 도움이 되는 전시품이 있을 거란 나의 강력한 건의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게 그곳에 있기도 했고.
2층에 있는 유물전시관엔 사람이 꽤 적었다.
여기까지 와서 녹슨 쇳덩어리들을 볼 이유가 없는데다, 딱히 도움되는 무구도 찾기 힘들었으니까.
나는 일행들을 두고 전시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몇 분간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나는 마침내 원하던 장비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모양을 한 녹슨 쇠고리였다.
[황동혼구(B)]
나의 능력을 조심해라, 골든랜턴 빛!!
왠지 '아니다 이 악령아'를 외쳐야 할 것 같은 이 장비는 장송곡에 도움을 주는 장비이다.
스피릿을 담아 흔들면 옅은 황금빛과 함께 쇳소리를 내는 팔찌로, 장송곡을 부를 때 함께 흔들면 장송곡의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또한 내장된 기관 덕에 미리 부적문을 적어놓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눈을 빛내며 직원을 불렀다.
"이거 얼마에요?"
"1200만원입니다."
1200만원?
작중에선 200만원이었는데?
혹시 맨앞의 음성을 헛들은 건가 싶어 재차 물었지만, 대답은 똑같이 1200만원이었다.
"뭐 이리 비싸요?"
"신규 입고품이기도 하고, 골동품 애호가 분들이 많이 찾는 류의 전시품이라서 값이 좀 비쌉니다."
"으음"
하긴, 사령폭주 사건의 시점이 앞당겨졌으니 현 시점에선 황동혼구가 비싼 것도 이해가 간다.
결국 저건 안 팔려서 값이 200만원까지 내려가겠지만.
내가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짓고 우두커니 굳어 있자, 주변을 무심하게 둘러보던 하르미아가 이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네? 아, 이걸 사고 싶었는데 돈이 부족해서요."
"아, 그런 거였어? 금액이 얼마길래?"
"1200만원입니다."
하르미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주머니에서 검은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직원은 삽시간에 손을 놀려 카드를 받아들곤 PDA에 긁어버렸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지 그랬어. 내가 돈이 얼마나 많은데."
"어? 사, 사주신 거에요?"
"해준 것도 없는데 이런 거라도 해야지."
나는 순간 그녀의 뒤로 비치는 전등이 후광으로 변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머, 멋있어!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져가십시오."
직원이 장치를 두드려 방호유리를 내렸다.
오랜만에 밖의 공기를 마주한 황동혼구가 녹슨 빛으로 반짝였다.
"와, 와아 정말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별 것도 아닌데 뭐."
하르미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은근히 뿌듯해하는 표정은 감출 수 없었다.
동행교사도 해주고, 권능도 쪼개주고, 황동혼구도 사주고 그녀는 정말 아낌 없이 주는 나무인 게 분명했다.
이 모든 건 그녀의 착각에서 비롯한 호의였지만
'안 들키게 조심해야지. 응.'
나는 하르미아가 사실을 알게 되는 상상을 하며 괜한 몸서리를 쳤다.
"어? 그거 시현이 사주신 거에요? 저도 사줘요!"
"이제 돈 없어, 빨간 머리 검사님."
"우우~ 쪼잔하다~!"
"수연아! 하르미아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그게! 이리 와!"
"싫어! 또 볼 꼬집을 거잖아!"
마침 근처에 있던 수연이가 이 광경을 본 건지 자기도 사 달라고 뭐라 했지만, 곧 유하가 잡으러 달려들면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직원은 하르미아라는 말에 순간 흠칫했지만 프로답게 적당히 모르는 척 하기로 한 것 같았다.
좋은 처세술이다.
"자! 또 필요한 거 있니? 얼마든지 말만 해."
"아뇨 이제 없어요."
"사양하지 말고 말해봐. 이래봬도 칠성인데 돈이 문제겠니?"
이제 진짜 살 거 없는데
조금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극구 거절하며 일행을 데리고 유물전시관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는 수연이의 요청에 따라 도검전시관에 들러 전시품들을 봤다.
사람이 복작거리는 도검전시관엔 꽤 질이 좋은 것들이 많았지만, 딱히 송곳니 학살자보다 뛰어난 무기는 없었다.
사실 딱 하나 있었지만.
"와아! 이건 뭐에요?"
"전어도입니다."
"얼마에요?"
"8143억 9200만원입니다."
"머, 머라구요?"
"8143억 9200만원입니다."
"."
수연이는 충격받았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덜덜 떨었다.
현존하는 검 중 제일 강력한 검 중 하나였으니 당연한 값이었다.
현재 검성이 들고 다니는 사진참사검과 무려 3일을 울면서 싸웠다는 그 검이니까.
[전어도(S)]
뽑는자, 새 시대의 주인이 되리.
사실 게임 상의 성능으로 따지면 많이 애매했다.
용을 포함한 파충류 괴수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긴 하지만 용살검으로 쓸 거면 다른 좋은 검이 많고, 대인전에도 추가 효과가 붙어 있긴 하지만 이 상황에도 차라리 다른 무기를 쓰는 게 훨씬 잘 먹힌다.
돈으로 살 수 있어 초반에 확보할 수 있는 S급 무기인만큼 스펙을 애매하게 잡아 놓은 것이다.
'초반에는 이만한 게 또 없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무기가 넘어오기 시작하면 얘기는 달라지지.'
나는 폭력적인 자본주의의 충격으로 굳어 있는 수연이를 끌어내며 다른 곳으로 갔다.
우리 빨간 머리 검사님에게 어울리는 칼은 첫번째 재앙 때 구할 수 있으니 지금은 걱정할 것 없다.
"그만 굳어 있고 유하나 찾으러 가 잠깐."
"응? 왜 그래?"
"뭔가 움직이고 있어."
"움직여? 뭐가?"
"쉿!"
스피릿이 옅게 진동하며 무언가를 알아차린다.
나는 하르미아 시스템의 보정률을 10%로 올리며 감각을 집중했다.
쿠구구구
1층, 아까 봤던 재앙전시관 쪽.
그 쪽에 무언가를 부르는 까만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드디어 재앙의 해방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까아아아아아——
"시현아, 창 밖에 뭔가 있는데?"
"망혼??이야 목적 없이 증오만이 남은 귀신."
깔끔하게 반들대는 유리창 밖엔 주황빛 햇살 대신 검은 망혼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박물관 주위를 돌며 어둠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평화로이 전시품을 보고 있던 관광객들도 이변을 알아차린 듯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창 밖을 내다보며 술렁거렸다.
나는 수연이의 팔목을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디로 가는 거야? 유하는? 하르미아님은?!"
"그 둘은 분명히 알아차리고 어딘가로 가고 있을 거야! 우리도 빨리 가야 돼!"
박물관의 보호 결계가 켜진 건지 건물이 한 차례 울렸다.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견고한 결계지만, 저게 깨져나가는 순간 헌터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 민간인들은 모두 죽거나 미쳐버리리라.
'게임 상에선 결계의 체력 바가 다하기 전에 망혼의 방랑자를 제압하는 게 목표야!'
결계의 체력 바는 타이머의 역할을 하는 요소였다.
즉, 망혼의 방랑자 제압은 타임 어택이란 소리다.
아직은 망혼들의 공격이 시작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타임어택의 시작까지는 시간이 10분 정도 있지만, 나는 조급한 마음에 조금 더 빨리 발걸음을 내딛었다.
'플레이어블 둘에, 플레이어블급 빙의자 하나.'
원작보다 이른 시점이지만 결코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망혼의 방랑자는, 제압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