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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28화 (28/119)

〈 28화 〉 나들이, 조금은 위험한 (3)

* * *

굳게 닫힌 전시관의 입구.

하르미아는 근처에 있던 사람들을 물린 후 손쉽게 앞길을 막은 문을 박살냈다.

"."

그녀는 흐릿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굴려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찬 전시관을 훑어봤다.

웬 끔찍한 귀곡성과 검은 영혼 덩어리로 가득 찬 내부.

문을 부수기 무섭게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끈적한 영혼 덩어리를 다시 밀어 넣은 하르미아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챘다.

'이건 망혼이잖아. 어떤 미친 새끼가 관짝을 열기라도 한 건가?'

하르미아는 망혼의 방랑자 봉인에 한 손 거든 적이 있었기에,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도.

"사이비 새끼가 어떤 수를 써도 못 열거라고 했는데."

성인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신성한 관은, 성자 박하민의 표현을 빌리면 '따개 없는 통조림'이었다.

일단 닫으면 전용 따개 없이는 결코 열 수 없는 관.

힘으로 부수면 열리긴 하겠지만 그런 건 칠성 정도 되는 S급 헌터라야 가능한 짓이었다.

S급 헌터가 그딴 짓을 할 리가 없지만.

하르미아는 꾸덕한 혼이 가득 찬 재앙전시관 내부로 발을 내딛었다.

신고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알아서 했을 터.

자신은 들어가서 열린 관을 다시 닫기만 하면 된다.

봉인이 막 풀린 재앙은 아직 하르미아 자신보다 한참은 약할 테니.

그리 판단한 하르미아는 망혼을 밀어내며 전시관에 입장한 뒤 문을 환상으로 막았다.

증폭된 감각으로 꿰뚫어 본 관짝의 위치는 방의 한가운데.

그 주위엔 죽은 사람의 시체가 수십 구 정도 널려 있었지만, 그 사이에 놀랍게도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도 이미 망혼에 사로잡혀 미쳐버렸지만.

"가볍게 쪼꼬맹이들이랑 나들이나 할까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조금 화나네."

그리 읊조린 하르미아는 굽 낮은 구두로 땅을 가볍게 한 번 두들겼다.

분명히 가벼운 몸짓이었음에도 그 소리는 망혼의 바다를 뚫고 전시관 곳곳에 울릴만큼이나 컸다.

땅에 내딛은 그녀의 구두를 중심으로 공간의 파문이 퍼져나간다.

파문이 지난 공간은 서서히 한지에 먹이 젖듯 서서히 이질적인 색채로 물들어갔다.

곧 시끄럽게 울어대던 망혼의 소리도 잦아들고, 낭자한 핏물이 흘리던 피 냄새도 어쩐지 편안한 향으로 바뀌어 갈 때.

하르미아의 심상이 현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까아아아 까아아아아

어느새 옅게 변해버린 망혼들의 울음 소리가 멀게 들린다.

환상파수꾼은 일단 성스러운 십자가를 하나 상상했다.

꽈앙!

그러자 하늘에서 큰 황금빛 십자가가 떨어졌다.

망혼들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따스한 빛이 고통스럽다는 듯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그 소리는 이젠 라디오 잡음 정도의 소리로만 들렸다.

하르미아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가짜, 실체 따위 허구, 우주는 두뇌의 몽상."

환상의 주인은 계속 무언가를 상상했다.

하늘에서 수백의 성검이 내려와 꽂히고, 세상에 단 한 번 군림했던 하얀 날개의 천신이 이곳에서 재림한다.

드높던 박물관의 천장은 가루로 흩어져 사라지고, 대신 밝은 태양이 하늘 높이 떴다.

하르미아는 자신의 환상세계 속에서 산산히 부서지듯 흩어지는 검은 벽 사이를 걸었다.

그녀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망혼의 관이 있는 전시관 중앙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것들은?"

망혼의 관은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더 이상 봉인구의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따개 없는 통조림이 안에서 손쉽게 열리는 종이박스 정도로 변해버렸으니까.

하르미아는 옅은 당혹감을 느끼며 관짝을 닫았지만, 그것은 곧 허무하게 다시 열려버렸다.

이 관짝은 이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고장난 나무토막일 뿐이다.

"이런"

환상으로 관을 고치는 상상을 해서 다시 망혼의 방랑자를 가둘 수는 있다.

하지만 그녀의 환상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현실에 덧씌웠던 거짓이 흩어지면, 관짝도 결국 고장난 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건 죽이는 수 밖에 없겠는데."

환상파수꾼이 식은 땀을 흘렸다.

재앙은 S급 헌터가 셋 이상 필요하다고 판단된 괴수.

막 깨어난 지금은 그녀보다 약하다지만, 죽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망혼의 방랑자가 괜히 봉인을 당했겠는가.

­ 까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다시금 망혼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저기 흩어졌던 망혼이 한 곳으로 수렴한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천신이 결집을 막으려 해봤지만, 그녀 또한 결국 하르미아의 힘이 만든 허구일 뿐.

오히려 망혼의 소용돌이에 천신은 믹서기에 갈린 고깃덩이처럼 갈려나가고 말았다.

하르미아는 아미를 찌푸리며 땅에 박힌 수백의 성검들을 허공에 뽑아 올렸다.

더 이상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은 위험하다.

환상세계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큰 힘을 소모하니까.

단기전에서 장기전으로 뒤바뀐 만큼, 환상세계 유지에 힘을 집중해야한다.

"다른 칠성 놈들이 올 때면 이미 여긴 잿더미가 되어 있을 텐데."

해볼 때까진 해보는 수 밖에 없나.

환상파수꾼이 마침내 하나의 고정된 형태를 이루는 망혼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

유하는 건물 광장에서 다른 헌터들과 함께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우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있던 그녀를 빼낸 우리는 함께 재앙전시관 앞으로 향했다.

"저 검은 것들의 정체가 망혼이라고?"

"스피릿으로 느껴봤거든. 저것들은 분명한 망혼이야."

"세상에, 그렇다면 지금 재앙전시관에선"

"하르미아님이 밖으로 나오려는 재앙을 상대하고 계시겠지."

재앙전시관의 입구엔 환상의 벽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벽 너머에서 큰 울림이 연신 일어나는 것을 보아하니, 한창 싸우고 있는 도중인 것 같았다.

망혼의 방랑자가 만들어내는 증오를 느낀 건지 수연이가 팔을 쓸어대며 물었다.

"도, 도와줘야 되는 거 아냐? 재앙을 어떻게 단신으로 막아!"

"아냐, 우리는 저런 싸움에 도움이 될 수 없어. 다른 칠성이 올 때까지 견디는 수 밖엔"

"아냐, 도와야 해."

나는 유하의 말을 끊고 망토를 등에 걸쳤다.

셀레스티는 신난다는 듯이 멋대로 몸을 펄럭였다.

유하는 내 태도에 드물게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우리가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다른 헌터들도 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 어줍잖은 영웅 놀이 할 때가 아냐!!"

실제로 박물관에 있는 다른 헌터들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시민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몇 안 되는 A급 헌터도 이 안에 들어가려다 대충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지 깨닫고 몸을 돌려 시민들에게 향했다.

자신이 낄 싸움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허리춤에 매인 천린의 위치를 고치며 대꾸했다.

"내 말은, 지금 들어가서 돕겠다는 뜻이 아냐. 만에 하나라도 다른 칠성이 오기 전에 망혼의 방랑자가 튀어나온다면 이곳에 서서 최대한 틀어막아 볼 생각이야."

"만일 그랬다간 몇 초도 못 버티고 죽을 게 뻔하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니?"

"유하야."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곤 사뭇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그 몇 초가 중요한 거야. 몇 초가 아니라 1초, 설사 그보다 적은 시간이라 해도 재앙을 늦출 수만 있다면 그걸로 의미가 있을 테니까."

"."

나는 그리 말하곤 다시 앞을 봤다.

그리고는 지금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하르미아는 망혼의 방랑자를 막지 못할 것이다.

결국 둘을 가두고 있던 환상세계가 깨지며 만신창이가 된 망혼의 방랑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하르미아는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기 위해 전력을 다 해 재앙을 구속한다.

그 잠깐의 순간, 나는 망혼의 방랑자의 핵을 노려 막타를 치면 된다.

망혼의 방랑자가 구속을 벗어나거나 박물관의 결계가 깨지면 그걸로 끝.

그렇게 되는 순간 서울은 적어도 반파에 준하는 피해를 입을 것이다.

수연이는 여기 서 있겠다는 내 말을 듣더니 감명 받은 표정으로 내 곁에 섰다.

"나도 여기 있을래! 하나보단 둘이잖아?"

"고마워."

나는 유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끄응, 하더니 수연이를 따라 내 곁에 섰다.

"정말, 혼자 멋있는 척은 다 하고. 이러면 내가 나쁜 년 같잖아."

"그럴 리가. 네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뭐."

"어휴, 정말."

'휴우'

설마하니 혼자 남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건만, 둘은 나를 따라 이곳에 남아주었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죽을 우려는 없어. 성공하면 그만이야. 그래, 셋이나 되는데 실패할 리가'

게임에서는 혼자서도 해내는 일이다.

셋이서 못 해낼 리가 없잖은가.

그렇게 몇 분을 기다리자, 곧 환상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르미아가 밀리고 있다는 뜻이다.

"설마 진짜로 뚫리는 건 아니겠지?"

"그런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마, 수연아."

"."

수십 초 이내로 벽이 깨질 것이다.

등에 걸린 망토를 오른손에 꽉 쥐고 몸을 감싸듯 앞으로 둘렀다.

언제라도 장송곡을 부를 수 있게 목을 가다듬고 왼손을 살짝 흔들어 몸을 데웠다.

하르미아 시스템의 보정률을 끌어올리고 다리를 긴장시킨다.

이윽고, 재앙전시관이 크게 흔들리더니 환상의 벽이 세게 깨져나갔다.

나는 망토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크게 펴서 망토를 휘날리며 크게 외쳤다.

"너는, 전설의 목격자가 될 것이다!!!!"

­ 좋아요! 좋아!!

망토를 휘날리는 영웅강림 포즈와 함께 내지른 멋있는 대사.

퍼베이시브 에픽은 미래에 있을 승리의 영광을 담보로 크나큰 힘을 빌려온다.

그 힘이란, 바로 가능성의 증폭.

어떤 비극적인 전투라도 실낱같은 승리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권능이 바로 '영웅담'의 권능이었다.

영광의 빛이 내 몸을 감싸는 것과 함께, 터져나온 증오의 바다가 우리를 덮쳤다.

수연이와 유하는 놀라선 전투자세를 잡았다.

"지, 진짜로!"

"준비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나는 저?의 부적을 발동시켜 일행을 파도로부터 지키며 황동혼구를 흔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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