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나들이, 조금은 위험한 (4)
* * *
거친 혼의 파도가 일행을 덮친다.
저?와 황동혼구가 검은 망혼들을 훌륭하게 빗겨낸다.
아무리 많은 망혼들이라지만, 결국 망혼 하나하나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증오만이 남은 껍데기.
애벌레 수천이 모여봐야 사자 하나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기껏해야 격 낮은 혼의 모임인 검은 파도 따위가 내 주술을 뚫을 수는 없었다.
물론, 물량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고, 혼의 격과는 별개로 물리력은 굉장했기에 땅을 디디고 선 발 끝은 자꾸만 뒤로 밀렸다.
"윽!"
"카에다! 루스! 바라이아!!"
낭랑한 시동언과 함께 발출된 빛의 역장이 나를 덮는다.
덕분에 나는 거기서 더 밀려나지 않고 자리에서서 검은 파도를 막을 수 있었다.
까아아아아아──!!!
어느샌가, 망혼의 흐름이 뚝 끊겼다.
당황할 새도 없이 검은 파도가 사라지자마자 재앙전시관 안으로 내달렸다.
망혼의 흐름이 갑작스레 끊겼다는 건 하르미아가 최후의 힘을 짜내 망혼의 방랑자를 구속했다는 뜻이므로.
전시관으로 들어가자 다 부서져가는 환상세계가 날 맞이했다.
아무리 그녀가 신으로 군림하는 환상세계라지만, 더 이상 하르미아만의 공간이라도 하기에도 힘든 게 공간 자체가 매우 작았고 여기저기에 당장이라도 깨질 듯한 금이 가득했다.
더욱이 뻣뻣하게 굳은 망혼들이 여전히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기도 했고.
하르미아는 온 몸에 깊은 상처를 안고 몸에 사슬을 감고 있었다.
그 사슬은 전시관 중앙에서 마구 몸을 흔드는 망혼의 방랑자를 묶고 견고하게 버티며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앞으로 달려나가며 하르미아를 불렀다.
"하르미아님!!!"
"너, 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 부름에 하르미아는 경악한 표정이 되어 소리쳤다.
있는 힘 없는 힘 다해서 재앙을 구속하고 대피할 시간을 끌고 있는데 난데 없이 이곳에 내가 나타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 달려나가며 마주 소리쳐 대답했다.
"저희가 마무리 지을게요! 어차피 다 대피하기 전에 밖의 결계가 먼저 깨질 거에요!!"
"그래도!"
"믿어주세요!!!"
내 말을 들은 하르미아가 고통스럽다는듯 이를 꽉 물며 사슬을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하르미아의 환상세계가 깨지며 새어나간 망혼들은 이미 망혼의 방랑자의 컨트롤을 벗어났다.
놈들이 박물관의 결계에 달려들어 안팎으로 결계를 공격해 부수기 전에, 아무 것도 못하고 묶여 있는 망혼의 방랑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해 소멸시켜야 한다.
만일 결계가 깨지면 망혼을 수급한 망혼의 방랑자가 완전한 힘을 되찾게 되고, 그 순간 서울은 반파를 면치 못할 것이다.
카아아아아아아──!!!
위태롭게 일렁이는 흑염으로 이루어진 망혼의 방랑자가 더 조여오는 쇠사슬을 느꼈는지 연신 몸을 비틀며 소리를 지른다.
놈은 지금 하르미아에게 크나큰 치명상을 입고 묶여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아무리 약한 우리라도 핵을 노리면 소멸시킬 수 있다.
그러던 와중, 놈의 왼팔을 묶고 있던 사슬 하나가 끊어지고 말았다.
수백의 사슬 중에서 단 하나였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망혼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다.
'저 사슬들은 점차 하나하나 풀려가며 우리를 압박할 거야.'
놈이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된 왼팔을 움직여 허공에 뻣뻣하게 굳은 망혼을 움직인다.
내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걸 알았는지 내게 수많은 망혼들을 집결시켰지만, 부적술과 황동혼구를 이용해 저항을 무산시키고 계속 달려나갔다.
망혼의 방랑자는 망혼의 격이 문제인 걸 알았는지 다른 방법을 내놓았다.
곧 공간에 가득 들어찬 망혼이 곳곳에 진하게 뭉치며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혼을 마구잡이로 뭉쳐서 내 주술에 저항할 수 있는 격을 가진 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망혼이 뭉쳐 나타난 덩어리는 뭐라 특정할 수 없는 이형의 거대한 점액이었다.
굳이 특정하자면 녹아내려 구형을 이루지 못한 돌연변이 슬라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수십 정도 나타나 내 앞길을 막은 점액들이 내게 쇄도해온다.
점액의 형태라곤 하지만, 망혼이 뭉쳐 만들어진 존재인 만큼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곧 놈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지만, 나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 또한 혼자가 아니었기에.
"카에다! 루스! 임팔리아!!!"
등 뒤에서 들려온 시동언과 함께 빛의 창이 허공을 찢으며 달려온다.
왼편에서 나를 덮치려던 점액은 백열하는 빛줄기에 맞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시현아아아아아!!!!"
죽음의 무도가 따각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쌍검의 투사가 내 곁으로 물길을 차며 달려왔다.
그녀는 곧 내 오른쪽에서 덮쳐오던 까만 점액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비폭징류????, 천류불식川??.
한 번의 멈춤 없이 계속 흐르는 하천.
그녀가 달려오던 기세를 유지하며 점액을 베어갈랐다.
점액은 검격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뒤이어 몰아닥친 급류에 휩쓸려 몸이 마구 흩어졌다.
애초에 융합 같은 성질이 없는 망혼을 어거지로 뭉친 것인지라 결속력이 약해 비교적 작은 물리적 충격에도 쉽게 망혼으로 분열되는 특성 때문이었다.
슬쩍 돌아본 수연이는 꽤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돌아본다는 걸 느낀 건지 내게 살짝 윙크를 보내왔다.
장난을 받아줄 여유는 되지 않는지라 무시하고 정면의 점액을 바라봤다.
그리고 부적을 두 개 적어내려 송곳니 학살자에 붙였다.
해?, 산?.
흩어버림의 성질을 갖게 된 송곳니 학살자를 휘둘러 코앞까지 다가온 점액을 베어갈랐다.
검이 닿자마자 점액은 액체가 기체로 기화하듯이 흩어졌고, 몇 번의 칼질이 더해지자 앞을 가로막던 기분 나쁜 점액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점액은 수십이나 남아 있었다.
망혼의 방랑자의 힘이 극도로 억제된 지금이라면 저 모든 것들을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시간에 늦고 만다.
조급해진 마음을 안고 점액들을 치우며 달려나갔지만 역시 중과부적.
우리의 발걸음은 크게 굼떠졌다.
유하는 연거푸 빛의 마법을 쏘아내다가 내게 외쳤다.
"시현아!! 장송곡 불러!!!"
"알겠어, 귀 막아!!"
장송곡, 황천을 걸어갈 그대를 위해.
장송곡 치고는 꽤나 파멸적인 이 주술은 귀신을 비롯한 사령 뿐만 아니라 생령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때문에 아군이 있는 상황에선 되도록 쓰지 않고 있었지만, 나는 군말 없이 유하의 말에 따랐다.
유하가 저런 말을 하는데는 다 의미가 있을 테니.
나는 왼손의 황동혼구를 규칙적으로 흔들며 목을 가다듬었다.
찌그덩 찌그덩
불길하게 울리는 쇳소리.
스피릿의 파장에 따라 흔들리는 성대에서 낮고 두려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 ──, ────."
쇳소리에 의미 없는 목소리가 있을 뿐인 노래.
하지만 음악적으로 잘 짜였으면서, 예술적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음률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까아아아아아아──!!
주변의 덩어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장송곡에 화음을 넣는다.
수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고, 유하는 소음을 버티며 이를 악 물고 마법진을 양 손에 하나씩 굴려냈다.
"시에나! 라비나! 악실시오르!!"
장송곡 사이로 시동언이 들려온다.
그녀가 시동언으로 마법진을 활성화하는 순간, 정십이면체의 두 마법진이 뒤틀렸다.
그러자, 나와 수연이의 발 아래에 형성되었던 마법진이 뒤집히더니 등 뒤로 옮겨왔다.
"계속 불러! 그리고 균형 잡아!!"
파아아아아──
그녀의 외침과 함께 마법진이 활성화되며 등을 떠밀었다.
발동된 마법은 레비테이션.
원래라면 격한 가속력을 가해 공중으로 급상승하는 꽤 난이도 있는 마법이지만, 그녀는 레비테이션을 동시에 두 개나 발동한 것도 모자라 마법진을 비틀어 방향을 바꾸기까지 했다.
레비테이션의 급격한 가속을 받아 전방으로 포탄처럼 사출된 나와 수연이는 날아가면서 침착하게 균형을 잡으며 제각각 할 일을 했다.
나는 계속 장송곡을 불러 앞길을 막는 점액들을 쫒아버렸고, 수연이는 장송곡에 저항하고 앞을 막는 점액을 비폭징류로 치워버렸다.
망혼의 방랑자는 우리가 빠른 속력으로 가까워진다는 걸 깨달았는지 무리하게 몸을 흔들어 기어코 사슬 하나를 더 끊어내고 말았다.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던 점액들이 재앙의 인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허공을 나는 우리를 쫒는다.
등을 쫒아오는 점액들은 어느새 하나의 검은 손아귀로 화해 있었다.
뒤틀린 레비테이션으로 발사된 둘의 속력은 이미 공기저항으로 꽤 줄어든데다, 위치는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포물선 운동을 한 탓에 땅에 가까워진 상태.
아마 착지하는 순간, 저 손아귀는 우릴 덮칠 것이다.
'곤란한데! 천린을'
"시현아!!!"
땅이 가까워지자, 수연이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벽류를 이용해 운동관성을 유지하며 착지하곤, 그대로 물길을 제 팔로 옮겼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화수연 선수, 전력 투구!!!"
벽류?? 탁린청류???.
꼭 쥔 손을 통해 물길을 내게로 옮겨 자신의 운동량을 온전히 전달했다.
그렇게, 내 손을 쥐고 포환던지기를 하듯이 한바퀴 빙글 돌곤 나를 망혼의 방랑자 쪽으로 던져버렸다.
"으으아아아아아아!!"
"여긴 내가 막아볼게!!"
갑작스런 회전과 투척에 당황해 장송곡을 부르는 것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날아가며 본 수연이는 어느새 검은 손아귀 쪽으로 뒤돌아선 해검??을 준비하고 있었다.
탁린청류의 물길에 휩쓸려 날아가다보니, 어느새 분홍색 사슬을 칭칭 감은 망혼의 방랑자가 10m 안으로 들어왔다.
휘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놈의 몸이 보인다.
그 순간, 나는 하르미아 시스템의 보정률을 34%까지 끌어올렸다.
깊고 어두운 증오로 타오르는 흑염, 흑염을 감싸고 위태로이 흔들리는 사슬, 사슬을 좀먹는 망혼
송곳니 학살자가 수납된 천린을 들고, 증폭된 감각으로 망혼의 방랑자의 빈틈을 탐색했다.
핵이 있는 곳은 가슴 언저리.
사슬도 함께 베이긴 하겠지만, 한 번에 끝을 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
노리는 건 일격필살.
사슬은 사형수의 몸에 걸린 구속구요, 내 칼은 목으로 떨어지는 단두대의 칼날이니.
날아오면서 적은 수많은 부적이 천린을 감싸고 타오른다.
유령 저택에서보다 많은 수의 부적들이다.
하르미아 시스템이 칼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왼손과 함께 검집을 질끈 감은 망토가 손의 흔들림을 잡아준다.
그렇게 검을 뽑는 찰나, 망혼의 방랑자가 세번째 사슬을 풀어냈다.
놈은 이제 겨우 왼팔의 손목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놈의 핵에 걸린 검로를 뒤트는 데는 충분했다.
키이이이잉──!
검이 미친듯이 내달리며 날카롭고 깔끔한 쇳소리를 낸다.
그렇게 뽑혀나간 송곳니 학살자는 열 남짓한 사슬과 함께 재앙의 핵을 깔끔하게 베어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망혼의 방랑자가 어느 정도 돌아온 신체 조작 능력으로 제 왼팔 전체를 터트려 몸을 살짝 뒤로 물리고 말았으니까.
망혼의 방랑자가 이쪽을 보며 고개를 뒤틀었다.
얼굴이 있었다면, 아마 날 비웃는 표정을 하고 있겠지.
결국 재앙을 구속하던 사슬만 끊어서 힘을 돌려준 꼴이니.
놈이 하늘로 손을 뻗는다.
그러자, 박물관의 천장이 부서지며 망혼들이 들이닥친다.
사슬이 끊어지면서 밖에 있던 망혼들이 끝내 결계를 부수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망혼의 방랑자가 무너지는 천장 사이로 들이닥치는 밤을 보며 뭐라 표현하기 힘든 웃음소리를 내었다.
마치 결투에서 승리한 콜로세움의 검투사처럼.
하지만, 풍신의 바람은 두 번 분다.
키이이이잉──
천린의 사용 횟수는 하루 두 번.
나 같이 미약한 존재가 두 번이나 그런 공격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겠지.
놈이 뒤늦게 눈치 채고 이 쪽으로 망혼의 폭풍을 날린다.
원래라면 칼이 닿기 전에 내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안아줄게요.
우리 영웅님께서 재앙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망혼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한 칠흑이 내 몸을 감싸안고, 사그라들었던 영광의 빛이 다시금 일어나 폭풍을 찢는다.
결국, 주술을 두른 태도가 재앙의 핵에 닿았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아───!!!
핵이 부서지는 감각이 손 끝에 선연하다.
망혼의 방랑자는 핵이 부서지자마자 무상하게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고, 한순간에 구심점을 잃은 망혼들은 혼란스레 날뛰다가 저희들끼리 뒤얽히며 싸우거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망혼의 방랑자가 죽었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허무하게.
"아"
나는 그 자리에서 칼을 던지듯 놓아버린 뒤 오른쪽 어깨를 쥐고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르미아 시스템의 보정률을 0%로 낮추고, 부적에서 스피릿을 거둔다.
두 번의 발도를 해낸 오른팔은 터져나온 피로 옷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완전히 빗겨흘리지 못한 망혼의 폭풍이 제대로 지나간 하반신 쪽도 걸레짝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격통의 신호를 보내오는 몸과 달리 마음은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가득 찼다.
결국 재앙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 않은가.
사실 이것도 내 불찰로 앞당긴 사건이긴 했지만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제멋대로 날뛰는 망혼들이 시끄럽다.
몇몇은 내게 달려들었지만, 몸에 쥐톨만큼 남은 영웅담의 권능이 이를 몰아낸다.
과연, 잡졸한테 죽는 영웅은 없다는 걸까.
은근히 사후처리도 확실한 것 같다는 쓸데 없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등으로 이동한 망토가 자랑스럽게 펄럭이며 내 목을 간지럽혔다.
사실, 퍼베이시브 에픽이 없었으면 해내지 못했을 전투이다.
결국 망혼의 방랑자에게 도달한 건 셋이 아니라 나 혼자였으므로.
영웅담의 권능은 망혼의 폭풍에서 나를 지키며 승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난 그 가능성을 잡았을 뿐이니까.
등에서 펄럭이는 빨간 망토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와아아아!!!! 이겼어요!!!!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군요!!!! 역시 우리 영웅님이야!!!!
"고마워, 셀레스티."
뭘요!!! 하긴, 제가 잘나긴 했죠!!! 하지만 전 영웅님의 파트너로서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랍니다!!! 그보다 이 전투는 정말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 같아요!!!! 알고보니 한국 칠성이었던 혈연과 친한 친구들의 희생으로 일구어낸 멋진 승리!!!! 이건, 이건 서사시감이에요!!!! 제목은 뭘로 할까요?? '빌어먹을 현생' 어때요? '영웅님 아카데미 가신다'는?? 어느 쪽이든 영웅님의 의견을 존중할게요!!!!
""
취소다, 이 빌어먹을 빨간 보자기야.
그보다 팔이랑 다리는 괜찮으세요? 인간은 육신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했는데!
"그치, 악마들이랑 다르게."
저, 저 악마 아니라니까요!!! 어떤 악마가 이렇게 영웅을 걱정해주고 그래요?? 네?!!
"네가 악마라 한 적은 없는데?"
아, 아무튼 악마 아니에요! 전 신탁으로 점지된 영웅의 파트너!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 머리 아파"
저랑 단 둘이 있을 때는 얘기 많이 해준다면서요!!! 안 그래도 밖에선 말 못하게 해서 얼마나 답답한데!!
"밤에 많이 하잖아 그리고 지금은 내가 정신 없고 힘들어 그리고 누가 오는 것 같은데."
저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축 늘어진 수연이를 어깨에 들쳐메고 달려오는 초록머리 마법사다.
시끄럽게 떠들던 셀레스티도 유하가 온다는 걸 느꼈는지 알아서 말을 멈췄다.
"시현아!!"
"안녕."
"안녕은 무슨!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이 피는 뭐고!"
"망혼의 방랑자는 죽였어. 몸은 그냥 베인 거야. 치료 받으면 낫겠지."
유하가 그 말에 한숨을 푹 쉬더니 빈 손으로 나를 부축했다.
내가 작은 어깨에 의지해 일어서자 유하가 목을 움직여 내 이마에 머리를 콩 하고 부딪혔다.
볼에 스치는 녹색 머리카락이 싱그럽다.
"?"
"너도 그렇고 수연이도 그렇고 왜 다들 말썽인지. 휴우"
유하가 어깨 위에 늘어진 수연이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반응이 없자, 이번엔 주먹을 쥐고 꿀밤을 먹였다.
딱!
"아야!!!"
"넌 이런 상황에서 장난질을 하고 싶니?"
"으, 이상하다 시현이가 하면 다들 깜빡 넘어오던데"
"이런 장난은 제발 나중에 해"
나는 둘을 보며 실없이 웃다가 앞으로 걸어갔다.
유하는 어깨에서 바동대는 수연이를 떨어트리고 어딘가로 가려는 나를 부축했다.
나보다도 더 몸이 많이 망가진 하르미아는 한 유리관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핏물 섞인 기침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서자, 그녀는 입가의 핏물을 소매로 슥 닦고선 웃음지었다.
"괜찮니?"
"네 덕분에요."
"덕분은 무슨, 내가 뭘 했다고. 결국 죽인 건 너잖아?"
"하르미아님은 어때요?"
"난 멀쩡해. 이런 게 사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 정도면 엄청 양호한 편이지."
하르미아가 몸 곳곳에 깊이 박힌 상처들을 안고 태연하게 일어섰다.
깜짝 놀란 유하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하르미아는 손길을 거절하고 혼자서 오롯하게 섰다.
실로 한국 칠성의 정점다운 자태였다.
"그보다, 조카님. 이것 좀 볼래?"
하르미아가 등을 기대고 있던 유리관을 가리켰다.
그 속에서, 맑고 맑은 물방울 모양의 보석 하나가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딴 건 다 부서졌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지켰어. 조카님이랑 같이 봐야했으니까."
"아 이건"
"우리 언니의 눈물이야. 이걸 지키겠다고 감싸안았다가 좀 다쳤지만."
칠흑여제의 눈물이 부서진 전시관 속에서 반짝였다.
부서진 천장과 마구 흔들리는 망혼들 사이에서 들어오는 햇빛도, 벽에서 떨어져 시멘트 사이을 구르는 비상용 손전등도.
유리관에 갇힌 한낱 보석보다 밝게 빛나지는 못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했네."
하르미아가 내 손을 잡고 유리관을 쓰다듬었다.
마치 제명에 못 살고 일찍 가버린 가족의 위패라도 되는 것처럼
그 손길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자매에 대한 슬픔과 애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오랜만이야, 언니."
우리들의 나들이는, 정말 위험하고도 아름다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