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반쯤 악마인 자, 악마에게 힘을 빌리는 자, 악마숭배자.
* * *
반파된 박물관 안에서 한참이나 칠흑여제의 눈물을 관람하던 우리는 뻥 뚫린 천장 위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어어 하는 사이에 그나마 멀쩡했던 대리석 바닥을 완전히 박살내며 착지한 소녀는 주변을 두리번대다 우리를 발견하고 서둘러 외쳤다.
"순수와 사랑의 화신! 세상의 모든 악을 모두 한줌의 재로 돌려보내는 정화의 마법소녀!! 모든 인류의 마지막 희망!!! 퓨어하트 주하연, 등장!!!! 마법소녀가 왔으니 민간인은 빨리 대피하라구!!"
"?"
뭐야, 이 난데 없는 여자는.
유리관을 어루만지던 하르미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난데 없는 마법소녀를 마주했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인사했다.
"어, 하연이구나? 지원으로 왔니? 참 빨리도 오네."
"환상파수꾼?"
"오랜만이야. 넌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든지, 원."
"무슨 속셈이냐, 이 악마야!! 드디어 속셈을 드러냈구나!"
퓨어하트, 주하연이 다리에 매달려 있던 기관단총 두 정을 뽑아 하르미아에게 겨눴다.
귀여운 마법소녀의 복장으로 기관단총 아킴보라니, 세상 귀한 광경이다.
"악마라니, 말이 너무 심하네. 진짜 순혈 악마한테 힘을 빌리는 주제에"
"닥쳐, 마계 창년의 자식아! 무슨 속셈이냐고 묻잖아!"
"망혼의 방랑자가 풀려났길래 큰일이 생기기 전에 죽여버렸어. 내가 직접 죽인 건 아니지만. 왜?"
주하연은 '러브 앤 피스'를 고쳐잡더니 계속 추궁했다.
"거짓말 하지 마, 이 악마년아! 네가 풀어놓고 시치미 떼는 거겠지. 너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
"글쎄, 내가 안 나섰으면 서울이 망했을 거란 사실은 알지. 그보다 그것 좀 내려주지 않을래? 괜한데 힘쓰지 말고 여기 떠 있는 검은 안개나 좀 치워주면 안 될까?"
"너야 말로 거기 잡은 인질들이나 풀어줘! 무고한 시민들 뒤에 숨다니!"
인질? 누가 인질인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나와 친구들에게 주하연이 소리쳤다.
"시민분!! 이쪽으로 오세요!! 천천히!!"
"저희가요?"
"네! 저 악마는 칠성이 아니라 아주 악독한"
"그쪽으로요?"
"네!! 어서요!!"
"왜요?"
"왜, 왜라니요!"
내가 어이 없다는 듯이 말하자, 주하연이 역으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수연이는 아예 하르미아의 뒤로 숨었고, 유하는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저기 하르미아님."
"왜 그래, 초록 마법사님?"
"혹시 퓨어하트랑 원수졌어요?"
"으음 원수, 라기보다는 쟤가 날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쪽에 가깝지. 한 때는 정말 친했는데"
"수, 수작 부리지 말고 나와!!"
주하연이 하르미아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아무래도 하르미아를 정말 악독한 악마로 취급하고 있는듯 했다.
하르미아는 실제로 악마의 혼혈이지만 진짜 악마와는 백만광년 정도의 거리가 있다.
권능만 하나 물려 받았다 뿐이지, 그녀는 마음도 인간이고, 마력도 인간이고, 신체구조도 인간이다.
뭐, 굳이 따지자면 그녀의 매력도 서큐버스퀸에게서 타고난 것이겠지만.
하르미아와 상당히 친했던 주하연은 어느 날 그녀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날로 절교를 선언한 뒤 하르미아를 적대하고 있다.
그녀가 대악마의 딸이란 이유로 지구에 내려온 로엠의 스파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둠을 등진 악마에게서 힘을 받는 마법소녀란 족속이 할 생각은 아니다만.
그렇게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는 와중, 공중에서 한 남자가 망혼들을 가르고 나타났다.
온 몸에 따스한 빛을 두른 그는 둘의 대치를 보더니 인자하게 웃으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또 이러시는군요. 참, 하연님께서도 곤란하십니다."
"뭐, 뭐야, 비켜!!"
"하르미아님은 악마가 아니라고 몇번이나 확신을 드렸건만 이러십니까."
성자, 박하민이 주하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내려다보자 주하연은 어쩔 수 없다는듯 미간을 찌푸리며 기관단총을 갈무리했다.
그제서야 박하민이 이쪽을 보며 엷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르미아님."
"성 떼고 부르면 죽여버린다고 했는데, 사이비."
"절 죽이기엔 상태가 많이 안 좋아보이는데요."
"우리 하연이는 몰라도 넌 될 것 같은데?"
"하하, 섬뜩한 소리 마십쇼. 아직 구할 사람들이 많단 말입니다."
박하민은 사이비라는 모욕을 듣고도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 손으로 거대한 신성력이 모이는가 싶더니, 곧 그 빛은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안고 몸을 치유했다.
신체 조직이 재창조되며 상처가 깔끔하게 다시 수복된다.
역시 한국 칠성이자 아가페 길드장다운 회복력이다.
그가 악마숭배자만 아니었어도 참 좋았을텐데
"신의 자비입니다!"
"성경도 못 외는게 무슨 성직자 코스프레를"
"으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선 너무 타박하지는 마십쇼"
인류를 배신할 남자, 박하민이 빛을 두르고 멋쩍게 웃었다.
하르미아는 툴툴대면서도 깔끔히 고쳐진 몸을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 상태로 돌아온 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르미아의 등 뒤에 숨었던 수연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성자를 봤다.
그녀는 곧 배시시 웃으며 순진하게 내뱉었다.
"와아, 성자다!! 왠지 구린 구석이 있을 것만 같아요!!"
"그렇지? 아무리 이런 시대라곤 하지만 저런 게 성자라고 불리다니"
"으, 정말 너무한 아가씨로군요. 하하!"
화수연, 그녀의 직감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사람 좋게 웃는 박하민의 뒤에 불퉁하게 서 있던 주하연이 고개를 홱 돌리곤 땅을 차고 사라졌다.
그녀의 신형은 가벼운 발돋움만으로 뻥 뚫린 하늘로 단숨에 뻗어나갔다.
주하연이 서 있던 자리엔 깊게 찍힌 발자국만이 남았다.
"아, 이런. 멋대로 가버렸군요. 이래서 마법소녀들이란"
"상관 없잖아. 이미 상황은 종료됐고. 저 아이는 언제쯤 날 좋아해줄런지 우둔한 아이야."
"자기과신이 심한 사람이니까요. 그래도 오해는 언젠간 풀리겠죠. 곧 헌터협회 별동대랑 기자들이 모여들텐데, 같이 있어드릴까요?"
"됐어, 그냥 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하르미아가 그에게 휙휙 손짓을 하곤 고개를 돌렸다.
명백히 무시하는 태도였지만 박하민은 귀찮은 일이 줄어든 게 신난다는듯이 둥둥 날아서 사라져버렸다.
한국 칠성이란 사람들이 이렇게 무게가 없어서야, 원.
"자, 너희는 환상으로 덮어줄 테니까 빨리 가렴. 귀찮은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저희도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기자들이 너흴 보고 득달 같이 달려들 게 뻔한데, 뭘 그러니. 너희는 걔들이 북방 언데드들보다 무섭고 끈질기다는 걸 알아야 해."
하르미아는 다시 칠흑여제의 눈물을 돌아봤다.
몸이 투명해진 우리는 그녀의 말에 따라 군말 없이 현장을 떠났다.
***
박물관에서 있었던 사건은 '사령폭주 사건'으로 명명되어 언론을 통해 세상에 퍼졌다.
옥상부터 지하까지 뻥 뚫린 고급스런 박물관, 망혼의 폭풍에 한줌 핏물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피해자들, 하늘을 가득 메운 망혼들
서울 한복판에 재앙이 출몰할 뻔 했다는 사실에 한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져들어 크고 작은 소요사태를 불러왔다.
덕분에 한동안 경호산업이 성행했을 정도로.
누군가는 무능한 정부를 탓했고, 다른 누군가는 아티팩트 박물관의 방임을 문제 삼으며 박물관의 철폐를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죽지 않고 땅 속으로 숨어든 북한군의 음모라고 헛소문을 퍼트리며 인터넷을 불태웠다.
물론, 내게 그딴 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일개 극정 아카데미의 학생이지, 이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죽은 건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지만 원작의 사건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수준으로 막아낸 거다.
'변명인가? 결국 그 사건을 앞당긴 건 나잖아. 내가 조금 더 잘 대처했다면'
아니, 그게 무슨 소용인가.
아무튼 난 예정된 재앙을 막았고, 그 피해도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
내게 죄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번 한 번만이 아니야. 이런 상황은 계속 일어날 수 밖에 없어. 매번 이딴 생각을 할 수는 없겠지'
인간이 살지 못하게 된 지역엔 아직도 수많은 재앙이 도사리고 있다.
지구 전체를 통틀어 생각하면, 약 마흔 개체 정도.
재앙 하나 당 S급 헌터가 적어도 셋이 필요한데, 현 인류가 보유한 S급 헌터는 약 서른 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S급 헌터가 한 곳에 몰려 있는 것도 아니고 각 국가마다 분산되어 있기에 실질적으로 한 번에감당할 수 있는 재앙의 수는 더욱 줄어든다.
심지어 S급 헌터가 열이 와도 감당해내기 힘든 재앙도 많았으니.
그래도 우리 영웅님께는 안 되죠! 사십재앙? 다 덤벼!!
"글쎄 그 정도까지 강해질 순 있으려나"
뭐에요 그게!! 보통은 이럴 때 전의를 불태우거나 그러지 않아요?
"지금은 개인사정으로 피곤해서."
등에서 팔락이는 셀레스티에게 그렇게 대꾸하며 교실 문을 열었다.
어제도, 그저께도 망토를 등에 매고 등교했지만 이 느낌은 좀체 익숙해지질 않는다.
문을 열자, 익숙하고도 부끄러운 목소리가 내 귀를 찔렀다.
너는, 전설의 목격자가 될 것이다!!!!
"하하하하!!!"
"."
소리가 난 쪽을 힐끔 돌아보니, 그곳엔 박지혁과 다른 학생들이 있었다.
열심히 낄낄대길래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더니, 내 시선을 느낀 몇몇은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지만 박지혁은 되려 눈을 바로 뜨고 날 마주 봤다.
건방진 놈.
"뭘 봐."
"딴 건 아니고, 등에 그건 떼면 안 되냐?"
"못 떼."
냉담하게 대꾸하곤 내 자리에 앉아 엎드렸다.
교실은 바람 한 점 불지 않건만, 퍼베이시브 에픽은 고고하게 흔들리며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영웅강림의 페널티 때문이다.
그 페널티란, 바로 망토가 등에 찰싹 붙어서 자랑스럽게 휘날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일주일 동안!
어떤 방법을 써도 떨어지지 않는데다 심지어 가릴 수도 없다.
이는 퍼베이시브 에픽의 자체적 기능인지라, 망토에 깃들어 있을 뿐인 셀레스티도 임의로 떼어내줄 수가 없었다.
제 딴에는 오히려 포상이라고 우기지만
덕분에 요즘 들어 나에 대한 평가가 조금 갈리는 것 같다.
사령폭주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제때 정보보호 신청을 넣은 덕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거기에 기여를 했다는 것 정도는 알려졌다.
전시관으로 돌입하기 직전에 이상한 소리를 한 것도 녹음 되는 쓸데 없이 비싼 CCTV에 찍혔고.
때문에 나를 새삼 대단한 시선으로 보는 시각도 생겼지만, 내가 등에 망토를 휘날리고 다니는 걸 보고 '제 업적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닌가?' 라고 하는 의심이 아카데미에 만연했다.
대놓고 티를 내는 사람은 없다지만 솔직히 말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다.
붉어질 것 같은 얼굴을 숨기고 죽은 척을 이용해 휴식을 취하려던 그 순간, 푹 수그린 머리 위로 무언가가 툭툭 건드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시현님?"
"왜애"
"뭐하십니까?"
"죽은 척 하려고"
"그런 거 하지 말고 좀 일어나보십시오."
날 깨운 건 샬롯이었다.
뭔가 싶어서 부스스 일어나니, 그녀가 갑작스레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웬 종이와 펜이었다.
"사인해주십시오."
"이게 뭔데"
"반장후보 추천서입니다."
"아."
우리 반은 아직 반장을 뽑지 않았다.
우리 반 담임은 반장 선거에 대한 걸 임시 반장인 천의린에게 맡겼는데, 천의린이 은근히 뭉개면서 선거를 미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샬롯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열심히 항의해서 결국 선거가 열리게 되었지만.
"너 반장 나가게?"
"네."
"추천인이 몇명이나 필요한데?"
"여덟 명입니다."
샬롯은 도도하게 금발을 슥 넘기며 종이를 팔랑거렸다.
잡설 말고 빨리 해달란 뜻이었다.
그녀가 나 말고 누구에게 추천을 받을 지는 조금 궁금했지만 추천 서명 정도야 해줄 수 있다.
손가락이 닳는 것도 아닌데, 뭐.
종이를 받아보니, 서명란엔 샬롯의 이름 밖에 없었다.
나는 펜을 들고 손가락 사이로 휙휙 돌리며 추천서를 읽어내려갔다.
그 때,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눈동자를 굴려 샬롯을 쳐다봤다.
"샬롯."
"뭡니까."
"부반장 이름에 내가 대체 왜 있어?"
샬롯은 내 질문에 당황한 티를 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귓볼이 살짝 빨개진 게 보였다.
그녀는 변명하듯 말을 보탰다.
"그, 그게 다른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반장후보 추천서는 반장과 같이 일할 부반장의 이름도 같이 적어야 한다.
반장 따로 부반장 따로 선거를 하는 게 아니라 2인1조 방식으로 선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샬롯은 내 이름을 그녀를 도울 부반장 후보란에 적어 놓고 내게 가져와버렸다.
"이걸 내가 왜 해?"
"그렇게 말하지 마시고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난 부반장 싫은데."
"그래도"
샬롯은 제 나름대로 간절한 기색이었다.
어차피 친구도 없어서 당선도 안 될텐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진 모르겠다만.
원작 스토리 라인에서도 샬롯은 늘 선거란 선거는 다 나가는데 죄다 떨어지고 마는 비운의 캐릭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넌 어차피 안 된다, 그러니까 헛짓거리 하지 말고 저리 가라.' 라고 면박을 주며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조금 그래서 펜을 고쳐 잡고 사인을 해주고 말았다.
천의린을 비롯한 다른 후보들이 있는 이상은 당선이 될 리가 없으니까.
샬롯은 내가 펜을 대충 휘갈겨 사인을 하자마자 취소는 없다는 듯이 도도하게 종이를 탁 낚아챘다.
그러고는 고맙단 인사와 함께 어딘가로 쌩하니 가버렸다.
다른 사인을 받으러 가는 걸까?
'혹시 나도 앞으로 나가서 연설이나, 그런 걸 해야 하나?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일단 샬롯이 추천인을 다 채우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나는 교탁 앞에서 망토를 휘날리며 자기를 뽑아 달라 연설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을 하며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
행사용으로 쓰이는 큰 아카데미의 강당.
넓이를 무려 제곱킬로미터 단위로 세야 하는 큰 공터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그 널찍한 공터에는 나를 포함해 약 20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아카데미의 1학년 학생들이다.
모여 앉은 학생들은 곧 있을 수행평가가 크게 기대되는지 제각각 웅성이며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실기 수행평가는 하르미아가 직접 주관하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내 옆에 앉은 유하가 비어있는 강당의 중앙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기에 환상이 있는데? 저거 하르미아님인 건 아니겠지?"
"아마 맞을 걸? 하르미아님은 은근히 장난질을 좋아하니까."
"넌 네 이모에게 장난질이 뭐니, 장난질이?"
유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리듬감 있게 찰랑이는 녹색 단발을 보고 있다가, 강당 중앙으로 시선을 옮겼다.
당연히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수연이가 눈을 반짝이며 나와 유하 사이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만화적 표현이 허용된다면 아마 십자눈을 하고 있었을 텐데.
"그나저나 환상세계에서 배틀로얄이라니! 왠지 두근거리는데? 너희들도 그렇지? 응?"
"그렇긴 하지. 넌 날뛰다가 금방 탈락할 것 같긴 하지만."
"한 20명 정도만 죽이고 탈락해줘, 수연아."
"일단 시현이부터 죽여야겠네."
"그건 참아줘"
수행평가는 환상세계에서의 배틀로얄로 진행된다.
환상세계의 넓이는 약 100제곱킬로미터.
한 변의 길이가 10km인 정사각형 모양의 세계이니 그 정도가 맞았다.
이 수행평가는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게 전부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수행평가인 만큼 그 과정을 보니까.
점수를 쌓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기 짝이 없다.
와글와글하는 학생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 전략을 점검하고 있을 때, 하르미아가 강당 중앙에서 환상을 걷어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깜짝 등장에 놀란 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환호를 보내왔다.
모든 극정 아카데미 학생의 우상인 한국 칠성의 등장이었으니까!
"와아아아아!!"
"하르미아님!!!"
중앙에 선 하르미아는 싱긋 웃으며 그 환호성에 화답하듯 손을 들었다.
이런 반응을 즐기기 때문에 아카데미에 눌러 앉고 말았다는 하르미아의 설정을 생각하면 조금은 재미 있는 광경이었다.
친애하는 극정 아카데미 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환상파수꾼, 하르미아입니다.
그녀가 환상을 이용해 귓가에 몽환적인 목소리를 보내왔다.
하르미아의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에 신비감이 더욱 고조되는 연출이었다.
멘트는 왠지 라디오 광고를 연상케 했지만
필요한 이야기만 하고 바로 넘어가죠. 여러분은 곧 환상세계에서 배틀로얄을 시작할 거랍니다. 끝까지 살아남는 것을 주로 하되, 가능한 많은 적들을 쓰러트리세요. 그게 이 수행평가의 전부는 아니지만, 안에 들어가면 친절한 요정이 다 알려줄 거랍니다.
하르미아가 손가락을 튕겨 큰 분홍빛 게이트 하나를 만들었다.
그 속엔 마름모 꼴로 세워진 정사각형 모양의 섬이 하나 있었다.
각 구역마다 지형이 다르니,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을 찾는 게 좋을 거에요. 물론, 어느 쪽에도 자신이 없다면 사람이 적은 쪽으로 가는 게 좋겠죠?
하르미아가 손을 젓자 게이트가 점차 커지더니, 이내 강당 전체를 덮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학생들은 그 위압갑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력을 가라앉히세요. 저항하면 수행평가 탈락으로 간주되니까요. 제 체면도 떨어지고. 준비되셨나요?
학생들이 제각각 자세를 잡고 준비하자, 하르미아가 손을 내렸다.
그러자 느릿하게 일렁이던 게이트가 급작스레 움직여, 강당을 집어삼켰다.
들이닥치는 환상세계의 틈 사이로 하르미아의 진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럼, 시작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