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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31화 (31/119)

〈 31화 〉 일어나 죽이거나, 엎드려 살거나 (1)

* * *

게이트를 넘자, 수많은 학생들과 디디고 있던 땅이 사라졌다.

정신차리고 보니 내 몸은 어느새 3km 상공에서 자유낙하를 하는 중이었다.

스쳐지나가는 푸른 하늘과 구름이 예쁘다.

"으으으아아아아아아!!!"

­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3000미터 높이에서 한 여성이 떨어집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공기가 귓가를 때리며 청각을 어지럽힌다.

허공에서 몸을 허우적대며 내려다 본 아래에는 웬 바다와 그 한가운데에 뜬 정사각형 모양의 섬이 있었다.

저곳이 배틀로얄의 무대이다.

한 변이 10km인 정사각형 모양의 섬은 꽤 많은 지형과 환경을 품고 있다.

북쪽으로 갈수록 추워지고, 남쪽으로 갈수록 더워진다.

또한 동쪽으로 갈수록 비가 많이 오고, 서쪽으로 갈수록 해가 맑다.

때문에 북쪽에는 빙하가, 남쪽에는 화산이 있고 동쪽에는 수몰도시가 있으며 서쪽에는 평원이 있다.

각 지대의 사이에도 각 지대의 특징을 공유하는 또 다른 지형이 있다.

북서쪽엔 툰드라, 남서쪽엔 사막, 동북쪽엔 폭설지대, 동남쪽엔 수몰림 이런 식이다.

중앙은 특색 없는 험지이고.

난데 없는 추락으로 어지럽던 정신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몸이 천천히 그쪽으로 기울며 추락의 궤도가 바뀌었다.

마치 배틀그라운X의 그것과 똑같았다.

내 몸은 천천히 덥고 비오는 동남쪽의 수몰림으로 향했다.

섬의 서쪽 전반을 덮은 먹구름을 뚫고 지나가자 교복이 있는대로 다 젖고 말았다.

­ 꺄아아악!! 몸이 다 젖잖아요!! 책임 져!

"나중에 알아서 말려줄테니까 걱정 마아아!!!"

현재 내 복장은 활동복이 아니라 정식 교복이다.

하도 입다보니 치마가 편해져버린 탓도 있고, 무엇보다 시간마다 옷을 갈아입기 귀찮았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선 거진 교복만 입고 다닌다.

지금 상황에서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이윽고 땅이 가까워진다.

빠르게 암산해 본 결과 공기저항이 있는 자유낙하로 종단속도에 도달한 내 속력은 약 50m/s.

일전에 측정한 내 질량이 약 45kg니까, 땅에 그대로 부딪혔을 때 받을 충격량은 2250kg·m/s.

1t 짜리 트럭이 약 8.1km/h의 속력으로 부딪히는 것과 비슷하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다리부터 땅으로 향하도록 몸을 틀었다.

1t 짜리 트럭이 10km/h도 안되는 속력으로 부딪힌다

'아카데미 학생이 이것도 못 버티면 자퇴해야지.'

첨벙!!!

빽빽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지나 물이 가득한 지면 위로 착지했다.

약 1.3m 정도 차오른 물과 숙련된 낙법이 충돌시간을 늘리고, 충격력을 줄인다.

아주 간단한 물리학이다.

'공기 저항이 존재하는 한 추락으로 죽는 학생은 없겠지. 낙법을 몰라서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몰라도.'

사실 환상세계 주제에 실제 물리학에 기반한 추락사가 구현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긴 하다.

역시 하르미아의 연산력이란

물에 잠긴 몸을 일으켜 수면 위로 몸을 내밀었다.

젖어버린 머리칼을 한차례 휙 털어버리곤 뒤로 넘겨 시야를 확보해 주변을 살폈다.

수몰림은 물에 잠긴 정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높이 솟아오른 녹색 지옥과 어울리지 않게 하늘 멀리 펼쳐진 비구름.

간간히 어두운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며 나무를 불태웠지만, 곧 퍼붓는 비에 의해서 꺼지곤 했다.

그렇게 십여초를 풍경을 보며 보내고 있을 때, 곁에 난데 없이 요정이 하나 나타났다.

뿅하고 나타나 샤라랑하고 한 바퀴를 돈 요정은 밝은 어투로 말했다.

"안녕! 배틀로얄의 생존자를 인도하는 가이드 요정이야! 생존자 번호 1720! 잘 부탁해!!"

[하르미아 시스템 ver. Thick and Strong 17 인식. 연결을 시작합니다.]

가슴 속의 하르미아 시스템이 움직인다.

요정은 상큼한 포즈 그대로 얼어붙어버렸고, 그 상태에서 몇 차례 머리를 달달 흔들다가 뿅하고 사라져버렸다.

내 하르미아 시스템이 가이드 역할을 맡은 양산형 시스템의 권한을 가져와버린 것이다.

­ 이래도 되는 거에요? 뭔가 부정행위 같은데요?!

"가이드 요정의 권한은 진짜 별거 없네. 정보창 띄우기랑 맵 띄우기? 이 정도야 뭐, 우리 이모님께서도 봐주시겠지."

하르미아 시스템이 일목요연하게 띄운 튜토리얼을 찬찬히 읽다가 근처 물 위에 떠다니던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정보창을 켰다.

이곳에선 내 것과 비슷한 류의 정보창과 비슷한 게 지원되나보다.

<이건 그냥="" 나뭇가지네?="" 왜="" 그딴="" 쓸데="" 없는="" 걸="" 주웠대?=""/>

"."

정보창 주제에 말투가 건방지다.

나는 내 고유의 정보창을 이용해 나뭇가지의 정보를 봤다.

[환상세계의 물에 젖은 나뭇가지(C)]

­ 환상세계에서만 유효하다. 불을 붙이기 힘들 것 같다.

음, 훨씬 쓸만하구만.

역시 우리 것이 최고야.

­ 뭘 그리 실실 웃고 계세요? 나뭇조각이 좋아요?

"나뭇가지보다 네가 좋아."

­ 꺄아아

아무 의미 없이 뱉은 말에 망토가 온 몸을 비비 꼰다.

왠지 기분이 나빠져 망토를 붙잡고 물고문하듯이 물에 연거푸 담갔다 빼며 이번엔 지도를 켰다.

그저 근처 지형과 자신의 위치, 방향만을 보여주는 지도인 듯 했다.

안타깝게도 구조물은 아예 표시되지 않았다.

별 볼일 없는 지도 상단엔 다음 금지구역과 폐쇄까지 남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평원: 2h="" 57m="" 34s=""/>

금지구역에선 자신의 데스카운트를 소모하게 되며, 이 데스카운트가 다 하면 즉시 탈락하게 된다.

금지구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다가 결국엔 모든 장소가 금지구역으로 지정된다.

그 전에 결판이 나는 게 보통이긴 하겠지만.

지도를 끈 뒤 가슴께에 닿는 물을 헤치고 홍수에 휩쓸려 한 곳에 쌓인 나무 기둥들을 타고 올랐다.

내가 높은 나무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등에서 힘겹게 펄럭이는 망토가 우울한 어투로 말했다.

­ 농담한 건데 왜 물고문을 해요 빨리 말려줘요

"기다려. 여기서 할 게 조금 있으니까."

­ 여기서 할 게 뭐가 있는데요? 다른 애들 때려죽이는 거요? 아니, 애초에 이딴 곳을 누가 와요! 장담하는데 여기엔 영웅님 밖에 없을 걸요?

서쪽의 평원, 중앙의 험지, 서북쪽의 툰드라 등 인기 있는 지역에 비해 수몰림이 인기가 없다곤 해도, 나 밖에 없진 않을 터다.

물로 가득 찼기에 수마법사나 뇌마법사가 많이 올 것이다.

또 나무로 가득 찼으니 생명마법사나 드루이드 같은 류의 학생들도 많을 테니까.

­ 그럼 주술사도 여기에서 얻을 메리트가 있어서 온 건가요? 막 벌레들을 다룬다던지?

"그건 충술사가 할 일이고. 그러고보니 충술사도 오긴 왔겠네. 여기선 조금 무섭겠어."

물론, 주술사는 여기서 딱히 큰 이점을 얻는 직종이 아니다.

죽은 독사나 각종 벌레 같이 주술에 도움이 되는 도구라면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뿐.

더욱이 나는 그런 걸 잘 다룰 수 있는 저주 같은 주술을 모른다.

"주술사가 이점을 얻는다기 보다는 내가 이점을 얻는다고 봐야지."

­ 영웅님이요? 혹시 아마존 한가운데 출신이라 여기가 막 익숙하고 그래요? 아마조네스구나!!

"아마존은 이미 이십년 전에 싸그리 불타서 없어졌거든. 아마조네스도 그쪽이 아니고… 아무튼, 내가여기 온 이유는 사원이랑 마법사 때문이야."

­ 사원은 모르겠고, 마법사요? 메이지 슬레이어 하시려고요?

"바로 그거지. 아무리 전장이 걔들한테 유리하다고 해도 빗물 사이로 모습을 숨기고 기습을 가하면 별 수 없거든."

공격해서 탈락시킨 학생 수가 많을수록 점수는 올라간다.

추후 안전지대가 줄어들었을 때 쓸 수 있는 데스 카운트도 올라가고.

가능하면 여기서 마법사들을 열심히 잡아서 점수를 올려놔야 한다.

약 1분 정도를 두리번대다 근방에서 제일 높은 나무를 찾아냈다.

방수 크로스백에서 빳빳한 부적을 꺼내 착을 적고 단화 밑창에 붙인 뒤, 곧게 선 나무에 발을 내딛었다.

그 덕에 나는 나무를 수직으로 걷는 모양새로 편안하고 멋지게 오를 수 있었다.

­ 정말 그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 으음…

탐탁잖은 반응을 보이는 셀레스티를 무시하고 계속 나무를 올랐다.

하늘에서 퍼붓는 비가 얼굴을 정면으로 때렸지만 역시 무시했다.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란 나의 모토니까.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섰다.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과 굵은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폭우가 시야를 방해한다.

이따금씩 눈을 찌르는 빗방울 사이로 녹빛 바다가 보이는 듯 하다.

[현재 보정률: 19%]

감각의 보정률을 올려 빗물을 꿰뚫어 본다.

녹색 바다 사이에 낡은 석재 사원이 보인다.

그리고 숲 사이를 누비는 몇몇 마법사들도.

"참 고생스러워보이네."

­ 어, 어디요? 안 보여요! 이 멍청한 시스템아! 나도 시야 보정 달란 말야!

[경고: 권능 '영웅담'과 연결 실패(연결 어려움).]

­ 네 연결 능력이 딸리는 걸 어쩌라고! 내놔!

하르미아 시스템과 드잡이질을 시도하는 망토를 대충 진정시킨 후 눈앞에 지도를 띄웠다.

사원의 방향은 북북서.

그리 멀지는 않은 위치에 있었기에 지금 당장 움직이기로 한 나는 곧 나무에서 내려왔다.

사원을 가면서는 번거롭게 물길을 헤치기보다는 조용히 나무를 타는 식으로 나아갔다.

혹시 다른 이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보정된 감각으로 발 밑을 훑어봤지만, 밑은 발자국이나 별다른 흔적이 남는 맨땅이 아닌 물길이었기에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순 없었다.

보정률을 높이면 찾을 수는 있겠지만, 현재의 19%로도 머리가 살짝은 무거워지는지라 그런 방식의 흔적 조사는 관뒀다.

'지금은 마법사보다 사원이 중요하기도 하고.'

이 배틀로얄에서 점수를 쌓는 방식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하다.

옛날 게임판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던 만능 GM 인공지능을 우습게 뛰어넘는 하르미아의 메인 시스템은 별의별 것을 점수로 쳐준다.

돌을 깎아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어도 점수를 주고, 동물들을 모아 같이 강강술래를 춰도 점수를 준다.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으며 살아남아도 점수를 주고, 아예 혼자 배틀로얄이 아니라 생존게임을 해도 점수를 준다.

물론 그런 행동은 배틀로얄의 취지와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점수가 엄청 높지는 않다.

다만, 이 사원에서 지내는 것은 살짝 결이 다르다.

정글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 있는 사원은 수몰림 최대의 아이템 스폰 장소였고, 여기서 알박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아이템 독점의 명목으로 큰 점수를 안겨다 주니까.

이곳에 기웃대는 생존자들을 때려죽여 얻는 점수는 덤이고.

­ 점수를 얼마나 주는데요?

"시간 당 600점? 1킬이 500점인 걸 고려하면 대단한 거지. 10시간 뒤에 여기가 금지구역이 될 때까지만 있으려고."

­ 시간당? 차라리 다른 애들을 찾아다니면 안 되나요?

"이 꼴로 추적이 잘도 되겠다."

내 등에는 아직 붉은 망토가 자랑스럽게 펄럭이는 관계로, 기습과 추적은 여의치 않다.

물론 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하는 기습은 먹힐 테지만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생존자 때문에 그러고 있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고보니 다른 애들이 내 모습을 봤을 수도 있겠는데.'

그 높은 나무를 당당하게 걸어올라가 꼭대기에서 붉은 망토를 휘날렸으니 어찌 보면 못 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얼빵한 실책에 잠시 작게 자책했지만 그래도 계획은 변함이 없었기에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촛불이 밝혀진 사원 안은 꽤 넓었는데, 어쩐지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풍겼다.

고지에 지어져 있어 물에 잠기지 않은 사원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알 수 없는 온기가 퍼져나오는 곳이었으므로.

촛불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 약간은 어둑했지만 이 또한 밖에서 몰아치는 폭우의 빗소리와 겹쳐 감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원 안은 중앙의 불상을 향해 정좌한 석상으로 가득했다.

넓은 바닥에 정갈하게 앉아 있는 승려의 모습을 한 석상들은 모두 제각각의 물품을 들고 있었다.

대개는 불경이나 염주 등의 물건이었지만 웬 단검이나 석궁, 방수포 등 난데 없는 것도 많았다.

배틀로얄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 파밍.

곳곳에 떨어져 있는 물건들을 줍고 활용해서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 기본 골자인 배틀로얄에서 파밍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입 아프게 말할 이유가 없으리라.

나는 근처에 있는 석상의 손에서 석궁을 빼어들었다.

그리고 석궁의 정보를 열람했다.

<이건 석궁이네.="" 특별한="" 화살="" 없이="" 아무거나="" 달아서="" 쏠="" 수="" 있을="" 것="" 같은데?=""/>

[환상세계의 소형석궁(C)]

­ 환상세계에서만 유효하다. 말 그대로 석궁??이라 돌멩이를 매겨 발사할 수 있다.

이 석궁은 권총보다 살짝 큰 무기였다.

내 전투 스타일은 원거리 공격 수단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하나 정도 있어서 나쁠 건 없는 무기였다.

허리춤에 석궁을 챙기곤 다른 물품들을 찾아 나섰다.

사원 내부를 한 바퀴 돌며 쓸모 있어 보이는 방수포나 단검, 연막탄 등은 따로 챙겨두고, 쓸모 없어 보이거나 겹치는 물건들은 따로 모아 내려두었다.

대강의 파밍이 끝난 후 나는 허리춤의 태도를 뽑아 버려진 물건들에 갖다 댔다.

그러자 아카데미제 태도가 빛을 내며 물품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 오, 이건 뭐하는 거에요?

"무기에 걸린 제한을 해제하는 거야. 쓸모 없는 물건을 먹여서 무뎌진 날을 날카롭게 하거나, 그럴 수 있거든."

­ 그럼 쓸모 없는 거라도 최대한 모아두는 게 좋겠네요?

"그렇지. 이건 34%까지 차올랐네."

태도의 위력 제한이 34%까지 풀렸다.

큰 사원에 먼저 도착해서 스폰된 장비들을 모조리 혼자 쓸어먹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수치였다.

10시간 동안 리스폰 되는 장비들을 고려하면 나머지 66%는 무난하게 채울 수 있으리라.

나는 10시간 동안 여기 있어야 했기에 적당히 시간을 죽일 뻘짓을 할 심산으로 따로 빼둔 방수포를 펼쳤다.

어느 정도 날카로워진 태도의 성능 테스트를 겸해 우비 비슷한 것을 만들어볼 참이었다.

그렇게 방수포에 칼 끝을 대는 찰나.

보정률 10%의 예리한 청각에 무언가가 잡혔다.

철벅, 철벅

"."

­ 왜 그래요, 갑자기?

"쉿."

부시럭대는 방수포를 넘어 조심히 발을 놀려 제단의 불상 뒤에 숨었다.

입구까지는 거리가 꽤 있지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자세의 석상 뒤에 숨기는 무리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발소리가 곧 사원에 울리기 시작했다.

놈의 발소리는 질척하면서도 신중했다.

발소리가 질척하다는 건 신발에 진흙이 많이 묻었다는 뜻이고, 그 말인 즉 물길을 헤치면서 한참을 걸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 발걸음이 신중하다는 건 이곳에 누군가 있음을 상정한 행위이다.

빨간 망토를 보고 내가 이곳에 온 걸 알아챈 걸까?

'아니지, 신발에 진흙이 많이 묻어서 발소리가 나는데도 신중한 발걸음이라? 그렇다는 건 확신이 없다는 뜻이야. 진짜 다른 생존자가 이곳에 있다는 걸 확신했다면 아예 들어오지 않거나 진흙을 털어내고 조용히 들어오지 않았을까? 혹시 속임수일 확률은? 아냐, 속임수라면 저렇게 애매하게 나오진 않겠지. 내 추측이 맞다면'

사원에 겁 없이 발을 디딘 저 생존자는 제 발소리를 신경 쓰지 않는 머저리거나, 새로운 환경에 대해 '약한 불안'을 품은 생존자다.

어느 쪽이던 간에 저런 태도라면 내 기습이 안 먹힐 이유는 없다.

저게 설사 마법사가 아니라 전사일지라도 말이다.

'좀 더 가까이 온다면'

놈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기는 하다.

다만 불상 근처까지 올지는 미지수이다.

충분히 가깝지 않으면

부스럭.

내가 자르려다가 만 방수포를 건드린 것 같다.

밟았다면 저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기습을 하기에는 애매한 거리다.

부스럭, 부스럭

연거푸 부스럭대는 소리가 난다.

이건 방수포를 들었다가 바닥에 펼쳐보는 소리가 틀림 없다.

그렇다는 건, '양손으로 방수포를 잡았다'는 뜻!

"!"

나는 지체 없이 약?을 밟고 단번에 뛰어 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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