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일어나 죽이거나, 엎드려 살거나 (2)
* * *
섬의 북서쪽은 춥고 해가 맑은 기후이다.
북쪽의 빙하와 서쪽의 평원 사이에 끼어 있는 이곳은 바로 툰드라.
짙은 풀색의 초본이 얼어버린 땅에 가득한 광활한 땅이었다.
'으음, 광활한가? 지평선이 보이긴 하지만 저긴 툰드라가 아니라 그냥 서쪽 초원이잖아?'
불어오는 남풍에 갈색 단발을 맡긴 이수아는 특유의 좋은 시력으로 저 멀리를 내다봤다.
지평선 멀리에서 반사된 싱그러운 녹빛이 평원을 가로질러 그녀의 눈동자에 닿는다.
특출난 시력을 가진 이수아로선 이 섬이 마냥 좁아보일 뿐이었다.
이수아가 시선을 옮겨 땅을 힐끔 봤다.
얼핏 보면 그냥 짙은 색깔의 초본일 뿐이었지만, 그녀의 눈엔 얕게 패인 땅바닥의 발자국이 보였다.
발자국의 깊이와 간격으로 미루어보아 이곳을 지나간 이는 아마도 궁수.
밟히면서 짓눌렸을 풀잎이 꺾인 각도로 볼 때 약 5분 전에 이곳을 지나갔다.
이수아는 발자국이 이어진 쪽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그녀가 마땅히 몸을 숨길 곳도, 살아남기 좋다고 할 수 있는 곳도 아닌 툰드라를 선택한 데에는 꽤 큰 이유가 있다.
다른 지형에 비해 추적이 용이하다는 특성 때문이다.
'어디보자… 아, 저건가?'
그녀의 맑은 눈에 잡힌 건 툰드라에 안 어울리는 금색 머리칼.
눈에 확 띄기에 배틀로얄에서 불리한 머리 색깔이었지만, 이수아는 저 여성에겐 그런 물렁한 생각이 통하지 않을 거라 느꼈다.
금발의 여성은 빌보드 8위, 샬롯 스털링이었으니까.
'하필이면 샬롯이긴 한데… 쟨 아직 날 못 본 것 같네.'
샬롯은 바닥에 꿇어 앉아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처럼 흔적을 쫒는 모양이다.
덕분에 샬롯은 이수아의 사냥감이 되게 생겼다.
'원래라면 리스크가 크겠지만… 지금은 할만하지 않을까? 좋아, 아깝게 졌던 집중력 시험 때의 복수다…!'
Z반 다음 가는 E반의 수석인 이수아.
그녀는 경이로운 시력을 타고난 날카로운 저격수다.
샬롯이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강력한 화력을 퍼붓는 타입이라면, 이수아는 전투 현장에서 한발짝 떨어진 원거리에서 정확하게 한 방.
갈색 머리칼의 저격수가 샬롯이 보이는 곳에 팔을 쭉 뻗어 크기를 가늠하며 간단한 비례식을 세웠다.
키라 연산법이라 불리는 간단한 거리측정법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샬롯의 키는 약 173cm. 내 팔의 길이가 50cm고, 내 시점에서 샬롯의 크기는… 내 손톱의 크기와 비교해보면 약 0.1cm. 그럼… 아이씨, 얼마지?'
그녀는 땅바닥에 몸을 낮추고 비례식을 세웠다.
173 : L = 0.1 : 50.
비례식 관계에 의해 L = 865m이다.
몇 초간 끙끙대다 암산을 해낸 이수아가 마침내 자세를 취하고 활을 당겼다.
가녀린 골격에 붙은 굵은 선의 근육이 한껏 부푼다.
실전압축근육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알차고 각진 근육.
작은 체구와 팔길이를 보완하기 위해 바쳤던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다.
'좋아. 거리는 북북동으로 대략 865m, 바람은 순풍으로 약 3.2m/s. 그동안 했던 저격을 생각하면 못 맞출 이유가 없어.'
컴포지드 보우의 양 끝에 붙은 도르래가 굴러간다.
기계식 구조로 증폭된 활의 장력이 최대한도에 달하자, 이수아가 손을 놓았다.
저격용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샬롯에게 쇄도했다.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날아간 화살은 단숨에 심장을 꿰뚫을 것 같은 기세로 날아갔지만, 그 기대는 좌절되고 말았다.
옅게 불던 남실바람이 무슨 변덕을 부린 건지, 화살의 궤도가 비틀렸기 때문이다.
화살은 샬롯의 바로 옆을 스쳐지나갔다.
이수아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낚였다.'
화살의 궤도는 깔끔했고, 화살에 담긴 힘도 완벽했다.
그런데 화살의 궤도가 갑자기 비틀렸다.
이는 어지간한 강풍이 아니면 불가하다.
샬롯이 정령을 다뤄 화살을 빗겨낸 게 틀림 없다.
"……."
이수아는 냅다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같은 궁수를 상대로 저격에 실패한 이상은 상호 저격전으로 나가야 하는데 이는 살아남는 게 주가 되는 배틀로얄에선 매우 나쁜 선택이다.
차라리 이쪽의 저격 실력이 우세에 있다면 먼 거리에서 일방적인 저격질을 했겠지만, 상대는 그 샬롯이다.
그녀만큼이나 뛰어난 저격 솜씨를 보여주는 최우수 궁수란 말이다.
한편, 곁을 스친 화살에 활을 뽑아든 샬롯은 저 멀리 도망치는 이수아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수아만큼 좋지 않은지라 멀어지는 그녀의 신형이 티끌처럼 보였지만, 대충 누군지는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수아…'
궁술 선택수업에서 본 적이 있다.
아무리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샬롯이라지만, 저격 시험에서 그녀에게 한 끗 차이로 패한 기록이 있는 그녀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학생이었다.
저 거리에서 정확하게 저격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빼면 그녀 밖에 없으리라.
샬롯은 활을 들고 이수아와의 거리를 가늠하다가 이내 관두고는 활을 접었다.
거리가 너무 먼데다 역풍이 불어 저격하기도 여의치 않다.
그렇다고 기동력을 살려 따라붙자니 이수아 씩이나 되는 궁수에게 카이팅을 당하는 게 걸린다.
그녀는 대신 고개를 돌려 곁에 둥둥 뜬 바람의 정령을 보았다.
"실프님?"
우응?
"방금 남풍이 불고 있지 않았습니까?"
응! 맞아.
"저격수도 남쪽에 있었고요."
맞아! 내가 화살도 흘려줬어. 잘했지??
"그럼 저격수를 알고 계셨겠군요."
응!! 난 못하는 게 없으니까!!
샬롯은 천진하게 웃는 정령을 쓰다듬는 척하면서 양손으로 잡고는 쭈욱 늘렸다.
계약관계가 아니다보니 가끔은 정령이 업무태만을 일삼기도 한다.
쭈우욱.
으아아아!! 왜 그래!! 아파!!
"그걸 알고 계셨는데 왜 제게 일찍 알려주지 않은 겁니까?"
그, 그, 그건…
쭈우욱…
꺄아악!! 알록달록이 정령을 아코디언으로 쓴다아!! 근로계약서 위반이야!! 정령왕께 제소할 거야!!!
"계약관계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시위의 힘이 조금 더 강했더라면 그대로 절명할 뻔 했습니다."
히야아악!!! 이것부터 놓고 이야기하지 않을래?? 응?? 미아내애애!!! 칭찬!!! 칭찬 받고 싶어서!!! 구해주면 칭찬해줄 것 같아서 그랬는데에에에!!! 으아아앙!!!
그제서야 불쌍한 실프를 놓아준 샬롯은 잠시 남쪽을 내려다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서쪽의 평원은 20분 뒤에 금지구역이 된다.
바로 옆에 있는 툰드라로도 유입이 많이 될 터이니, 자리를 굳히고 몰려오는 생존자들을 잡아야 한다.
샬롯은 요정에게 부탁해 자신의 점수를 확인했다.
<현재 6410="" 점수:=""/>
'…이 정도면 높은 건가? 보이는 대로 다 쏴죽이긴 했는데 확신이 안 서네.'
그녀는 지금까지의 게임에서 가장 많은 생존자를 죽였다.
***
내 예상대로 침입자는 방수포를 쥐고 있는 마법사였다.
어떤 마법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 그딴 건 내 알바는 아니다.
내 칼에 죽을 테니까.
"으아악!!"
푹.
검이 무방비한 목을 향해 강하게 짓쳐들어간다.
마법사에겐 불행하게도, 칼날은 목뼈에서 멈추고 말았다.
아직 34% 밖에 되지 않는 제한 해제율 때문이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봐!"
퍽! 퍽! 퍽!
목뼈에 걸린 칼을 뽑아서 다시 연거푸 꽂아 넣으며 반쯤 잘린 목을 마저 베었다.
나무를 패는 듯한 그 행동에 서글픈 비명을 지르던 마법사는 곧 빛무리로 화하며 사라지고 말았다.
긴장한 것에 비해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다.
<1 kill(+500)=""/>
<우홋! 잔혹한="" 여자!="" 마치="" 실력="" 없는="" 초짜="" 망나니="" 같군요!(+150)=""/>
자, 잔인해요!
"단칼에 목을 벨 수 있는 사회를 만들든지!"
뭐에요, 그게!
마법사나 궁수는 근접계열에 비해서 체력이 취약하고 기습에 무력하단 이유로 무기 제한 따위의 제재를 받지 않았다.
조금은 억울하지만… 그래도 홀로 떨어진 마법사나 궁수의 전투수행 능력이 크게 감소한다는 걸 생각하면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안타까운 사태가 일어난 거다.
결론은 하르미아 탓이란 거네요?
"하르미아님."
님은 무슨 얼어죽을 님이에요! 제가 더 나이 많거든요?
"…너 잘났다, 정말."
실제로 나이가 많기야 할 테지만 정신연령은 잘 모르겠다.
우유팩 아래에 적힌 숫자로 배틀하는 초딩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어딜 감히 우리 이모님께 말야.
'아니,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닌데.'
고개를 한 차례 털어버리곤 바닥을 봤다.
빛무리로 화한 마법사가 있던 자리엔 작은 알약이 하나 남았다.
저건 다름 아닌 귀한 회복약이다.
초반이 지나고 단합한 생존자의 무리가 생겼을 때 쓰일 수 있는 화폐이기도 하고, 급박한 순간에 재생력을 올려주기도 하는 보배이기도 하다.
나는 알약을 치마 주머니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그 옆에는 펴지다 만 파란 방수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처음엔 저걸 대충 깎아 우비로 만들어 추가 점수나 받아볼 심산이었지만, 방금의 일로 조금 더 좋은 활용법이 생각났다.
사람이란 자고로 활용의 동물이니.
나는 방수포를 들고 비가 오는 사원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이가 오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으아아! 다시 젖잖아요!
"에휴, 쫑알쫑알 말 많네 진짜."
히잉…
시무룩해진 망토를 뒤로하고 칼로 사원 입구 근처의 땅을 팠다.
이등병 시절 쓸데 없이 삽질만 잘하던 폐급 상병에게 배운 테크닉이 여기서도 주효했다.
그 씹새끼의 오지랖이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곧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가 생기자, 그 속에 따로 꿍쳐놨던 단검 몇 개를 꽂아두었다.
그리고 안에 빗물이 차기 전에 다시 올라와 방수포를 덮고 나무토막으로 고정한 뒤, 위에 진흙을 마구 덮었다.
간단한 구멍 함정의 완성이었다.
<이럴 수가!="" 생존자="" 최초로="" 물리적인="" 함정을="" 만들었군요!(+300)=""/>
딱 삼류 정도의 악당이나 만들 법한 함정이네요.
"넌 방금 매머드를 잡던 선인의 지혜를 모욕했다, 이 악마야."
이 정도면 상대를 당황시키기에 안성맞춤이겠지.
세상 아늑한 사원에 숨어 있다가 방수포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면 달려나가면 된다.
어렸을 적 조각칼로 점토 대신 내 손을 조각했던 참사를 떠올린 나는 살짝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사원에 들어가 다른 방수포를 꺼내왔다.
방수포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으니 다른 함정들을 계속 만들 심산이다.
"이름하여, '사원 디펜스'."
왠지 영웅담 이름 같네요!
"그렇지? 뭔가 위험한 영웅담 같긴 하네."
나는 망토에게 그렇게 대꾸하며 진흙을 퍼올렸다.
***
수십 분 뒤, 구멍 함정이 모두 설치되었다.
알찬 노동을 마친 나는 진흙으로 한껏 물들어버린 교복을 빗물에 씻어내고 있었다.
몸에 진흙을 묻히고 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
"아으, 내 와이셔츠…"
그거 사이즈가 몇이에요? 생각보다 작은데요? 가슴이랑 안 어울리게.
"주문제작이야. 가슴 때문에 어깨가 남는 걸 입기는 싫어서."
원래 있던 와이셔츠는 가슴만 딱 맞고 나머지 부분은 커서 버렸다.
교복이란 건 활동성을 중시해야 하는데, 나풀거리는 와이셔츠를 입기엔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몸에 딱 맞는 옷만 입고 다니는 내 습성이 발현된 것이다.
'오버핏 따위를 왜 입는지 모르겠다니까. 불편하지도 않나.'
그렇게 손빨래로 옷을 깔끔하게 씻어내 다시 몸에 걸쳤다.
맨살에 닿는 축축한 와이셔츠의 촉감이 이상하다.
그런데 마이는 왜 챙겨놓고 안 입어요? 그거 속옷 다 보이는 거 알아요? 검은 색이라 더 잘 보이는데!
"…설마,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보는 놈이 있겠어."
활동성이 중요하지, 활동성이.
마이 따위 입을까보냐.
나는 다시 따뜻한 사원으로 들어가 앉았다.
내가 원하는 건 최후생존.
그렇다면 굳이 일어나 죽일 필요가 있는가.
엎드려 숨죽이고 살아남으면 되지.
'점수도 좋지만… 골자는 배틀로얄이니까.'
점수는 많을수록 좋지만, 점수에 목을 매는 건 우승에 자신이 없을 때나 그러는 거다.
존버는 승리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