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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33화 (33/119)

〈 33화 〉 일어나 죽이거나, 엎드려 살거나 (3)

* * *

게임이 시작하고 나서 6시간.

서쪽의 평원과 동북쪽의 폭설지대가 금지되었다.

223명의 학생 중 138명이 남았고, 상위권 쟁취를 위한 동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채유하는 북쪽 빙하에서, 박지혁은 남서쪽 사막에서 생존자를 모아 팀을 이루고 홀로 다니는 생존자나 더 약한 팀을 잡아 먹었다.

그 외에도 많은 동맹이 결성되고 서로의 싸움이 신중해지면서 초반의 열기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아카데미 학생들도 사람인지라 가끔 동맹 간의 불화나 배신도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하지만 그러한 대세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혼자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최우수 학생들은 채유하와 박지혁을 제한 일곱 명이 모두 혼자 살아남는 것을 택했다.

"하아아아!!!"

온 몸에 빛을 두른 소녀가 주먹을 내지른다.

그녀의 권골은 작고 나약해보였지만, 그 속에 담긴 파괴력은 결코 무시할만한 류의 것이 아니었다.

빠가각!!

­ 크, 흐으아아아…

투명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리치의 두개골이 박살 난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그녀의 피부에 박혔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주먹을 휘둘러 수정 리치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이윽고 수정 리치가 빗물에 완전히 부서져 흩어지자 그녀의 눈 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배회자를 잡았군요!="" 리치의="" 잔해를="" 확인해보세요!="" (+1000)=""/>

"휴우. 힘들어라."

그녀는 다름 아닌 빌보드 3위, 천의린.

신성투사의 길을 걷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어디, 한 번 볼까."

게임이 중반에 접어들며 높은 점수를 주는 배회자가 섬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름 쟁쟁한 실력을 자랑하는 팀들을 후드려 패서 쫒아내고 홀로 수몰림 지대의 배회자를 잡은 천의린은 호르몬을 제어해 전투흥분을 가라앉혔다.

차가운 빗물 속에서 심호흡을 몇 차례 한 그녀가 리치의 잔해를 상처입은 손으로 쓸어내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웬 큐브였다.

<디텍팅 큐브잖아?="" 배회자를="" 잡은="" 거야?="" 아니면="" 죽이고="" 뺏은="" 건가?="" 어느="" 쪽이든="" 대단하지!="" 그걸="" 돌리면="" 10초간="" 모든="" 생존자의="" 위치를="" 표시해줄="" 거야!="" 일회용이니까="" 조심해서="" 써!=""/>

'아하, 맵핵 비슷한 건가?'

천의린이 시스템의 설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큐브를 돌려 생존자의 위치를 표시했다.

아껴봤자 딱히 이득이 될 수 있는 구간이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큐브가 부서지며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생존자의 위치가 붉은 점으로 표시된 지도였다.

모여 있는 점도, 제각기 떨어진 점도 많았으나 아직은 홀로 있는 점이 더 많았다.

천의린은 나머지 지역에 있는 점들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현 지역인 수몰림의 위치 정보만을 집중해서 외웠다.

"가장 근처에 있는 팀은… 남쪽에 있네? 좋아, 비열하게 티밍이나 하는 놈들을 싸그리 부수러 가볼까."

'정정당당'의 가치를 누구보다 중시하는 천의린에게 있어서 티밍이란 있을 수 없는 불의였다.

'아까는 배회자를 신경쓰느라 제대로 혼내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목을 움직여 우두둑하는 소리를 낸 천의린이 나름의 정의집행을 위해 남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땅이 갑자기 꺼졌다.

"으아앗!!"

쿵.

정시현이 신나게 만든 함정에 걸리고 만 것이다.

만들다보니 단검의 수가 부족했던지라 다행히도 맨바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의린의 분노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놀란 천의린의 교감신경이 마구 활성화되며 호르몬을 뿌려 그녀의 감정에 불을 붙였다.

"이 개씨바아알!!!!! 어떤 씹새끼야!!!!!"

천의린이 단숨에 구멍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그 때 누군가가 수풀 사이로 도망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당장에 쫒아가려다 뒤늦게 호르몬을 조절해 분노를 가라앉혔다.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아무 것도 안 되니까.

그렇다고 해서 비열한 수에 보기 좋게 당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이 근처에 있던 놈들 위치가…!"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보아두었던 생존자의 위치를 떠올렸다.

시간 상,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건 자신으로부터 제일 가까이 있던 생존자 뿐.

웬 석조 건물이 있는 방향에 혼자 가만히 있던 생존자다.

'혼자라서 놔두려 했건만 이런 짓을…!'

천의린의 발걸음이 비열한 함정을 판 비겁자를 쫓기 시작했다.

***

"이 개씨바아알!!!!! 어떤 씹새끼야!!!!!"

'시발… 왜 하필이면!!!'

좆됐다.

하필이면 천의린을 건들고 말았다.

또 다시 킬을 올릴 생각에 싱글벙글 했건만, 그건 너무나도 이른 생각이었다.

나는 냅다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함정을 건드린 건 나야, 이 멍청아…!'

전신을 황금빛 신성력으로 뒤덮은 천의린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녀를 함정에 빠트린 이상, 이젠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리라.

물론, 죽을 가능성이 높은 건 나다.

­ 으아아아!! 가까워진다!!

"중계 안 해도 다 알고 있거든…!"

차라리 걸린 게 현서진이나 유하였으면 상황이 나았을 거다.

그네들은 합리적인 사람들이라 날 잡는 게 쉽지 않을 걸 아니까.

필사적으로 도망치면 그냥 놔줄 여지가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천의린은 합리적 사고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싸움에 있어서 늘 정정당당을 추구하고, 비열한 수를 쓰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해 단숨에 척결하려 든다.

나는 비열한 수를 쓴 것도 모자라 다혈질인 그녀를 빡치게까지 만들었으니, 최우선 척결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서어어어!!!!"

"자, 잠깐만! 멈춰!!"

"하아아아!!!!"

굵은 빗물 사이로 아찔한 섬광이 다가온다.

끔찍한 힘을 담은 황금빛이다.

새벽울림 ­ 별부수기.

재창조의 힘이 패도적인 힘으로 변한다.

황금빛 물리력이 날 때려죽이기 위해 쇄도한다.

맞으면 뼈도 못 추릴 정도의 공격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지라, 나 또한 패도적인 부적술로 맞설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며 적어둔 부적을 별부수기에 갖다 댔다.

팔괘, 우레 진?.

꽈과과광!!!

보랏빛 벼락이 공간을 울리며 별부수기에 맞선다.

하지만 기본적 역량의 차이인지 진?은 별부수기와 부딪히고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별부수기의 범위에서 물러나는데는 충분했다.

내 얼굴을 본 천의린이 잠시 놀라는 듯 싶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시현아? 너였구나!!!"

"아니, 자, 잠깐! 내 말을 들어줘!!"

"됐어!! 랭킹전 때부터 알아 봤으니까!!"

틀렸다.

이미 전투흥분 상태다.

그녀가 왼 주먹을 들어 다음 공격을 날렸다.

별 다른 기술은 아니고, 명치를 찔러오는 빠르고 위력적인 잽이었다.

나는 그 빠름에 기함해 되는대로 보급용 검집을 갖다 대 주먹을 막았고, 그 반동에 몸을 맡기고 뒤로 물러났다.

완전히 충격을 흡수할 순 없었기에 잠시 몸이 굽혀지고 호흡이 가빠져 왔지만, 적당히 참아내고 허리춤의 석궁을 뽑아 땅에 연막탄을 쐈다.

땅에 떨어진 흰 구슬이 깨져나가며 흰 안개를 만들어낸다.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구름에 시야가 막히자, 천의린이 분연히 소리쳤다.

"또 이런 비열한 수를…!"

비열이라니, 배틀로얄이 뭔지 모르니?

…라고 쏘아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기껏 숨긴 위치를 들키면 안 됐기에 잠자코 몸을 숙이고 부적을 적었다.

어차피 폭우 때문에 연막의 효과가 크게 떨어진지라 지금 도망쳐봤자 금방 들키고 만다.

피할 수 없다면 반격의 여지를 만드는 게 합리적이다.

더욱이 신성력은 굳건한 힘인지라 그녀에게 장송곡은 잘 통하지 않으니, 무기 하나가 봉인된 나로서는 더욱 철저해야 한다.

"거기구나!!!"

몇 초간 가만히 있던 천의린이 작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던져둔 음音의 부적이 최신 가요를 작게 재생하고 있을 뿐.

나는 이미 그녀의 등 뒤에서 습?이 인챈트된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치명적인 일격을 노리고 습격하는 칼날.

이미 제한해제율 100%를 달성한 태도는 그림자처럼 그녀의 등을 베어갔다.

사아악──!

"윽…!"

들어갔다.

깊지는 않지만, 행동에 충분한 방해가 될 정도의 긴 상처다.

신성투사인만큼 쉽게 회복하겠지만, 그 전에 몰아 붙이면…!

"하아아아아아!!!"

상처를 입고 살짝 물러난 천의린이 기합을 지른다.

비에 젖은 그녀의 몸이 뜨거워지며 김을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전투흥분을 더 높이 끌어올린 것이다.

"젠장!"

천의린은 신성력과 함께 특이한 체질을 하나 타고 났다.

바로 호르몬과 자율신경을 자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의 진화와 결부해 생각하면 굉장히 사기적인 능력이다.

인간의 몸에는 혈당량을 낮추는 호르몬이 인슐린 단 하나지만, 혈당량을 높이는 호르몬은 글루카곤, 당질 코르티코이드, 아드레날린 등 기실 수십 개가 넘는다.

말인 즉, 인간은 급속히 혈당량을 높여서 격한 움직임을 보여야 할 때가 많았다는 뜻이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인간은 평소의 세 배나 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모두 호르몬의 급속한 분비 덕분이다.

그런데 천의린은 다른 사람이 죽음의 경계에 섰을 때나 쓸 수 있는 힘을 전투 중에 거의 패시브 수준으로 끌어낼 수가 있다는 뜻이다.

호르몬 과다 분비로 인한 부작용은 신성력으로 치유하고 말이다.

'지금도 벅찬데…!'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흰 피부가 맥동하는 혈관을 보인다.

효과가 떨어진 습? 대신 신?을 붙이고 계속 칼을 휘둘러 재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는 핏발이 선 눈을 빠르게 굴려대며 검격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냈다.

페이스에 말려들기 전에 뒤로 물러서며 부적을 적었다.

적어낸 것은 력力, 강.

쉬운 글자인지라 천의린의 공격이 날아오기 전에 적어낼 수 있었다.

팔에 붙은 두 글자가 보랏빛으로 일렁이며 근육에 힘을 더한다.

'이걸로 감당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자세를 잡은 천의린은, 이번에도 특별한 기술 없이 빠르게 주먹을 뻗어왔다.

오른손으론 검병을, 왼손엔 검면을 받치고 주먹을 받아냈다.

피하면 피할 수록 자세가 흐트러져 결국엔 먼지나듯 두들겨 맞을 테니, 몸에 무리가 가더라도 막아내는 게 옳다.

카아아앙──!

"윽!"

거대한 충격이다.

장영수의 힘이 이 정도와 비슷할텐데, 천의린은 거기에 정교한 권법과 속력까지 갖췄으니 실제 전투력은 비교가 안 되리라.

내 팔은 다행히도 잘 버텨주었지만, 다음 공격은 막지 못했다.

주먹은 내 칼을 피해 다가왔으니까.

"하아!!!"

새벽울림 ­ 바람제치기.

짧은 기합이 빛으로 화한다.

그녀의 빈 손이 주먹이 되며 칼을 피해 내 몸에 닿는다.

하르미아 시스템의 감각 증폭이 그 움직임을 잡아내었지만, 나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미 늦기도 했지만… 나도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있으니까.

­ 무엇도 사랑보다 빠를 수는 없답니다.

칠흑여제의 사랑.

타아앙!!

별빛 하나 없는, 순수의 밤이 권격을 받아낸다.

그리고, 이건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뒤져라, 이 썅년아!!!"

이번에는 내가 주먹을 뻗었다.

내가 날아갈 걸 예상한 천의린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다.

당연히, 그녀는 지근거리에서 날아온 내 레프트훅을 피하지 못했다.

퍽!!

정권지르기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그녀는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그녀가 자세를 잡기 전에 발로 있는 힘껏 걷어차 한 번 더 균형을 잃게 만든 뒤, 부적을 적어내렸다.

다시 한 번, 진?.

꽈과과광!!!

진?은 감히 드높은 하늘을 뒤흔드는 거력.

천의린의 도핑으로 증폭된 맨근육 따위가 받아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부적이 그녀의 밋밋한 가슴에 붙어 크게 울었다.

"이따 봐!!"

"……!"

보랏빛 우레가 그녀의 신성력과 근육을 찢어냈다.

곧 천의린은 가슴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다가, 곧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9위가 3위를 이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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