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34화 (34/119)

〈 34화 〉 일어나 죽이거나, 엎드려 살거나 (4)

* * *

"으아아아아!!!! 썅!!!!"

허공에서 게이트가 열리더니 천의린이 떨어져 내린다.

대련장의 흰 바닥 위에 내동댕이 당한 그녀가 벌떡 일어나 허공에다 대고 외친다.

많이 억울했나보다.

"정시혀어어어언!!!!"

"어! 분조장 왔네?"

호르몬을 조절하는 천의린의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한껏 날뛰다 일찌감치 탈락해버린 화수연이었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이 빨갱이년아!!"

"아하하, 좀 진정해. 화내고 살면 수명이 줄어든다는데. 이러니까 분조장 소리를 듣지."

"너… 하아…"

천의린이 가까스로 호르몬을 제어하며 빨갱이를 노려봤다.

졸지에 공산주의자가 된 화수연이 고양이입을 만들고 킥킥 웃었다.

부교감 신경을 활성화해 겨우 진정한 천의린이 제 얼굴을 매만지며 한숨을 뱉었다.

기교 없는 주먹에 맞았던 오른뺨이다.

"어떻게 탈락한 거야? 누구한테 맞았길래? 응?"

"네 빅젖 친구한테 맞았다, 왜?"

"와아! 시현이? 역시 한 건 할 줄 알았다니까!"

화수연이 이마에 손등을 대고 웃었다.

제가 한 일도 아니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태도다.

"너 당사자 앞에서… 하, 너한테 말해서 뭐하니."

"발렸대요~ 발렸대요~"

"…작작해."

천의린이 이빨을 까드득 갈았지만 화수연은 개의치 않고 계속 놀려댔다.

"그 망할 갑주만 아니었어도! 아니, 연막탄만 아니었어도 이겼어!!"

"걔 갑주는 대련만 열심히 봤어도 다 아는 건데~ 보기 싫다고 안 본 게 누구지이~? 기출 공부를 안 했네~ 아하하하!"

"……."

사실, 서로의 전력을 분석하는 건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특히 서로 부딪힐 일이 많은 최상위권은 서로의 대련기록 등을 돌려보며 분석하는 게 일과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하다못해 화수연도 열심히 하고 있는 걸, 천의린은 머리 아프고 졸리다는 이유로 대충하거나 그냥 안 하고 살았다.

특히 비겁한 수와 기습, 기만책을 적극 사용하는 정시현의 기록이라면 치를 떨었으니 그녀의 갑주를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쩌지. 이러면 나 등수 떨어지는데."

"왜? 이미 실기는 이것 빼고 다 만점 아냐? 필기만 잘 보면 되잖아? 설마 최저 기준도 못 맞추겠어? 설마 3위가 그 정도로 돌대가리는 아닐 텐데!"

"대련장으로 따라와, 이 썅년아."

화수연이 그 말에 꺅, 하고 달아나버렸다.

천의린으로서는 늘 있는 일이다.

'…랭킹전 돌리기만 해봐.'

둘 모두 랭킹전을 많이 돌리는 만큼 자주 만난다.

둘의 점수는 비슷하지만, 대개는 천의린이 화수연을 빨간 쥐포로 만드는 쪽으로 싸움이 전개된다.

이번엔 화수연을 아예 한줌 당근주스로 만들어버리기로 한 천의린이 정시현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이따 봐!!'

"으아아!! 짜증나아아아!!!"

그 날, 천의린은 정시현의 대련기록을 열심히 공부했다.

***

<8 kill(+500)=""/>

<도합 17명을="" 죽인="" 폭주기관차와="" 일대일로="" 맞서서="" 승리하셨군요!!=""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500)=""/>

"…진짜 죽을 뻔했네."

천의린은 어떻게든 잡았지만, 까딱하면 내가 잡힐 뻔했다.

허리춤에 연막탄이 장전된 석궁이 없었다면?

일부러 검집으로 공격을 막아서 칠흑여제의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면?

태도의 해방도가 100%가 아니었다면?

'상상만 해도 두려워지네…'

그래도, 이건 운의 승리가 아니다.

석궁에 연막탄을 장전해 허리춤에 찬 것도, 검집으로 공격을 막은 것도, 태도의 해방도를 100%로 만든 것도 나니까.

'위력제한 때문인지 글러브를 안 차고 있긴 했지만…'

에이,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지.

나는 조금 더 긍지를 갖기로 했다.

수연이를 잡는 천의린을 내가 잡은 거니까!

수연이한테 자랑해도 좋으려나, 하고 킥킥 웃으며 사원으로 돌아갔다.

수몰림의 폐쇄까지는 약 4시간.

사원에서 4시간 동안 버티고 있다가, 중앙의 험지로 가서 등장하는 배회자 하나를 잡은 뒤 어딘가에 짱박혀서 계속 숨어 있으면 된다.

그게 내 전략의 전부다.

­ 와, 그건 너무 겁쟁이 아닌가요? 영웅답지 않게 찌질하군요!!

"아니, 뭐. 생존게임에서 살겠다는 게 죄야? 얼척 없는 망토일세."

­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이 겁쟁아!!

뭐래, 이 망할 천 쪼가리가.

***

<수몰림: 5m="" 12s=""/>

"이제 슬슬 움직여볼까아~"

­ 징하게도 버텼네요, 정말.

마지막 4시간은 꽤 힘들었다.

천의린을 시작으로 온갖 팀이 갑자기 마구 들이닥쳤으니.

함정과 기습의 힘으로 어떻게든 모두 처리하긴 했지만, 까딱하면 사원 독점을 내줄 뻔했다.

­ 역시 최우수 학생의 이름이 마냥 헛것은 아니었군요!

"글쎄. 내가 강하다기보다는 걔네가 약한 것 같은데."

하긴, 약한 놈들이나 무리를 짓는 거다.

강자는 고고한 호랑이와 같아서 절대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

역시 내가 최고야!!

­ 대체 무슨 자신감이에요, 그게?

"그러게. 천의린 잡고 신나서 그런가봐."

­ 자만하지 마세요! 삼류 악당은 늘 자만하다 당하던데.

"이젠 날 영웅으로 쳐주지도 않는구나."

­ 당신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웅인걸요!

"비꼬는 거 맞지?"

망토는 흥흥거릴 뿐 답을 해주지 않았다.

건방진 악마 같으니라고.

수많은 지형과 자연이 있는 것 치고는 섬의 규모가 작았기에 수몰림을 벗어나는 데는 3분이면 충분했다.

마침내 험지로 진입해 폭우에서 벗어나자, 그새 홀딱 젖어버린 옷이 물방울을 떨구며 차갑게 달라붙어왔다.

성가신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서 적당히 말려주며 높이 솟은 산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이거 산맥이 맞아요? 어딜 봐도 뾰족한 원뿔인데…

"좁아터진 땅에 산맥을 구현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산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협곡도 있어야 하니까."

실제로 험지의 산은 유치원생이 스케치북에 그린 산처럼 뾰족하고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게다가 돌산이었기에 나무나 동물 같은 것도 없었다.

여기서 돌아다니면 엄청 눈에 띄겠지.

'하지만 험지의 심부로 들어가면 절대 안 들킬 거야.'

비정상적으로 험한 산맥 심부에 있는 깊디 깊은 협곡 안이라면 결코 찾아낼 수 없으리라.

서로의 위치가 보이는 생존자 10명부터는 조금 위기겠지만, 그래도 생존자가 굳이 협곡 아래까지 내려와 날 공격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봐도 되겠지.

하지만, 협곡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바로 험지의 배회자를 잡는 것.

험지의 배회자는 아직 풀려나지 않았기에 스폰지역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소환되면 덤벼들어서 잡으면 된다.

이 배회자를 잡느냐 못 잡느냐가 내 등수를 결정하리라.

"에이, 아무리 그래도 험지 최심부까지 기어들어와서 배회자를 기다리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겠어. 스폰지역도 제대로 모를텐데."

­ 그게 방심이고 자만이에요! 늘 최악을 대비해야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뭘 대비해야 하는 건데? 걱정되면 최대한 빨리 잡아버리고 토끼면 되지."

­ 음… 그런가요? 그런 것 같기도.

셀레스티와 시시껄렁한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산맥의 중심에 다다랐다.

깊디 깊은 협곡으로 둘러싸인 높은 산이었다.

­ 어째 모양새가 다른 산을 위로 잡아당긴 듯한 느낌인데요.

"그러게. 원뿔의 밑넓이는 안 커지고 높이만 쭉 늘였네."

어쩐지 성의 없는 산이었지만, 그래도 높고 험한 지형인 건 사실이다.

경사가 무려 60도에 가까운 산이었으니.

때문에 단화를 신은 발이 자꾸 미끄러지긴 했으나, 큰 무리 없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좁아터진 정상에 걸터 앉아 숨을 고르길 약 10분.

마침내 산의 바위가 제멋대로 굴러서 모이더니 큰 골렘의 형태를 이루었다.

무려 10m에 다다르는 거체였다.

<마지막 배회자네!="" 자연산="" 바위골렘이야!="" 인공보다는="" 골렘이="" 훨씬="" 센="" 건="" 알지?="" 보상은="" 기대해도="" 좋아!=""/>

울퉁불퉁한 바위로 전신이 꽉 아물린 자연산 골렘.

그 눈가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놈이 기동을 시작하자마자 그 몸에 부적을 하나 붙였다.

무너질 괴?.

쿠드드득…

바위란 언젠가 무너져내리는 것이 섭리.

괴?가 놈의 오른쪽 팔에 보랏빛 균열을 퍼트리더니, 곧 작은 돌조각으로 부서트리고 말았다.

갓 일어선 놈은 개의치 않고 내게 시선을 돌리더니 곧바로 반대쪽 팔을 휘둘렀다.

그 공격에 대응해 안쪽으로 뛰어들어 공격을 피했다.

그 묵직하기 짝이 없는 주먹에 땅이 부서진다.

안 그래도 좁은 산의 정상인데 정말 곤란한 짓이다.

하지만 내 부적은 충분하고, 스피릿은 흘러넘친다.

말인 즉 공격만 잘 피하며 괴?를 연발하면 내 승리는 자명하다는 뜻.

다리 사이로 파고든 나를 견제하려 골렘이 발을 굴렀지만 괴?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고오오오…!"

학습능력이 있는 자연산 골렘답게 놈은 다리에 붙은 괴?에 기겁했다.

똑똑한 개체인지 균열이 퍼지기 전에 괴?가 붙은 부분을 임의로 떼어내며 내게서 황급히 물러났다.

일부러 발을 크게 굴러 내 접근을 차단한 골렘이 땅에서 바위를 뜯어내 내게 던졌다.

체격에 맞지 않게 원거리전을 시도하는 것이다.

"칫…!"

위압스레 날아오는 바위를 피해 잠시 평평한 정상에서 구르듯이 내려와 몸을 낮췄다.

한발짝 늦게 날아온 큰 바위가 머리 위에 그림자를 만들며 산 밑으로 떨어진다.

나는 그 위용에 놀랄 새도 없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곧바로 다시 정상에 올라 골렘에게 뛰어갔다.

그 때, 난데 없이 무언가 바람을 싣고 날아왔다.

골렘이 한 짓도 아니고, 내가 한 짓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화살이었다.

퍽!

"아아악!!!"

­ 뭐, 뭐야!!

갑작스레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화살이 아킬레스건과 발목관절을 제대로 꿰뚫었다.

'젠장, 반응할 수가 없었어…!'

하르미아 시스템의 감각증폭이 잡아내긴 했지만, 보정률이 높지 않아 반응할 시간이 없었다.

상체 쪽으로 날아온 화살도 아닌지라 칠흑여제의 사랑이 막아주지도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머리를 향한 저격이 아니라는 것 뿐일까.

'어, 어떤 놈이… 이런 젠장.'

바로 앞에 위엄있게 선 바위골렘이 엎어진 나를 내려다본다.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바위골렘이 주먹을 허공에 들어올린다.

그리고, 움직일 수 없는 내게 그대로 내리 찍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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