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일어나 죽이거나, 엎드려 살거나 (5)
* * *
"…제대로 꽂혔네."
활을 천천히 내린 이수아가 뾰족한 산등성이를 올려다 봤다.
바위골렘의 주먹에 뭉개지는 정시현의 모습이 보인다.
"미안, 근데 나도 점수 좀 벌어야 하니까… 이해해주겠지?"
툰드라에서 샬롯에게 자리싸움을 밀리고, 험지로 들어와선 박지혁 패거리의 추적을 받았기에 벌어들인 점수가 별로 없었다.
평소라면 정시현이 골렘을 잡는 걸 관망하다 막타만 먹고 자리를 뜨던지 했겠지만, 점수 하나가 급했던 이수아는 정시현을 저격하고 골렘도 쓰러트리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만일 정시현을 맞추지 못했다면 그대로 쪽박이었겠지만, 주술소녀에겐 불행하게도 보기 좋게 성공해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저걸="" 정확하게="" 맞추다니!="" 6명째의="" 저격에="" 성공했습니다!="" (+360)=""/>
"애걔?"
이수아가 눈을 깜빡였다.
벌어들인 점수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800점 상당을 기대했던 그녀로선 실망스러운 점수였다.
"…막타를 골렘이 쳐서 그런가? 으응, 쪼잔한 요정 같으니라구."
메세지를 띄우고 있던 요정이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잠시 불쌍한 요정을 새침하게 노려보던 이수아가 다시 시선을 돌려 산등성이를 올려다봤다.
바위골렘은 어느새 몸을 바위로 무너트리고 가파른 산을 굴러내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차라리 산사태와 닮아 있었다.
"뭐, 좋아, 저게 다른 거랑 마주치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겠어."
활을 갈무리한 저격수가 배회자를 쫓았다.
***
꺄아아악!!! 영웅니이이임!!!
"……."
안 돼요!!!! 이렇게 돌아가시면… 흐아아앙…
"…여기 환상세계야."
앗, 그, 그런가? 그보다 살아계세요!?
죽은 척을 풀었다.
망토가 야단법석을 떠는 걸 보니 진짜 내가 죽은줄 알았나보다.
나는 당연히 살아 있고, 생각보다 멀쩡하다.
다리는 으스러졌지만.
바위골렘은 B급 헌터가 손쉽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괴물이다.
같은 수준의 괴물 중에서는 힘이 수위에 꼽히는 녀석이지만, 당연히 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칠흑여제의 사랑을 뚫을 수 있는 힘은 나오지 않는 게 당연했다.
물론 골렘이 계속 날 내리쳤다면 팔로 감싸는 게 한계였던 머리가 깨져 죽었겠지만, 맞는 순간에 이 악물고 죽은 척을 한 덕에 놈을 적당히 속여넘길 수 있었다.
이건 사기야! 죽은 척이라니!
"으, 그보다… 엄청 아프네, 이거… 쿨럭."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온다.
갑주를 두른 팔로 감싸기는 했지만 머리도 결코 무사하진 못했던지라 피가 연신 흘러 나왔다.
팔로 감싸지도, 칠흑갑주가 보호하지도 못한 다리는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하며 작살이 나버렸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망가진 크로스백에서 알약을 하나 꺼내 씹어 삼켰다.
재생력을 높여주는 회복약이었다.
꽈드드드…
머리의 출혈이 잦아들며 다리가 느리게 붙기 시작한다.
뼛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살점을 마구 긁는다.
정말 더럽게 아프다.
"으, 흐으…"
괜찮으신가요?
"으, 응? 괜찮아, 여제님…"
걱정되게…
[연결된 디바이스 업데이트 확인.]
[권능 '어둠': 이제 감각 보정률을 음수로 내릴 수 있습니다.]
[보정률: 54%]
보정률이 음수로 내려가며 통각을 차단한다.
어둠이 비단이불이 되어 온 몸을 부드러이 끌어안는다.
아프지 말아요.
"고, 고마워…"
내려간 보정률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목을 움직여 다리를 내려다봤다.
아직 회복이 한창이었음에도, 마치 남의 다리인 것 마냥 무덤덤한 감각이었다.
진통제를 맞은 게 이런 느낌이려나.
'그나저나 연결된 디바이스라니. 칠흑여제의 사랑이 하르미아 시스템에? 확실히 처음에 시스템을 얻을 때 그런 문구를 보긴 했지만…'
사실, 감각둔화는 갑주생성에 비하면 대단한 능력은 아닐 터.
하지만 칠흑여제의 사랑으로부터 갑주생성이 아닌 다른 힘을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거다.
'감각둔화와 어둠… 사람은 어두운 밤에 편안하게 안식을 취하지. 그래서 그런 기능이 생겨난 건가…?'
그렇다면 등 뒤에 있는 퍼베이시브 에픽은 어떨까?
수몰림의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 셀레스티가 잘 안 보인다며 하르미아 시스템과 드잡이질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분명 연결 불안정이라고 뜬 문구를 봤으니, 어떻게 연결이 가능하긴 할 것이다.
만일 하르미아 시스템과 퍼베이시브 에픽을 연결한다면, 칠흑여제의 사랑처럼 다른 기능이 생겨날까?
혹시 칠흑여제와 하르미아의 관계가 특수해서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망토와 연결이 되더라도 새로운 기능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생각해요? 아직 많이 아파요?
"응? 아냐, 이제 괜찮아. 여제님이 도와주셨거든."
여제님이요? 이 발칙한 여자 말이에요?? 너 영웅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뭐? 이게 말하는 거 하고는…"
에잇!!
빨간 망토가 갑주를 천 모서리로 콩콩 쳤다.
칠흑여제는 별 반응이 없었다.
"뭐하는 거야, 이 도움 안 되는 천쪼가리야."
도, 도움이 안 돼요? 박물관에서는 제가 얘보다 훨씬 일 많이 했거든요?!! 그보다 영웅님 잘 때 얘랑 얘기를 많이 해봤단 말이에요!!! 글쎄 얘가 저한테 뭐라 했는지 아세요??
"…나 잘 때 대화를 했다고? 무슨 대화를 했는데?"
조용히 하세요, 셀레스티.
반응이 없던 칠흑여제의 사랑이 셀레스티에게 나지막이 경고했다.
진짜로 무슨 대화를 하긴 한 건가…?
뭐, 뭐! 내가 말하면 뭐 어쩔 건데! 때릴 거야? 그 심상세계에서?! 덤벼!!
…때리다니요. 무슨 말을.
영웅님 앞이라고 내숭 떨지 마, 이 나쁜…!
"아, 아니, 왜 갑자기 싸우고 그래…?"
그보다 심상세계? 거기서 만나는 건가?
영웅님!! 얘가 뭐라고 했냐면…!
자, 잠깐.
영웅님한테 찝적거리지 말라고 했어요!!!
…….
이 불여우 같은게!! 감히 영웅님의 파트너인 내게 찝적거리지 말라니!!! 이게 말이 돼요?!!!
…너 질투도 할 줄 알았니?
갑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갑주가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여, 여제님?"
…….
"진짜 그랬어요?"
…….
사실 칠흑여제의 사랑에 자아가 있다는 것도 직접 수정을 얻고 나서야 알았다.
게임상에서도 발동시 대사가 있는 장비이긴 했지만, 그건 그냥 칠흑여제의 남은 찌꺼끼가 외치는 공허한 울림인 줄만 알고 있었으니.
'아니, 근데, 뭐… 난 괜찮은데.'
장비 이름부터가 '칠흑여제의 사랑'이 아닌가.
어찌 보면 날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나도 별 상관하지 않고 있었고.
그런데 아무 상관 없는 셀레스티에게 질투를 하다니…
"여제님, 셀레스티랑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늘 붙어 있었으니까 아실 거 아니에요?"
…….
"저는 기왕이면 둘이 사이 좋게 지내면 좋겠는데… 안 되나요?"
…제가 싫진 않으신가요?
"네? 제가 여제님을 왜 싫어해요?"
그냥, 마음대로 좋아하고… 되도 않는 질투나 하고…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나를 몇 번이고 살려준 이를 싫어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건 그냥 해프닝일 뿐인데요, 뭐. 그게 싫어할 이유가 되나요?"
…고마워요.
잠깐, 잠깐!! 혹시 둘이 사귀어요??? 대화가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그럼 내가 여제님에게 화내면서 욕하고 그래야한단 말이니? 내 심장에서 억지로 떼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칠흑여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내가 뭔가 처벌의 권리를 가진 건 아니다.
그냥 다음부터 그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끝내면 될 일이지.
"그래도 셀레스티에게 따로 사과는 해주세요.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어요. 그쵸?"
맞아!! 사과하라!!
…알았어요. 죄송해요.
나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골렘은 어디 갔지…?'
험지의 배회자를 못 잡으면 내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사원을 독점하는 건 선택의 범주였지만, 이건 그냥 필수다.
이번 수행평가의 성패가 달린 일이니까.
보정률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순간 저격이 또 날아오지 않을까 흠칫해서 다시 주저앉으려 했지만, 다행히도 눈에 띄는 생존자는 없었다.
다행히도, 바위골렘은 산맥의 외곽쪽에서 무언가와 싸우는 중이었다.
'저건 아마 날 저격한 생존자겠지… 실력을 보아하니 샬롯인가?'
내가 아무리 눈에 띄는 망토를 두르고 있다지만,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있는 내 발목을 정확히 노려 쏠 수 있는 건 둘 밖에 없다.
하지만, 골렘의 전투에서 정령이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샬롯은 아닌듯 싶다.
그렇다면 남는 사람은 하나 뿐.
"수아야, 너구나…?"
조기반 때 수행평가를 같이 했던 그녀 밖에 남지 않는다.
나는 칼을 줍고 산을 날듯이 뛰어 내려갔다.
배회자가 잡히기 전에 도착해야만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