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일어나 죽이거나, 엎드려 살거나 (7)
* * *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모님이 뭔가 수를 쓴 건가?'
꼼짝 없이 바위골렘에 맞아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뭔가 떨어져 날 위협하던 골렘을 죽여버렸다.
비록 점수는 못 받았지만 내 목적이었던 큐브도 땅바닥에 고스란히 남았다.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일까.
하, 하늘에서 불꽃의 사나이가 떨어졌다!!
셀레스티가 갑작스런 정적을 깨고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허벅지에서 화살을 뽑고 큐브를 주웠다.
어찌 된 일인지는 암만 생각해도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내게 매우 큰 이득을 안겨다준 건 사실이니 열심히 움직이는 게 도리에 타당할 터였다.
'근처 절벽에서 떨어진 건가? 설마 분신자살일 가능성은 없을 테고, 아마 싸우다가 떨어졌을 거야. 지금 상태로는 싸우기가 곤란하니… 누군가 마주치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겠어.'
그리 판단을 내리고 허겁지겁 흘린 물건을 줍고 떠나려던 그때.
또다시 누군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방금 전의 불꽃사내와 달리 깔끔하게 착지한 여학생.
재수 없게도, 그녀는 1학년 최강의 마법사, 채유하였다.
"어! 안녕, 시현아? 잘 지냈어?"
"…아, 안녕."
'좆됐다.'
…아무래도 하늘에서 불타는 사람을 떨어트린 건 유하였나보다.
왜 하필이면 유하인 걸까, 젠장.
그녀는 태연하게 불타는 바위 사이를 거닐며 무언가를 찾더니, 내게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회복약을 삼킨 나는 그 장난스런 눈빛에 큰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래도 진짜 죽을 때가 온 모양이다.
"여기서 뭔가 줍지 않았어? 이 잔해 사이에서 말야."
"응? 모, 못 봤는데? 뭔가 있어?"
"아, 그래. 네가 등 뒤에 숨긴 거. 거기 있었네. 휴, 이미 써버린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야. 후후."
유하가 기분 좋게 웃더니 양손에 마법진을 하나씩 틔워 올렸다.
날 죽이겠다는 의지가 함뿍 담긴 행동이었다.
그 행동을 보며, 나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큐브를 잡고 유하를 노려봤다.
"잠깐만, 유하야. 다 좋은데 이게 무슨 큐브인지 알아?"
"글쎄? 써버려도 상관은 없어. 널 죽일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인 걸."
"정말? 설명문에 '돌리면 원하는 생존자를 한 명 죽일 수 있습니다.' 라고 써 있는데?"
그 말에 유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피식 웃었다.
마치 귀여운 생물을 보는 듯한 반응이었다.
"정말? 그럼 왜 안 돌려?"
"…난 친구를 죽이고 싶지 않은 걸."
"그래? 네가 그렇다고 해도 난 널 죽일 생각으로 만땅인 걸? 시험엔 전력을 다해야 하니까!"
"그, 그럼 나도 돌릴 수 밖에 없어!"
"아하하, 그리고 애초에 설명문은 하르미아님의 말투로 써 있잖아. 그런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그걸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니?"
…아뿔싸.
내 정보창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유하가 웃으며 마법진을 굴렸다.
충동적으로 질러버린 블러핑이 완전히 쫑났다는 걸 깨달은 나는 슬슬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자, 자, 자, 잠깐만!! 못 본 척 하고 지나가면 안 될까!? 응?"
"미안, 나도 성적관리 빡세게 해서 빌보드 1등 한 번 해보고 싶거든. 미안하지만 너 같은 강자를 남겨둘 수는 없을 것 같아. 나가면 뭔가 맛있는 거라도 사줄…게!!"
"!!"
유하가 별안간 팔을 휘둘러 내게 마법진을 내던진다.
마법진의 형태로 보아, 인덕티브 타겟이 틀림 없었다.
어차피 유도성이 있는 마법이기에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냅다 뒤로 뛰어들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연막탄을 힘껏 밟았다.
갑작스런 유하의 등장에 미처 줍지 못한 물건이다.
구슬이 꽈직, 하고 깨져나가더니 연막을 피워 올렸다.
"카에다! 히리샤! 샤레니아나!!"
급속히 퍼지는 연막 너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동언으로 보아, 날아오는 마법은 아마도 아이시클 개틀링일 터였다.
"칫…!"
인덕티브 타겟의 과녁은 정확히 무릎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칠흑여제의 사랑이 보호하지 못하는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뜻이다.
연막 사이를 뚫고 무릎을 노려오는 작은 고드름의 탄막.
과녁이 붙은 이상은 피할 수 없는 공격이기에, 막아야 한다.
나는 탄막을 등지며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은 뒤 칠흑여제의 사랑을 켰다.
티디디디디딩ㅡ
무릎으로 가는 동선을 가로막은 칠흑갑주가 수많은 고드름을 손쉽게 막아낸다.
아이시클 개틀링은 많은 고드름을 빠르게 쏘는 대가로 위력이 줄어든 마법이니, 큰 부담은 없었다.
고드름이 깨져나가는 청명한 음색 사이에서 부적을 하나 적어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구현하는 것은 불꽃…!'
오행의 화火? 아니, 얼음은 어디까지나 수?의 속성을 띠기에 수극화??火로 무력화되는 오행의 화火는 필요 없다.
더욱이 내게 필요한 건 탈출의 기회와 순간적인 혼란.
갑작스럽고 강맹한 힘이 필요하다.
써내려나가는 것은 팔괘의 불꽃, 이?.
아니, 이것도 부족하다.
무리해서라도, 하나를 더 적는다.
그렇게 이?가 한 부적에 두 글자.
외괘는 이?, 내괘도 이?.
불이 두 개 겹쳐 있으므로 화火를 괘 이름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불길은 자꾸만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띤다.
때문에 이?는 서로 헤어짐을 뜻하지만, 그 전에 서로 뭉쳐 있어야함을 전제한다.
갈라진 두 불길이 다시 만나면 더욱 강한 불꽃을 일으키기 마련.
떠날 리?는 붙을 려?라고도 읽히니─
더 멀리, 더 높이, 더 세게, 더 뜨겁게…
따라서 이?는 시너지, 맹렬함, 열정.
육십사괘??四?, 이위화?火.
"흐아아아아!!!"
부적을 등 뒤로 내뻗는다.
주홍빛을 띤 자색 불꽃이 강맹하게 폭사해, 한순간에 전장을 모조리 뒤덮는다.
공간의 반전 속에서 고드름은 아스팔트에 닿은 눈송이마냥 덧없이 녹아내린다.
퍼져나간 불꽃이 흰 안개를 거느리고 한껏 일렁인다.
이글대는 바위가 뜨겁다.
"카에다! 샤마다…!"
"──, ────, ───…"
"이스테, 르… 쿨럭!"
유하는 상황 반전을 원했는지 수계마법의 주문을 읊었지만, 기습적인 장송곡으로 끊어버렸다.
그녀가 마력동요에 타격을 입은 사이 그대로 몸을 낮추고 불길을 가로질러 힘껏 도망쳤다.
말 그대로, 힘껏.
"시에나!! 리트!! 지라이나!!!"
마력동요를 짓누른 유하가 리인포스드 매직미사일을 쏘았다.
아직 허벅지의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은데다 무릎에 과녁이 걸려 있는지라 그 마법은 미처 피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마법이 이미 다친 다리의 무릎에 맞았다는 것과, 리인포스드 매직미사일은 단순히 손톱만한 관통상으로 그치는 마법이라는 점이다.
퍽─!
"악…! 흐윽…"
이를 악 물고 신음을 참았다.
꼴사납게 넘어지기 전에 칼을 지팡이 삼아 땅에 꽂는다.
못 쓰게 된 다리를 잠시나마 대체할 수단으로 태도를 짚은 나는 재빠르게 몸을 놀려 산을 올랐다.
연습도 안 된 이위화?火를 펼치느라 소모된 스피릿은 대략 90% 남짓.
잠깐이지만 장송곡까지 펼쳤으니 남은 스피릿은 정말 쥐톨만큼도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부적술 한 번이 한계라는 뜻.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카에다!!! 하이츠!!! 익스피리아 카스트로!!!!!"
유도성이 좋은 리인포스드 매직미사일로 위치를 특정하고 나를 쫓아온 유하는 대뜸 그녀의 필살기, 블레이징 페네레이션을 날렸다.
이위화?火와 연막 속에서 무척이나 애를 먹었는지, 유하는 온 몸이 그을음 투성이였다.
그녀의 분노가 섞인 소각의 창이 패도적인 기세를 품고 날아온다.
유하가 현재 수준으로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니, 스치기만 해도 잘 익은 주수리 탄두리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원하고자 하는 바를 이뤘다.
"…왔다!!"
나는 단순히 도망만 치고 있던 게 아니다.
지도를 바탕으로 최적의 도주경로를 생각해놨고, 실제로 그 루트에 따라 도망치고 있었다.
내가 도달한 곳은 험지 중앙의 큰 산을 감싸고 도는 협곡.
싸움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지형이다.
승리의 미소를 지은 나는 끝없는 어둠이 가득한 협곡으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넌 아직 한참 멀었다, 유하야아아아아!!!!!"
직선으로 곧게 날아가던 소각의 창이 갑작스레 아래로 떨어지는 나를 쫒지 못하고 협곡 절벽에 부딪혔다.
암벽이 장엄한 폭발로 터져나가며 위압적인 광경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러한 위력과는 별개로 내게는 불티 하나조차 닿지 않았다.
결국, 나는 유하에게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
쿠과과과…
"…무슨 소리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현서진이 문득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빌보드 1위임에도 성적에 큰 관심이 없는 그는 나가서 남들과 싸우기보다 협곡 밑바닥에 틀어박혀서 면벽수련하기를 선택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검을 집어든 그는 자연스럽게 칼을 한번 털어 빛을 일으켰다.
누가 봐도 완연한 검기지경??之?이다.
'…흠. 한번 가봐야겠군. 슬슬 몸이 뻐근한 참이었는데.'
검성의 아들이 면벽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
우아아아아!! 어째 요즘 들어 떨어지기만 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거든!!!"
기껏 주워담은 부적이 하늘에 흩뿌려진다.
다친 다리로는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없겠다는 판단 아래, 흩날리는 부적을 하나 낚아채 스피릿을 끌어올렸다.
마지막 스피릿으로 적어내린 것은 경?.
내 몸의 무게를 줄이는 부적술이다.
"으아아앗!!!"
쿵!!!
경?으로 무게를 한껏 줄였음에도 한 다리로 착지하는 건 무리였는지, 큰 충격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다리가 부러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불길한 고통이 발목에 이는 것을 보니 제대로 접질린 것 같다.
"윽, 흐으… 착지를 잘못했어…!"
다리가 제일 고생이 많네요.
"그러게…"
양 다리를 모두 다쳐버려 거동이 곤란하게 됐지만, 일단 유하도 블레이징 페네레이션을 쏘느라 지쳤을 게 자명한데다 자기네 무리도 챙겨야 할 테니 굳이 이런 곳까지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땅에 쓰러지듯 앉은 뒤, 망가진 크로스백을 뒤적여 회복약을 찾았다.
하지만 크로스백엔 굵은 소금 몇 알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개털이네요. 떨어지면서 다 흘렸나봐요.
"…괜찮아. 이젠 큐브만 있으면 되니까."
허리춤에서 분투 끝에 사수해낸 반투명한 감람빛 큐브를 꺼내 자랑스럽게 들어올렸다.
실은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아니고 떨어지면서 색이 변했을 리는 없을 테니 아무튼 감람빛이 맞았다.
<와아, 축하해!="" 마지막="" 배회자를="" 잡았구나?="" 아니면="" 누군가한테="" 뺏은="" 건가?="" 하긴,=""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 돌리면="" 두가지="" 선택지가="" 나올="" 거야.="" 하나는="" 즉시="" 발동되는="" 완전회복이고,="" 다른="" 데스카운트="" 추가야.="" 뭘="" 선택하든="" 네="" 자유지만="" 한="" 번="" 3초="" 안에="" 선택해야="" 하니="" 신중하게="" 사용해!=""/>
기분 좋게 웃으며 감람빛 큐브를 한 손으로 던졌다 받으며 놀다가 큐브를 돌렸다.
차작, 하고 돌아가는 큐브의 감촉이 기분 좋다.
곧 어둠 속에서 큐브가 빛나더니 글씨 두 개를 허공에 띄웠다.
<1. 완전회복=""/>
<2. 데스카운트="" 2분="" 30초="" 추가=""/>
이곳에서 완전회복은 끝내주는 옵션이다.
한순간에 전세를 역전하는 카드가 되기도 하고, 또 하나의 생명 같은 노릇을 하기도 한다.
지금 같이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도 유용하겠지.
하지만, 그딴 용도로 쓸 거라면 애초에 거들떠도 안 봤을 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목표는 우승.
즉, 최후생존이다.
'이제부턴 살아 있기만 하면 돼…'
<2번을 선택했습니다!=""/>
<남은 데스카운트:="" 5m="" 30s=""/>
기본으로 주어지는 데스카운트가 1분, 1킬당 추가 부여되는 데스카운트가 10초이고 내가 12킬이니까 2분, 방금의 큐브 사용으로 2분 30초.
나는 이제 금지구역에서 5분 30초나 버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29킬을 한 생존자가 있지 않는 한 무조건 내가 이긴다…!"
어, 음, 굉장히 부끄러운 방침인데요.
'최후생존'에는 폭력 따위 필요 없다.
다른 이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살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이제부터, 나는 이 협곡에 숨어서 모두의 데스카운트가 다 떨어질 때까지 견딜 것이다.
이번 수행평가에 참가한 생존자가 도합 200명을 살짝 넘기는 수준인데 홀로 29명을 죽인 생존자가 있을 리 없을 뿐더러,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많은 생존자를 죽인 이는 이후 게임의 전개에서 최우선적인 척결대상이 될 터였다.
'더럽고 치사해도 어쩌겠어.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가 최고로 강한 건데.'
전통적으로 돌잡이 탁자에 명주실을 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인생은 역시 굵고 짧은 것보다는 가늘고 긴 게 훨씬 좋다.
"일어나 죽지 마라, 엎드려 사는 거다!"
뭔가 비틀린 발언인데요…?
이러나 저러나, 조금만 더 견디면 내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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