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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주술사로서 살아간다는 것-38화 (38/119)

〈 38화 〉 일어나 죽이거나, 엎드려 살거나 (8)

* * *

뚜벅, 뚜벅…

다리의 통증에 끙끙대며 앓고 있자니, 웬 발걸음 소리가 저 너머에서 울려왔다.

나는 기함해서는 벌떡 일어나 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봤다.

저 멀리서 빛이 엷게 흔들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누, 누가 오는데요…?

"…항우가 옛날에 곤경에 처했을 때 뭐라 했는지 알아?"

­ 항우? 만인지적? 뭐라 했는데요?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그런게 아니다."

그러니까, 난 잘했는데 재수가 지지리도 없는 거라고.

항우와 내가 다른 점이라면 항우는 위기를 무력으로 이겨냈고, 나는 그러지 못할 게 자명하다는 것 정도일까.

천의린부터 이수아, 바위골렘과 채유하까지 이겨냈지만 두 다리로 서있는 것도 벅찬 지금으로서는 빌보드 200위와 싸워도 못 이길 게 분명하다.

'부적도 없고, 다리도 다 안 나았고, 스피릿도 부족하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게 뭐지?'

손으로 땅을 훑어 무언가를 집었다.

길고 차가운 외날을 가진 무기.

아카데미제 태도다.

"……."

혹시나 해서 허리춤을 훑었지만, 떨어지면서 망가진 석궁만이 손에 걸릴 뿐.

이럴 줄 알았으면 석궁이라도 하나 더 챙겨두는 건데…

[어둠투시를 활성화합니다.]

[경고: 눈에 큰 피로를 유발할 수 있음.]

하르미아 시스템으로 어둠 속을 꿰뚫어봤다.

주변엔 마땅히 숨을 수 있는 장소도, 쓸만한 도구도 없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무리한 운용으로 말라오는 눈을 달래며 적이 다가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그곳엔 검기로 빛을 일으킨 현서진이 있었다.

'…하필이면 쟤가 수행하고 있던 쪽으로 떨어진 거야?'

어둠투시를 껐다.

현서진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이상은 살아나갈 길 따위 없다.

자비 없는 성광도래가 날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잠깐만. 발걸음이 꽤 조심스러워. 누군가를 죽이러 온다기보다는 정찰의 의미가 짙은 건가? 그리고 현서진은 원작에서도 배틀로얄이 최후반에 달해서야 겨우 움직였잖아?'

현서진이 아닌 다른 캐릭터로 배틀로얄을 진행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다른 생존자가 다 죽으면 그제서야 기어나와 주인공을 상대한다.

나름 배틀로얄 이벤트의 최종보스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검이 무뎌서 난이도가 크게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무력으로 그를 어쩌겠다는 건 터무니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스피릿 만땅에 부적 빵빵한 만전 태세면 몰라도 이 모양 이 꼴이 된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현서진의 등장에서 한줄기 희망을 느꼈다.

무력으론 맞설 수 없을 테지만, 유하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속여 먹을 여지가 있는 상대니까.

그의 성격이 둥글다곤 해도 엄연히 극정 아카데미의 학생인만큼 무릎 꿇고 살려달라 비는 건 소용이 없을 테지만, 다른 방식의 꼼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지도 몰라.'

자세를 곧게 하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아픈 다리를 어거지로 굽혀 가부좌를 튼 뒤, 허벅지 위에 칼을 올려놨다.

눈을 살풋 감고 죽은 척을 운용해 신진대사를 소폭 가라앉혔다.

명상하는 '척'을 하는 것이다.

"……."

내가 노리는 건, 현서진이 내 상태를 멋대로 지레짐작하고 자리를 피해주는 것.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터무니 없는 사기극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해볼만 해. 깨달음의 가치를 아는 놈이니까. 이외엔 수가 없기도 하고…'

뚜벅, 뚜벅…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기묘한 줄타기의 시작이다.

***

현서진은 짙은 어둠을 가르고 현장에 다다랐다.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건 분명히 이 근처.

그는 예상대로 부서진 돌무더기가 발에 한가득 밟히는 걸 느꼈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돌 사이에 무언가 끼어있어.'

어지간한 감각이 아니면 느끼지 못했을 사실이지만, 부산에서 서울까지 눈을 감고 횡단하는 등의 극한수련을 해온 그에겐 별것 아닌 일이었다.

현서진이 칼을 내려 발 밑을 비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무더기 사이에 난데 없이 노란 종이가 끼어 있었다.

궁금증을 느낀 현서진이 돌을 치우고 종이를 집어들었다.

'…부적이네. 분명히 시현이가 쓰던 거였지, 아마?'

잠시 손가락을 비비며 부적의 묘한 질감을 만끽한 현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정시현이 이곳에 있는 건가?

현서진이 고개를 털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있다면 조용히 슥삭하거나 적절히 쫒아버리고 다시 면벽에 들어갈 뿐이다.

아무리 환상세계라곤 해도 깊은 협곡에 앉아서 수행하는 것 만큼 희귀한 경험은 또 없으니까.

'…저건?'

현서진이 검을 곧추세웠다.

한층 더 밝아진 검기의 빛이 누군가를 비춘다.

저 멀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정시현이 있었다.

"…저기, 시현아?"

"……."

"흠…"

현서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완연한 정적 속에서 말을 걸었는데도 일말의 반응도 없는 걸 보니 아예 못 들은 모양이다.

자는 건 아닐 텐데.

'명상을 한다고 해도 청각이 머는 건 아닌데… 못 들은 척이라기엔 귀를 쫑긋거리는 반응도 없었어… 잠깐. 자극에 대한 반응이 사라졌다고? 혹시 무아지경인가!?'

무아지경!

무인이 크나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 경험한다는 경지이다.

재능으로는 검성을 한참 뛰어넘는다는 현서진도 일생에서 딱 두 번 경험해본 경지였다.

'잠깐, 대체 무엇으로? 그 처참한 검술에 깨달음이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주술인가? 으음, 주술은 무예가 아닌데…? 아니지, 마법은 그런 게 없다 들었지만 주술에는 비슷한 게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현서진은 일단 검의 빛을 크게 줄였다.

한국의 법률에 따르면, 무아지경을 방해 받은 사람이 우발적으로 방해한 사람을 쳐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받는다.

그만큼 무아지경이 무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라는 뜻이다.

더욱이 무아지경을 직접 경험해본 그가 그 순간을 방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니.

'…그런데 뭔가 이상해. 지금 이 순간에? 생사를 건 전투 중도 아니고, 뼈를 깎는 수행 도중도 아니고, 지금?'

마력의 격류가 일어나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애초에 마력을 쓰지 못하니까.

하지만 무아지경에 든 순간이 조금 이상하다.

'분명히 저 돌무더기 사이에 부적이 끼어있었어. 고로 시현이는 저 위에 있었던 붕괴에 휘말려 떨어졌거나, 그랬겠지. 하지만 떨어지자마자 바로 앉아서 무아지경에 빠져든다고? 말이 안 되는데? 칼은 왜 다리에 올려둔 거지? 주술에 의한 무아지경이라면 칼을 몸에 붙여 놓을 이유가 없잖아. 정작 부적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단순히 반응이 없다는 것만으로 무아지경이라 생각한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반론과 반례가 튀어나온다.

'애초에 스피릿이 안 움직이는 것도 이상하잖아. 신성력을 가진 무인도 무아지경 때는 신성력이 마구 날뛰는데 스피릿이라고 예외일 리가. 그리고 정말 떨어지면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순간 무아지경에 빠져들어서 의식을 잃었겠지. 그렇다면 머리부터 떨어져서 죽었거나 해야하는데. 또…'

하지만, 그는 곧 마음 한 켠에서 스멀거리는 또 하나의 가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 모든 의심점에도 불구하고, 정말 그녀가 무아지경에 빠져든 거라면?

괜히 공격했다가 그녀의 무아지경을 깨버린다면?

자신의 죄책감은 차치하고 나서라도, 무아지경을 방해 받은 그녀가 원한을 품고 고소장을 날리거나 칼을 들고 덤벼든다면?

"……."

현서진은 생각 외로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다.

어느새 그의 머리는 '무아지경이 아닐 것이다'가 아닌 '방해한다면 내가 어떤 꼴을 당할지'로 가득 찼다.

기껏 추론해낸 이성적인 논리는 다 날려먹고 말이다.

'부적술에 능하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와선 몸에 부적을 붙인다던지, 내 사진을 붙인 지푸라기 인형으로 밤새 못을 박아 저주를 건다던지, 그도 아니면 이상한 노래로 내 정신을 파괴한다던지…!'

현서진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세간에 알려진 주술의 이미지가 실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기에 상상력이 쓸데 없이 풍부한 그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시현이 들으면 억울함과 서러움에 발을 굴렀겠지만.

하지만 그는 곧 머리를 털고 이성을 되찾았다.

상식적으로 그녀가 무아지경에 빠졌을 리 없다는 걸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헛된 번뇌에 빠지게 한 소녀를 응징하기 위해 칼을 쥐고 다가섰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던 그 순간, 정시현의 팔이 허공에서 춤췄다.

손 끝에 맺힌 자색의 스피릿이 먹이 되어 종횡무애로 글자를 써내려갔다.

그 글자는, 다름 아닌 삼재三?였다.

천?, 지?, 인人.

"!!!!"

현서진이 급히 떨어졌다.

허공에 부적술을 시전하다니,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불타는 세 글자를 보며 황망히 입을 벌렸다.

'정말로…무아지경…이었다고…?'

무아지경 중이라도,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 모종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 행동은, 일반적으로 무아지경을 통해 새로이 깨달은 바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녀가 허공에 글자를 써갈긴 건 그런 맥락에서 나온 행동이리라.

'…이럴 수가. 난 방금 무엇을…!'

반 친구의 무아지경을 사기극으로 의심한 것도 모자라, 무아지경을 깨버리기 직전까지 갔다.

그녀의 깨달음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로 무아지경을 깨버렸으리라.

"……."

현서진은 자신의 행동에 큰 충격을 느끼며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그는 자신이 무인으로서의 긍지를 지키며 살아왔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품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날, 현서진의 가슴 속에는 정시현이란 상처가 깊숙히 박혔다.

***

'씨, 씨발… 들킬 뻔 했네.'

현서진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다급하게 스피릿을 쥐어짠 게 유효했다.

내가 허공에 쓴 건 조금 있어보일 뿐 아무런 의미 없는 글자다.

부적술을 알고 있다면 허공에 글씨를 쓰는 건 일도 아닌데다, 현상도 사물도 아닌 천지인??人은 내 수준에선 전혀 의미 없는 문자였으니.

애초에 부적술로서의 요건도 갖추지 못한 생쇼였을 뿐이다.

'…가는구나. 다행이야, 정말.'

현서진이 저 너머로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취하고 있는 자세는 풀지 않았다.

혹시라도 다시 와서 확인해볼 수도 있는 거니까.

한 세 시간 정도는 이러고 있어야할 처지였다.

셀레스티가 내 귀에 천을 붙이곤 얕게 속삭였다.

­ 휴우, 깜짝이야… 그나저나 엄청 충격 받은 것 같던데요. 트라우마 생긴 것 같아요.

"…나중에 가서 사과해야겠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뭐.

살았으니까 된 거 아닌가?

살아남은 자가 강자인 걸!!!

'이런 건 속은 놈이 바보지. 우리 유하였으면 안 속았다.'

역시 빌보드 1등은 저런 순진한 놈보다는 유하가 어울리는 것 같다.

메롱이다, 메롱.

그렇게 3시간 뒤, 나는 그 자리를 떠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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